먼저 삭제 해서 죄송합니다. 
제 북로그는 친구가 0인 상태예요. 
제가 먼저 모두 지웠어요. 
친구 삭제 부탁드립니다. 죄송합니다.



북플에는 왜 차단기능이 없을까-이것은 처음부터 불편했습니다. 
북마크 정도나 즐겨찾기 정도가 딱 좋은데… 
아 인스타그램 같은 건가? 
그런데 X에도 인스타그램에도 같은 무서움이 있곤 했습니다. 
‘팔로우’도 아니고 ‘친구추가’로 시작하는데에 대한 부담감은 있는데, 막상 추가한 이후의 부담감도 저는 이 플랫폼에 상당해요. 
어떤 글을 보고 좋으면 자주 보고 싶어 먼저 ‘즐겨찾기’부터 하고 싶은데 친구 추가 기능 뿐이고. 친구 추가 해놓고 보면 그 사람 글이 다 좋은 건 아니다, 라는 걸 문득 깨닫고, 뿐인가요? 나랑 완전히 생각이 다른 사람이었구나 싶기도 하고요. 어느 순간 보면 불편해지곤 합니다. 상처도 받습니다. 
그걸 저에게서 느끼시는 분들도 있을 거고요. 저야말로 2년전부터 관심사와 어쩌면 성향이 바뀌었으니…. 

’친구‘들의 글이 이따금 저에겐 다정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다른 누군가에게 역시나 배려없는 글을 남기곤 했을 것이고요. 더이상 그런 글을 읽을 자신이 없습니다. 싫어하는 작가에 대한 글도 더이상 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작년부터 ’친구‘들의 글을 안 읽기 시작했고요. 그러다 보니 팔로우/팔로잉/친구들 항목이 정말 무거웠어요.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다면 제가 의미있는 ’친구‘로서의 책임 같은 걸 안 하고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좋아요‘가 때론 굉장히 폭력적인 도구라고 느껴지기도 하면 제가 이상한 거 맞나요? 

선택권도 없다고 느꼈어요. 저는 걷고 읽고 기록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생각을 나누는 게 대체로 힘이 듭니다. 비공개로만 쓸까 싶지만 북리뷰의 특성상 비공개로만 기록하는 것은 작가나 편집자나 역자에 대한 도리는 아닌 거 같았어요. 대체 북플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 걸지 아직도 잘 모르겠네요. 

제 행동이 도라이같고 관종같고 못된 행동인 거 알아요. 탈퇴하기엔 글을 너무 싸질러놔서 비공개로 돌릴지언정 선뜻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죄송합니다. 

북플 뿐만이 아니라 SNS와 연락처도 다 차차 정리하려고요. 모든 게 다 버거워서요. 덜 바빠지면. 무엇보다 사람을 정리하고 싶어요. 제 삶도 바싹 자르고 제 주변도 바싹 잘라버리고 싶어서 못견디겠어요. 


그러고 보니 좋아요 댓글 막는 기능도 없네. 



아무튼 죄송합니다. 
글 보셨으면 친구 삭제 해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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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 감상한 우리문학이랑 너무 비교되잖아. 어릴때 읽은 책에서 이런 비교는 해본적 없는데 둘다 배우가 읽어주는 시리즈라 그런가보다.
우리문학은 천재 작가가 어릴 때 철 모를 때 쓰고 10년 지나면 사라져버리고… 작가가 소진되는 기분이 들곤 했는데 그 느낌이 이런 거였나 싶게 너무 비교된다.
한국 문학에는 A.E.Housman 의 When I was one and twenty같은 느낌이 되게 심하게 많다. 아직 덜 발달된
, 아직 성장중인 젊은이들이 자기는 머리가 다 컸는 줄 알고 나이 더 들면 자연스레 풀리게 되는 고뇌가 많아서, 조금만 독자의 나이가 많아져도 공감못하게 되버림…
예를들어 현실에 아무도 말리지도 않았는데 혼자 좌절하고 기생질, 계집질에만 빠져있는 무기력한 인물들, 스물넷기혼자가 아내 연락은 피하면서 사회주의의 고뇌와 열아홉 미성년자와 연애를 병렬로 하다가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니깐(본인은 기혼자라 시집 갈 수도 없는데) 실연당해서 속상한 거면서 사회주의를 제대로 행할수 없음에 자살하는 새끼들만 주구장창 보다가
(곧 사형당할 나--브루노--만큼이나) 외투 만드는 이--준토, 준토 처--의 생계와 생존의 위협도 이해를 해서 가장추운 1월 사형당하러 로마로 떠나는 이가 외투를 돌려주고 가다니.
우리나라같았으면 생업에 종사한적 없는 부르주아 작가부터가 자기는 프롤레타리아 행세하면서 서술할 때부터 준토는 부르주아 취급하고 벌레 거머리 악덕 상인으로 묘사했겠지. 이 사람은 곧 죽는데 넌 그냥 외투 하나도 거저 못주냐 이런 느낌으로 독자까지도 비난하도록 폭력적인 소설로 만들었겠지.

문득 모든 소설을 오디오북으로 읽고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나를 상상하였다. 그림을 그리면서 점점 보이지 않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 노안, 백내장, 망막 색소 변성증이 평소엔 일하면서도 약간 불편한 정도였는데 그림을 그리면서는 좀더 답답한 느낌이 있다. 못 보는 걸 어떻게 옮겨 그려야 할까. 이럴 때 최선의 답은 공백 밖에는 없어서 허무해지는 순간이 있다.


















죽는다는 것은 번호가 바뀌는 일이다.
김혜자 배우님이 읽으신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아기 예수 중에서.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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