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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23년 6월
평점 :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라는 제목만 보고도 이 책 내용의 반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책을 펼치기도 전에 단지 제목만으로, 지나온 세월에 대한 상념과 회한에 빠질 수 있었다. 타고 나지 못해 겪었던 무수한 좌절들, 남보다 시간을 더 들이고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의 속상함 등,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포기해야하는 것들이 나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이것이 어디 문과와 이과의 구분에만 적용되겠는가? 수학을 잘해도 과학을 못 할 수 있고, 책을 읽지 않아도 말 잘하는 사람도 많다. 세상살이에 필요한 모든 자리에 ‘운명적 타고남’은 확실히 존재한다.
나는 처음에 이 책을 밀리의 서재, 오디오북으로 들었다. AI로 들려주는 것이 싫어 보통 성우가 낭독하는 것을 선택해 듣는 편인데, 처음에 아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었다. 유시민 선생이었다. 방송이나 유튜브로 저자를 많이 봐왔으므로 그의 목소리를 잘 안다. 선생은 7페이지에서 11페이지의 서문을 낭독해주었다. 듣는 동안 사실 좀 괴로웠다. 뒤의 본문도 선생이 낭독한다면 듣기를 포기할 생각이었다. 본문은 이민혁 성우가 낭독했다. 목소리, 발음, 읽는 속도가 완벽했다. 타고난 것이 이렇게 무섭다.
갈릴레이ㆍ뉴턴ㆍ다윈ㆍ아인슈타인ㆍ하이젠베르크ㆍ슈뢰딩거까지 갈 필요도 없다. 초등학교 수학에서 전개도, 쌓기 나무를 통해 공간 감각을 배우는데 그때부터 아이의 문, 이과 성향을 알 수 있다. 어떤 아이는 그저 눈으로 보고 머리로 완벽한 공간을 상상한다. 그것이 되지 않는 아이는 전개도를 그려서 오려 직육면체를 만들어 보고, 쌓기 나무를 직접 쌓아서 그 원리를 이해하게 된다. 그 과정이 조금 힘들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것이 전자에 비해 나쁜 것은 아니다.
관심이 없다는 것은 ‘잘 모른다’의 다른 말이 될 수 있다. 모르고 이해하기 힘드니까, 열심히 해도 성과가 없으니 관심이 없어지고 재미가 없어진다. ‘운명적 문과’에게 과학은 그렇게 다가온다. 이 책은 거의 평생을 인문학에 대한 공부를 한 저자가 타고난 것을 극복하고 자신이 잘 몰랐던 과학의 세계에 눈뜨고 거기서 느꼈던 것을 서술한 것이다. 나, 존재, 언어 등 보통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는 생각과 주제를 자신이 공부한 과학으로 생각의 범위를 옮겨보는 과정을 나타내었다.
이 책은 단순히 저자가 과학을 공부하는 과정과 거기에서 느낀 새로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문과생도 어려워하는 경제, 철학, 사회 등을 과학에 접목시키며 인문학이 앞으로 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제목에서 상상한 것과는 많은 것이 달랐고 생각보다 내용이 상당히 어려웠다. 많은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해 저자의 주장과 의도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저자의 인문학에 대한 생각에 약간의 오해가 생기기도 했다. 물론 나의 부족함 때문일 것이다.
타고난 것을 거스르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내가 좋아하고 잘 하는 것만 알고 살면 저자가 말하는 ‘거만한 바보’가 될지도 모른다. 세상의 흐름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 책에는 저자가 소개하는 좋은 과학 서적이 많다. 요즘은 지적이고 글도 잘 쓰는 과학 커뮤니케이터들도 많다. 책과 그들을 따라 조금씩이라도 과학에 대한 지평을 넓힌다면 내가 나를 더 정확히 알게 될 것이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인문학이 준 이 질문에 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생물학을 들여다보고서야 뻔한 답이 있는데도 모르고 살았음을 알았다. ’우리의 삶에 주어진 의미는 없다.‘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찾지 못한다. 남한테 찾아 달라고 할 수도 없다. 삶의 의미는 각자 만들어야 한다. ’내 인생에 나는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 ’어떤 의미로 내 삶을 채울까?‘ 이것이 과학적으로 옳은 질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그런 것을 연구하지 않는다. 질문은 과학적으로 하되 답을 찾으려면 인문학을 소환해야 한다.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인문학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p.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