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마음에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감정이 있다.물론 타인의 불행에 동정하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불행을 어찌어찌 빠져나오게 되면 이번에는 이쪽에서 뭔가 부족한 듯한 심정이 된다. 조금 과장해 보자면, 다시한 번 그 사람을 같은 불행에 빠뜨려 보고 싶다는 생각조차 든다. 그리하여 어느 틈엔가 소극적이기는 해도, 그 사람에 대해일종의 적의를 품게 되는 것이다. 큰스님이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도 어쩐지 불쾌한 기분을 느꼈던 이유는, 이케노오 승속들의 태도에서 바로 그런 방관자의 이기주의를 자기도 모르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P16

오위는 마죽을 먹고 있는 여우를 바라보면서 이곳에 오기전의 자신을 그립게 마음속에서 되새겼다. 그것은 많은 사무라이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교토의 꼬맹이들에게서조차 "뭐야, 이 딸기코 녀석이." 하는 소리를 듣던 자신이었다. 색 바랜 스이칸에 사시누키를 입고 주인 없는 삽살개처럼 스자쿠 대로를 어슬렁거리는 가엾고도 고독한 자신.
하지만 동시에 또한, 마죽을 실컷 먹고 싶다는 욕망을 오로지혼자서 소중히 간직하고 있기도 했던, 행복한 자신이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마죽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과 함께,
만면의 땀이 점차 코끝에서부터 말라 가는 것을 느꼈다. 맑기는 하지만 쓰루가의 아침은 몸에 스며들 듯이 바람이 찼다. 오위는 얼른 코를 쥐면서 동시에 은 냄비를 향해 커다랗게 재채기를 했다.
- P45

숨 막히는 침묵이 이어진 후, 이렇게 불렀을 때도 도시코는여전히, 남편에게서 안색 나쁜 얼굴을 돌린 채였다.
"여보."
"내가… 내가 나쁜 걸까요? 그 아기 죽은 것이 ……"
도시코는 갑자기 남편의 얼굴을, 묘하게 열에 들뜬 눈길로쏘아보았다.
"죽은 것이 기뻐요. 안됐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래도나는 기쁘다고요. 기뻐해서는 안 되는 걸까요? 여보."
도시코의 목소리에는 지금까지 없었던 격렬한 힘이 담겨있었다. 사내는 와이셔츠 어깨와 조끼를, 이제는 가득 비치기시작한 눈부신 햇살로 도금하면서 그 물음에 대해서는 아무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앞을 턱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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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1-22 2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보니, 예전 기억이 나네요. 라쇼몽 영화가 유명해서 읽었는데, 그 이야기가 조금 다른거예요. 나중에 들으니, 덤불속, 과 라쇼몽이 들어간 거라고 하더라구요. 일본 괴담은 재미있는 책이 많은데, 이 책은 작가가 유명해서 그런지, 나중에 다시 한 번 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페넬로페님, 좋은 주말 보내시고, 기분 좋은 밤 되세요.^^

페넬로페 2022-01-24 14:59   좋아요 0 | URL
아, 라쇼몬이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검색해봤는데 감독이 유명한 구로자와 아키라더라고요. 베니스 영화제와 아카데미에서도 상을 받았다는데 아주 오래전 영화라 감상은 어떨지 모르겠어요.
소설 라쇼문은 좋았어요. 생각 할 것도 많았고요^^

페넬로페 2022-01-24 15:05   좋아요 1 | URL
네, 좋은 영화라 보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서니데이 2022-01-24 15:00   좋아요 1 | URL
그 영화 오래된 영화지만 유명한 영화예요. 찾아보시면 흑백화면으로 있을거예요.

서니데이 2022-01-26 1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날씨가 춥지는 않은데, 오미크론 확진자가 많아서 걱정입니다.
마스크 잘 쓰시고, 건강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2-01-26 23:10   좋아요 1 | URL
설마했는데 만명이 넘었어요, ㅠㅠ
걱정만 늘어나는 요즘이예요^^
서니데이님께서도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래요^^

han22598 2022-01-28 03: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인용글이 인상깊네요. 심연의 인간의 내면을 끄집어 내어버린 느낌이에요.
책제목이랑 작가는 처음 들어보지만 바로 장바구니에 담아 두었어요. 아 기대된다!

페넬로페 2022-01-28 16:11   좋아요 1 | URL
일본 근대작가의 대표주자이고 일본에서 이 작가의 이름을 따서 아쿠타가와 문학상을 만들었다고 해요^^
헤이안시대를 배경으로 한 단편도 많은데 뭔가 기괴하면서도 인간 심리와 욕망을 잘 파헤친 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22-01-28 14: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마음에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감정이 있다.- 어디서 많이 본 문구예요.ㅋ
류노스케의 ‘코‘라는 소설에 있는 것이죠?

페넬로페 2022-01-28 16:14   좋아요 2 | URL
네, 첫 구절은 아쿠타가와의 ‘코‘에 있는 구절이예요.
시대와 배경이 생소한 것들이 많은데 작품이 인상적이예요^^

서니데이 2022-01-28 1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오늘부터 설연휴 시작입니다. 즐거운 주말과 명절 연휴 보내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페넬로페 2022-01-28 22:24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언제나 항상 감사드려요.
매번 덕담해주셔서 복을 많이 받을것 같아요^^
서니데이님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