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대장 존 비룡소의 그림동화 6
존 버닝햄 지음, 박상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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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그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이호백 글 그림을 산 후 얼마나 그 책을 펼쳐볼 때마다 토끼를 손으로 만져보고 그 부드러움이 느껴질 것 같은 착각에 누가보면 이상한(?)행동을 했는 지 지금도 웃음이 난다. 그 만큼 그림이 주는 부드러움과 행복감이 컸다.

그런데 지각대장 존을 읽고서, 아니 보고서 5분도 안 되어 책 상 위에서 무엇인가 열심히 노트에 적고 있던 동생에게 달려갔다. 방해를 하는 것은 무척 미안했지만 나보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유연한 사고를 하는 동생이 뭐라고 할지가 궁금해서 이 책 한 번 읽어보라고 던져 주고 나왔다. 다시 동생의 방 문을 열었을 때 동생은 “뭐, 간단하네! 남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사람은 결국에는 자신의 진실된 말도 남이 믿어주지 않는다잖아!”  

 

 

정말 그런 것일까 해서 이 번에는 어머니를 찾아 방 문을 열어보니 어머니께서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를 듣고 계셨다. “어머니, 이 그림책 한 번 보실래요? 참 이상해요, 어머니께서 다 읽으신 다음 소감 좀 말씀해 주세요.” 어머니께서는 돋보기를 찾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 때문이었을까 아님, 책 표지가 맘에 드셨을까 그 자리에서 커다란 그림책의 하드보드커버를 넘기기 시작하셨다.  

 

 

그런데 어머니의 반응은 책의 첫 장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주인공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가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 길을 표현한 그림을 두고서 평범한 길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찻잔의 일부 같다고 하시는가 하면 초록색 악어가 가방을 물고 늘어지는 그림에서는 “이렇게 큰 도마뱀이 있니?” 라며 아이들 같은 호기심을 나타내시기도 했다. 정말 그렇고 보니 그렇게 밝은 초록색 악어는 여태까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악어라기보다는 동남아시아 여행을 갔을 때 본 재빠르고 귀여운 도마뱀에 가까웠다.  

 

 

나는 너무나 빠르게 책의 주제를 찾아낸 동생보다는 정형화된 틀에 갇히지 않고 엉뚱한 생각을 많이 하며 오솔길을 찻잔의 테두리로, 악어를 도마뱀으로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를 야단치는 선생을 괴물로 보는 어머니와 함께 그림책을 한 장 한 장 같이 보며 이야기하는 쪽이 훨씬 재미있었다. 특히 사자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두 장에 걸쳐 크게 그려진 사자의 표정을 보시더니 ' 친절한 사자'라는 별명까지 붙여주셨다. 

믿음이 없는 시대를 산다는 것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특히 실제로 의심의 장벽에 가로막혀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른의 경우는 무슨 이유에서 그런지는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무조건 믿지않는다' 라고 일부러 믿지 않는 척 한다.   

 

이 불신이야말로 어린 아이이건 어른이건 그 자존감에 심각한 상처를 주는 '폭력'임을 인식하지 못한 채 재미로, 군림하기 위해 불신을 한다. 마지막에 선생의 이빨이 더욱 사납고 무섭게 그려져 있고 그 검은 몸뚱이는 더욱 부풀어 오른 모습에서 '마귀'라고 별명을 지으신 어머니께서는 일부러 알면서도 어린 시절 나의 거짓말에도 속아주실 만큼 너그러우셨다. 지금 그 어머니의 나이가 된 나는 과연 속아주면서도 아이의 말을 믿어주는 성숙함이 있는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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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안 걸리고 사는 법 - 미러클 엔자임이 수명을 결정한다
신야 히로미 지음, 이근아 옮김 / 이아소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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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여러 가지 병을 앓아 참 많이도 아팠다. 부모님 속도 많이 긁어드렸고 하고 싶은 일도 지장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건강하게 살게 해 주세요하는 기도보다는 '제발 아프지만 말고 살게 해주세요'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기도를 하며 살아왔다. 그래서일까? 만약 책 제목이 건강하게 장수하는 법이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병 안 걸리고 사는 법' 이라니 얼마나 나와 같은 사람을 위한 책이란 말인가!   

 

장상(腸狀)이란 용어는 태어나서 처음 이 신야박사에게 처음 배웠다. 환자가 내원하면 우선 얼굴의 모양처럼 장의 모양부터 살핀다는 그 이상한(?)습관으로 30만명이나 되는 놀라운 사람들의 장의 모양을 보고 연구를 했다는 점이 무척 신기하다.  1934 년 생이면 칠순이 훨씬 넘은 나이인데도 19살 때 이후론 지금까지 병에 걸린 적이 없다는 이 확인할 수 없는 자랑에 무엇보다도 솔깃했다. 

 

내가 앓아 본 병 중에는 어찌나 고통이 심하던지 죽어서 이 고통을 면할 수만 있다면 그것도 족하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만큼 형언할 수 없는 통증을 동반한 병도 있다. 그런 면에서 의사라고 해서 병에 걸리지 않았던 것은 아닐텐데 참 부럽고 다시 생각해도 부러운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박사 자신의 이름을 따서 붙인 '신야건강법'을 다이어리와 두꺼운 종이에 각각 메모해서  하나는 휴대하고 다니고 하나는 집에 붙여 놓고 지나갈 때 마다 머리에 새기고 있다. 습관이 붙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에 자꾸만 반복하고 눈으로 익숙해지는 것이 첫 째라는 생각에서 이다. 

 

신야건강법의 기본은-

체내에서 엔자임을 증가시키는 식생활을 하고 동시에 

 체내의 엔자임을 소비하는 생활습관을 개선하자! 

 엔자임이란 생물의 세포 내에서 만들어지는 단백질성 촉배의 총칭을 일컫는다.

 

[신야건강법] 

1. 식물식과 동물식의 균형을 85: 15 로 맞춘다. 

2.전체적으로 곡물( 잡곡 콩류 포함)해서 50% 채소나 과일 35-40%, 동물식은 10-15% 로 한다. 

3.곡물은 정제하지 않은 것을 먹는다. 

4.동물식은 사람보다 체온이 낮은 것을 섭취한다.(예-생선류) 

5.정제하지 않은 식품은 자연상태 그대로 먹는다 

6.우유, 유제품은 되도록 먹지 말자. 

7.마가린, 튀김류를 삼가라. 

8.꼭꼭 씹어 먹고 소식하라. 

 

어찌보면 어릴 때부터 어머니께 들은 잔소리와 같은 구절도 포함되어 있지만 내 눈에 새롭게 띄인 것은 6번-우유, 유제품을 되도록 먹지 말자 였다. 우유를 좋아해서 여름에도 탄산음료 대신 우유를 섞은 음료를 자주 마시는 습관이 있는데 신야박사가 주장한대로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우유는 소의 젖을 가공할 때 벌써 산화되기 시작해서 실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송아지에서 어미소의 젖 대신 시판우유를 먹였더니 4-5일 만에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는 우유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4개월은 이 건강식을 꾸준히 해야 몸에 습관이 밴다는 그의 말처럼 현재 부단히 노력 중이다. 하지만 저녁을 6시 전에 끝내는 그는 아무래도 '귀족층'인것 같다. 저녁 식사 후 5시간 후에 잠에 들라는 그의 충고는 지키지 못하는 날이 훨씬 많다.   

또, '나는 농약에 오염된 농작물을 먹을 바에야 차라리 유전자변형 농작물을 먹는 편이 훨씬 안전하다'라는 소신을 밝힌 그 이야기에 농약에 대해 전혀 의식 못하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심각할 것이라는 것도 미처 몰랐었다.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재배할 수 있는 식물에 대해 여기저기 알아 봐야 겠단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어떤 약품이나 수술을 통해서 건강을 회복하라고 하지 않고 좋은 식사와 생활습관으로 미연에 병을 예방하라는 신야박사의 충고는 가장 믿음이 가고 실제적이라 계속 하게 되는 것 같다.  이 책의 후편 격인 <병 안 걸리고 사는 법 2> 가까운 시일 내에 꼭 읽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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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삶을 만나다
강신주 지음 / 이학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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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내가 처해 있는 부조리하고 탁한 세상에 어느 한 점을 밝고 산뜻하게 지나게 해 주는 지혜가 있을까라는 기대감으로 책을 펼쳤다. 그런데 프롤로그에 나와 있는 저자의 수업시간에 대한 풍경이 그만 나를 ‘헌법’ 을 처음 배우던 시절로 돌려 놓았다.


헌법을 가르치러 들어 온 교수는 매우 젊고 180cm가 넘는 장신에, 근육질 몸매를 갖춘 남성적인 교수였다. 자신 스스로 절대 법대에 어울리지 않는 육중한 자신의 외모 덕분에 선배들에게 체육과로 전과해 보라는 농담을 수시로 들어야 했었노라 라고 너털웃음을 웃으며 털어놓을 정도였다.


그 교수는 단순히 법학전공서적만 섭렵한 고지식하고 순응적인 타 교수들과 좀 달라보였다. 많은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어서 그런지 아님, 천재적인 두뇌를 받았는지 사고가 매우 유연하면서도 날카롭게 서 있어서 조직의 리더와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런 교수의 입에서 나오는 사회비판적인 말은 절대 직선적이거나 지루한 설명이 없었다. 단지 매우 높은 수준의 심플하고 정곡을 찌르는 ‘유머‘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많은 학생들 가운데 그 교수의 유머에 신나게 웃는 이는 나 외엔 없었다. 서로 눈이 마주치면 통하는 존경의 마음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나는 이 책을 열자마자 혼자서 헤쳐나가야하는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헨젤이나 그레텔이 아니라 예전의 그 시원스럽게 뛰어나게 명철한 교수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 때도 알았더라면…….’ 이 짧은 한 문장이 철학과 삶의 관계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것이다. 철학이란 헌법과 마찬가지로 ‘뜬 구름 잡는 소리’란 선입견이 있었다. 왜냐하면 너무나 이상적이니 당연히 현실을 무시하거나 얕잡아보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어서이다.


그런 내가 살아가면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철학’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목표가 있는 길을 가면서도 중간 중간 도대체 이렇게 무질서하고 끊임없이 서로를 배반할 생각에 아무런 부끄러움도 돌이킴도 없이 그저 센 자에게 붙어서 사다리나 타고 올라가려는 사람들과 무의미한 논쟁을 일삼는 내 자신이 못 견디게 한심하다 못해 가여워서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을 발견하고서는 바로 이거다라는 한 차원 높은 사고의 경지를 올려다 본 느낌이 들었다.




모든 논증의 출발점은 우리와 논쟁하고 있는 사람이 ‘어떤 것은 존재한다’거나 혹은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들 가운데 하나 만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요구가 아니다. 오히려 모든 논증의 출발점은 그가 그 자신이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의미있는’ 무엇인가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요구이다. <형이상학> Metaphysica

 



지금까지 나는 진실을 보고서도 개인적 이득에 눈이 멀어 못 본 척하는 자들을 상대로 내가 목격한 진실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반복해서 주장하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나의 반듯하고 고상한 태도에 조금도 부끄러움 없이 태연자약하게 자신들의 거짓을 더 공격적으로 사실화시키느라 끊임없이 노력 중이다.


‘왜 진실이 거짓을 이길 수 없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내가 철학을 만나고 싶은 진짜 이유였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논증의 출발점을 진위(眞僞)를 가리고 어떻게 하면 그 진(眞)을 강하게 뒷받침할까에 두지 않고 자신이나 타인에게 ‘의미 있는’ 무엇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구태여 논쟁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도 들리는 이 대단한 현학자의 말이 따갑게 내 가슴에 꽂힌다. 


게다가 내가 지금도 사랑하는(대학시절 A+ 학점을 안겨 준 ) 논리학에 대한 언급까지 있으니 나에게는 이 억울하며 정의롭지 않은 세상에서 버틸 수 있는 튼튼한 ‘동아줄’을 잡은 심정이다.  


논리학(logic)은 철학의 정수이다. 철학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특정한 공동체가 공유한 통념을 넘어설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니체- 반시대적 고찰
시대에 내재하는 불만을 간파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사람이 바로 철학자이다. 니체는 참된 철학자를 반시대적이라고 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이 시대에 반하는, 도래할 시대를 위한 철학이다.’< 차이와 반복>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니체의 말대로라면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라고 인생 편안하게 사는 길을 놔두고 사서 고생한다는 소리 들어가며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구태여 목소리 높이는 나 같은 사람이 반골기질(反骨氣質)이 있어서가 아니라 철학자로서의 기질이 있어서란 말인가! 그렇다면 제대로 사고할 줄 알고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는 나와 같은 사람에겐 왜 현실에서 함께 할 동지를 만나는 축복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일까? 모두 다 알면서도 혹여라도 제게 불똥이 튈까봐 입을 꽉 닫고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이 현실의 장벽은 역시나 박정희의 독재정권 시절에 탄생한 스톡홀름증후군 (Stockholm Syndrome)덕분이란 말인가!




나는 한국 내에서 정의와 이성을 외면한 채 학자, 목사, 소시민 할 것 없이 오로지 ‘누가 더 세냐! 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약자 위에 잔인하게 군림하는 강한 자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을 용서하기가 어렵다. 비굴하게 정의를 외면한 채 처자식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며 시키는 대로 자신의 이웃을 함께 모함하며 저희들만의 살 길을 도모하는 그들에게 동물세계의 본능만 살아 있을 뿐이지 결코 육과 영과 혼의 결합체인 고귀한 ’인간‘이라는 명칭을 쓸 수가 없다.

철학(philosophy)= 사랑(philos)+지혜(sophos)의 합성어이다. 즉 철학이란 다시 말해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참 아름다운 정의이다. 지혜에 대한 사랑, 인간이란 이름으로 하늘을 우러르며  살아가면서 모든 인간들이 본시 이 하늘의 지혜를 담고 세상에 내려왔을 텐데 어찌하여 고작 십 년도 채 살지 않은 어린아이들에게서 조차 이런 아름다운 지혜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는 것일까!


문득 저자가 예로 든 카프카의 <변신>을 처음부터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가족이기주의에 매달려 자신의 가족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가족에게 해가 되는 그 어떠한 행위도 정당화될 수 있는 전 세계적인 병폐의 진원지인 가정을 소름끼치는 상상력을 발휘해 해체시키고 전혀 다른 변형체로 탄생시킨 그 문제의 소설을 통해 이 사회를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기를 희망하기에.


우리 사회는 그 방향은 알 수 없지만 계속해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2005년 3월 2일엔 드디어 호주제가 철폐가 되어 남성에게 종속된 여성의 위상이 바로 잡힐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고 2008년 12월 29일 현재, 젊은이들은 기업에게 높은 몸값으로 팔리기 위해 비싼 경비를 마다하지 않고 해외어학 연수와 각종 자격증 취득은 물론 심지어 취업을 위해서라면 성형까지도 감수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철학을 배우려는 이유는 삶이 어려워서이다. 또, 그 어려운 삶을 마구잡이로 남들이 가는 방향대로 무턱대고 따라가지 않고 어렵지만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쉽고 넓은 길로 가고 싶은 마음을 접고 좁고 험한 진리로 가는 길을 선택하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진정한 ‘사람’으로서 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삼단논법에 의해서 논리적으로 참과 거짓을 딱딱 떨어지게 구분해 내는 논리학은 적어도 내게 모호함의 고통에서 해방시켜주었다. 그런데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논리학은 수학적인 논리적 사고력 이상을 요하는 것이었다. 즉, 내가 살고 있는 이대로의 사회적 가치기준으로서 결론을 도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가 가고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선되는 미래의 사회를 기준으로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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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시현맘 2009-02-17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동감합니다. 각 단락마다 저에게는 깨달음을 갖게 했습니다.
본문중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을 저도 읽고 싶은데,
어떤 책인지 궁금합니다.
빠른 댓글 부탁합니다.


queen 2009-02-17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에 대해 알고 싶다고요?
제가 읽은 <철학 삶을 만나다>의 본문에 삼단논법의 허구와 함께
예를 들어서 설명이 잘 되어 있습니다. 저는 논리학을 좋아하고 공부한 경험이 있어서
좀 빠르게 이해한 것 같긴 한데 님께서도 삼단논법의 모순을 지적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을 알고 싶으시다면 논리학쪽 책을 선택하시는 것을 적극 추천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더 내려놓음 -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은혜 이용규 저서 시리즈
이용규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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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규- 

그는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도미 유학, 하버드대학교에서 '중동지역학 및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자마자 안락한 미래의 보장과 인간의 기대를 전부 내려놓고 척박한 땅인 몰골 선교사로 헌신하여 '이레교회'의 담임사역자로 몽골인들을 섬겼다. 그는 현재 몽골의 크리스천 대학인 '몽골국제대학교'의 부총장으로 봉직하고 있다.   

   

책을 펼치자마자 뒷 날개의 저자의 사진을 보며 젊고 맑은 인상에 요즘 한국 내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깨끗한 인상이라 선뜻 책을 구입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저자에 대한 소개를 자세히 보니 괜한 짓을 했다 싶게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졌다.이유는 경상북도 포항에 있는 한 신설대학의 총장을 소개할 때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역시 푸근한 인상에 백발의 머리가 교계 내에서는 트레이드마크가 되다시피 한 인물인데 그를 소개하는 멘트는 앉아서 그에게 박수를 치는 청중들을 몹시도 불쾌하게 만들었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 nasa(미 항공우주국)에서 연구원으로 안락하고 보장된 과학자로서의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척박하고 외진 포항에 와서 총장이 되어 봉사하고 있다.'   

 

모두들 예수그리스도처럼 '하늘 보좌 버리고 이 낮고 천한 땅에 오신 귀하신 분들'이란 이야기는  결코 겸손과 섬김을 가장 기본으로 하는 성경적 태도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기독교인들이 내는 책 들 가운데는 그가 걸어 온 삶 속에서 만난 하나님의 은혜나 사랑, 역경 속에서도 결코 버릴 수 없었던 믿음에 대한 기록보다는 이 줄세우기 왕국에서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엘리트인가, 남들보다 학력이 높은가, 집안과 배경은 얼마나 좋은 지를 앞 서 자랑하기에 급급한 것이 안타깝다. 물론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예수를 통해 이 세상에서 잘 살아보려는 '욕심' 많은 교인들에게 설득력있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에서 이런 저자에 대한 설명이 보편화 된 것 같은데 이런 점은 기독교를 더욱 세속적이고 출세지향적으로  '타락'시키는 것임을 이제라도 알고 바로 잡았으면 한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유명한 비유- 일명 탕자의 비유를  재해석했는데 주일날 듣는 설교로도 다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과 가려움을 정확하게 짚어 준 것 같다. 큰 찔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애(愛)와 자기의(義)로 대표되는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의 모습을 영적인 통찰력으로 실제 자신이 몽골국제대학에 몸 담으면서 겪은 부정적이며 드러내기 창피한 일화를 예로 들면서까지 이 문제로 고민을 하는 이들을 위해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특히 자기애(愛)의 문제를 다룰 때 디스커버리채널에서 본 '황제펭귄'의 이야기는 내 마음을 울렸다. 

 

 왜냐하면 나 역시 몇 달 전 동물의 왕국을 가족과 함께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저자가 말한 바로  그 프로그램을 보았다. 겨우 바다표범의 사나운 입에서 구사일생으로 육지로 돌아 온 펭귄은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절뚝절뚝거리며 균형을 잃고 한 참을 걸어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런데 곧 화면에 비친 것은 그 새하얀 펭귄의 가슴에 너무나 선명하고 섬뜩한 붉은 피가 온 가슴과 배까지 적시고 있는 참담한 장면이었다. 바로 거기서 숨 죽이며 펭귄의 무사귀환을 소망하시던  어머니께서는 차마 더 못 보겠다며 방으로 들어가셔서 자리에 누워버리셨다.  

  

나는 계속 앉아서 그 불쌍한 펭귄의 결말을 보고 있었다. 피 흘리는 펭귄은 동료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 펭귄 주변으로는 계속 부리가 날카로운 갈매기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보아 펭귄을 쪼아  그나마 있는 힘을 빼고 있었음에도 건강한 펭귄들은 단 한마리도 그 펭귄을 죽도로 방치하고 있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이 잔인한 장면을 그저 카메라에 담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닥 안 하고 있는 인간의 잔임함에 ,너무나 닮은  인간 세상의 비정함을 느끼며 어느새 나는슬픔을 넘어 분노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려 곧 죽을 펭귄이 간 곳이 바로 자기의 새끼가 있는 곳이었다.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부르고 또 부르고 해서 마침내 어미가 새끼를 부르는 그 소리를 듣고 서로 상봉하는 장면에서 나는 눈을 감고 말았다. 언제 고였는지 뜨거운 눈물이 흘러서 앞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께서 이 장면을 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신 것은 어쩌면 어머니는 어머니로 살아오시면서  이 펭귄 같은 마음을 많이 느끼셔서가 아니었을까!  제 목숨보다 제 고통보다 마직막까지 새끼를 보호하고 그 입에 마지막 먹이를 넣어주는 그 모성애를 보며 어쩌면 인간도 아닌 동물에게 저런 깊은 사랑이 있을까라고 마음이 시원해질때까지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둘째아들이 이런 아버지를 버리고 떠난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과 달리 자식은 부모의 통제가 없는 세상에 대한 동경이 훨씬 강함을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자기애를 내려 놓으라는 것은 절대 '고통의 멍에'가 아니라 좀 더 쉽게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내게 있어서 사실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의(義)였다. 워낙 논리적인 학문을 오랫동안 하다보니 어느새 설명이 불충분하다거나 부정확한 말에 대해, 그리고 참과 거짓(眞僞)을 판단하는 데에 '도사'가 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가족들 간에도 나로 인해 불편함을 많이 주었고 심하게 다툼이 일어난 후엔 좀처럼 마음을 다시 열고 대화하기에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지만 참 아팠다. 가장 가까운 사람마저도 나를 비난하는 것 같아 참담했다.  

  

옳은 것을 옳다하는 나의 태도가 잘못되었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서 옳지 않은 자들과 소모적인 논쟁을 자주 벌였고 예리한 말로 그들의 잘못된 태도를 지적해 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오히려 인신공격과 언어폭력이었다. 무엇이 잘못 되었단 말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서 하나님의 자리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판단자=재판장의 위치에서 주변사람들의 잘잘못을 명확하게 가리고 있는 나를 보게 되었다. 분명히 내가 옳아도 사람들은 그들의 잘못을 고치지도 않았고 오히려 아픈 곳을 들킨 수치심에 나를 공격하고 무리를 지어 괴롭히기까지 했다.  

 

자아의 짐을 내려 놓으라는 그의 말은 상당히 아프면서도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그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까! 내려놓으라는 의미가 '포기'나 '방관'하라는 뜻이 아니라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맡기고 내 마음을 통째로 그 분께 드리라는 의미라는 것을 반복해서 일깨워 주고 있다. 이렇게 이성과 자아가 시퍼렇게 살아 독야청청한 내가 내려놓을 자아의 짐은 얼마나 될까!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 내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오시기를 그래서 간절히 기다린다. '주님, 제 안에 오셔서 저를 다스려 주시고 참 인간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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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기도 - 우리가 잃어버린 하늘 권능을 되찾는 기도
손기철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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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주일학교에서 받은, 사무엘이 두 손을 예쁘게 모으고 그 초롱초롱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그림을 빼앗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초등학교시절부터 지금까지도 기도에 대해서는 평생 해도 더 알기 어렵고 신비해서 피조물인 인간이 하는 말은 그다지 미덥지 않았다. 그래도 기도에 대한 책들은 꾸준히 <5만번 응답받은 조지뮬러의 기도비밀> <아내의 기도로 남편을 돕는다> <중보기도><4차원의 영적세계>  등 지금까지 수 십 권이 넘는 기도에 관한 크고 작은 책들을 읽어 왔다.

 

하지만 동생이 교회에서 받은 상을 강제로 빼앗아 내 것으로 간직하는 이런 모순된 인간성은 아직도 기도를 통해 그리 크게 변화된 것 같지 않다. 내가 기도를 하는 이유는 소원을 빌기 위해, 죄 사함을 받기 위해, 혹은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이루어지길 소망하기 때문에 하기도 하지만 더 주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시간을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입장에서는 어린아이가 장에 갔다 오시는 어머니 손에 맛있는 과자 한 봉지가 먹고 싶어서 어머니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냥 딸의 이름을 사랑스럽게 부르시는 어머니 곁에서 그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좋고 편안해서 붙어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기도가 피조물이 일방적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향해서 더 강하고 높이 활을 쏘듯 쏘아 올리기 위해 안간 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성 앞에 서서 내 힘으로는 어림도 없지만 내가 왔으니까 그 닫혀 있는 성문을 열어달라고 아버지를 부르는 것과 같다. 기도를 시작한 처음엔 내 이야기를 훨씬 더 많이 했다. 하지만 이 <왕의 기도>의 손기철장로가 경험한 것과 비슷한 일들, 내 의식이 만들어낸 문장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말들이 내 입에서 술술 나오는 신비한 일을 경험한 후로는 훨씬 더 듣는 시간이 많아진 것 같다.

 

 

손기철장로는 치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나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지만 그를 만나고 오신 어머니에 의한다면 확신에 가득 찬 사람이며 매우 매너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지 않은 사람을 치료해주겠다며 억지로 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을 통해서도 그가 사람들을 어떤 심정으로 치료하는지, 아니 하나님께 병인들의 나음을 위해 어떤 심정으로 구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약 5:15) 그는 하나님께서 고치시리라는 믿음을 갖고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도 책에 설명한 것보다 훨씬 더 깊고 크게 알고 있음을 느꼈다. 사실, 책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설명이 다소 모호하면서 추상적인 것이라 저자와 비슷한 경험을 직접 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긴, 어떻게 형이상학적 기도에 대해서 똑 부러지게 벽걸이 TV 매뉴얼 식으로 설명이 가능하겠는가! 하지만 좀 더 구체적인 표현을 통해서 기도에 대해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왕의 기도는 종전의 ‘주시옵소서, 도와주시옵소서’ 신하가 왕에게 간청하는 식의 기도와 달리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역시 그 왕권을 가지고 세상을 쥐고 흔드는 악의 세력에게 명령하는 기도라는 점에서 매우 특별하며 용기 있는 결단이다. 병마와 싸우고 있을 때에도 ‘고쳐주시옵소서’란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지만 ‘나를 약하게 만들고 상하게 만드는 이 악한 세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라고 명령하는 것은 자연적인 질병이 아닌 악의 대장인 마귀에게 행하는 것이란 점에서 분명히 그 차이가 있다. 대개는 신자들이 병에 걸렸을 때 일차적으로 병원에 갔다가 그것도 별 효력이 없으면 다음으로 목사에게 가서 기도를 받기 원한다. 그런데 왕의 기도는 목사만 할 수 있거나 치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만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도이다.

 

다만 어려운 점은, 실제로 보이지도 않고 의식도 되지 않는 허공에 뜬 착각같은 악의 세력이 어디에 있는 줄 알고 ‘나가라! 물러가라!’ 라는 식의 민망하고 쑥스러운 명령을 하냐는 것이다. 더군다나 혼자서 기도할 때가 아니라 여럿이서 기도한다면 감히 입 밖으로 소리도 못 낼 신자가 태반일 것이다.

그런데 책에 손기철장로는 반드시 소리를 내어 외치라고 썼다. 이유가 무엇일까? 속으로 대적기도를 해도 마귀는 떠나가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능력에 반도 의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그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갈보리산에서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사건을 기억하신다. 예수그리스도의 핏 값으로 구원에 이른 우리가 그 이름으로 기도할 때 우리의 정성이 하늘에 닿아서가 아니라 그 아들의 이름 때문에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마찬가지로 마귀 역시 그 십자가사건의 패배를 기억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앞에 무릎을 끓는 것이지 우리의 믿음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사실, 많은 기도를 주제로 한 간증집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순복음교회 조용기목사의 <4차원의 영적세계>인데 주로 응답받은 각 사례별로 되어 있어서 읽기도 쉽고 재미와 흥미까지 굉장한 책이다. 그에 반해 이 <왕의 기도>는 사례도 들어 있지만 인간의 입으로 기도를 설명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그래서 좀처럼 쉽지 않고 오히려 응답의 비결을 알려주겠다는 것인지 아닌지가 애매하게 들린다. 문제와 병에 대해 자신이 원하는 방법을 하나님으로 부터 이끌어 내겠다는 사람에겐 이 책을 권하고 싶지 않다, 대신 하나님이 누구시고 왜 기도에 응답하시는 지, 그리고 에수 그리스도가 다만 2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일만 하신 분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우리의 기도에 어떻게 역사하고 계신지, 그 기도시간을 통해 교회에서도 알려주지 않은 깊고 놀라운 내가 느끼는 은혜를 체험하고 싶은 이에게 꼭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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