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삶을 만나다
강신주 지음 / 이학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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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내가 처해 있는 부조리하고 탁한 세상에 어느 한 점을 밝고 산뜻하게 지나게 해 주는 지혜가 있을까라는 기대감으로 책을 펼쳤다. 그런데 프롤로그에 나와 있는 저자의 수업시간에 대한 풍경이 그만 나를 ‘헌법’ 을 처음 배우던 시절로 돌려 놓았다.


헌법을 가르치러 들어 온 교수는 매우 젊고 180cm가 넘는 장신에, 근육질 몸매를 갖춘 남성적인 교수였다. 자신 스스로 절대 법대에 어울리지 않는 육중한 자신의 외모 덕분에 선배들에게 체육과로 전과해 보라는 농담을 수시로 들어야 했었노라 라고 너털웃음을 웃으며 털어놓을 정도였다.


그 교수는 단순히 법학전공서적만 섭렵한 고지식하고 순응적인 타 교수들과 좀 달라보였다. 많은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어서 그런지 아님, 천재적인 두뇌를 받았는지 사고가 매우 유연하면서도 날카롭게 서 있어서 조직의 리더와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런 교수의 입에서 나오는 사회비판적인 말은 절대 직선적이거나 지루한 설명이 없었다. 단지 매우 높은 수준의 심플하고 정곡을 찌르는 ‘유머‘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많은 학생들 가운데 그 교수의 유머에 신나게 웃는 이는 나 외엔 없었다. 서로 눈이 마주치면 통하는 존경의 마음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나는 이 책을 열자마자 혼자서 헤쳐나가야하는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헨젤이나 그레텔이 아니라 예전의 그 시원스럽게 뛰어나게 명철한 교수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 때도 알았더라면…….’ 이 짧은 한 문장이 철학과 삶의 관계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것이다. 철학이란 헌법과 마찬가지로 ‘뜬 구름 잡는 소리’란 선입견이 있었다. 왜냐하면 너무나 이상적이니 당연히 현실을 무시하거나 얕잡아보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어서이다.


그런 내가 살아가면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철학’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목표가 있는 길을 가면서도 중간 중간 도대체 이렇게 무질서하고 끊임없이 서로를 배반할 생각에 아무런 부끄러움도 돌이킴도 없이 그저 센 자에게 붙어서 사다리나 타고 올라가려는 사람들과 무의미한 논쟁을 일삼는 내 자신이 못 견디게 한심하다 못해 가여워서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을 발견하고서는 바로 이거다라는 한 차원 높은 사고의 경지를 올려다 본 느낌이 들었다.




모든 논증의 출발점은 우리와 논쟁하고 있는 사람이 ‘어떤 것은 존재한다’거나 혹은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들 가운데 하나 만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요구가 아니다. 오히려 모든 논증의 출발점은 그가 그 자신이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의미있는’ 무엇인가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요구이다. <형이상학> Metaphysica

 



지금까지 나는 진실을 보고서도 개인적 이득에 눈이 멀어 못 본 척하는 자들을 상대로 내가 목격한 진실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반복해서 주장하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나의 반듯하고 고상한 태도에 조금도 부끄러움 없이 태연자약하게 자신들의 거짓을 더 공격적으로 사실화시키느라 끊임없이 노력 중이다.


‘왜 진실이 거짓을 이길 수 없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내가 철학을 만나고 싶은 진짜 이유였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논증의 출발점을 진위(眞僞)를 가리고 어떻게 하면 그 진(眞)을 강하게 뒷받침할까에 두지 않고 자신이나 타인에게 ‘의미 있는’ 무엇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구태여 논쟁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도 들리는 이 대단한 현학자의 말이 따갑게 내 가슴에 꽂힌다. 


게다가 내가 지금도 사랑하는(대학시절 A+ 학점을 안겨 준 ) 논리학에 대한 언급까지 있으니 나에게는 이 억울하며 정의롭지 않은 세상에서 버틸 수 있는 튼튼한 ‘동아줄’을 잡은 심정이다.  


논리학(logic)은 철학의 정수이다. 철학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특정한 공동체가 공유한 통념을 넘어설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니체- 반시대적 고찰
시대에 내재하는 불만을 간파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사람이 바로 철학자이다. 니체는 참된 철학자를 반시대적이라고 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이 시대에 반하는, 도래할 시대를 위한 철학이다.’< 차이와 반복>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니체의 말대로라면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라고 인생 편안하게 사는 길을 놔두고 사서 고생한다는 소리 들어가며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구태여 목소리 높이는 나 같은 사람이 반골기질(反骨氣質)이 있어서가 아니라 철학자로서의 기질이 있어서란 말인가! 그렇다면 제대로 사고할 줄 알고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는 나와 같은 사람에겐 왜 현실에서 함께 할 동지를 만나는 축복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일까? 모두 다 알면서도 혹여라도 제게 불똥이 튈까봐 입을 꽉 닫고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이 현실의 장벽은 역시나 박정희의 독재정권 시절에 탄생한 스톡홀름증후군 (Stockholm Syndrome)덕분이란 말인가!




나는 한국 내에서 정의와 이성을 외면한 채 학자, 목사, 소시민 할 것 없이 오로지 ‘누가 더 세냐! 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약자 위에 잔인하게 군림하는 강한 자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을 용서하기가 어렵다. 비굴하게 정의를 외면한 채 처자식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며 시키는 대로 자신의 이웃을 함께 모함하며 저희들만의 살 길을 도모하는 그들에게 동물세계의 본능만 살아 있을 뿐이지 결코 육과 영과 혼의 결합체인 고귀한 ’인간‘이라는 명칭을 쓸 수가 없다.

철학(philosophy)= 사랑(philos)+지혜(sophos)의 합성어이다. 즉 철학이란 다시 말해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참 아름다운 정의이다. 지혜에 대한 사랑, 인간이란 이름으로 하늘을 우러르며  살아가면서 모든 인간들이 본시 이 하늘의 지혜를 담고 세상에 내려왔을 텐데 어찌하여 고작 십 년도 채 살지 않은 어린아이들에게서 조차 이런 아름다운 지혜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는 것일까!


문득 저자가 예로 든 카프카의 <변신>을 처음부터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가족이기주의에 매달려 자신의 가족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가족에게 해가 되는 그 어떠한 행위도 정당화될 수 있는 전 세계적인 병폐의 진원지인 가정을 소름끼치는 상상력을 발휘해 해체시키고 전혀 다른 변형체로 탄생시킨 그 문제의 소설을 통해 이 사회를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기를 희망하기에.


우리 사회는 그 방향은 알 수 없지만 계속해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2005년 3월 2일엔 드디어 호주제가 철폐가 되어 남성에게 종속된 여성의 위상이 바로 잡힐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고 2008년 12월 29일 현재, 젊은이들은 기업에게 높은 몸값으로 팔리기 위해 비싼 경비를 마다하지 않고 해외어학 연수와 각종 자격증 취득은 물론 심지어 취업을 위해서라면 성형까지도 감수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철학을 배우려는 이유는 삶이 어려워서이다. 또, 그 어려운 삶을 마구잡이로 남들이 가는 방향대로 무턱대고 따라가지 않고 어렵지만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쉽고 넓은 길로 가고 싶은 마음을 접고 좁고 험한 진리로 가는 길을 선택하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진정한 ‘사람’으로서 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삼단논법에 의해서 논리적으로 참과 거짓을 딱딱 떨어지게 구분해 내는 논리학은 적어도 내게 모호함의 고통에서 해방시켜주었다. 그런데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논리학은 수학적인 논리적 사고력 이상을 요하는 것이었다. 즉, 내가 살고 있는 이대로의 사회적 가치기준으로서 결론을 도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가 가고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선되는 미래의 사회를 기준으로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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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시현맘 2009-02-17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동감합니다. 각 단락마다 저에게는 깨달음을 갖게 했습니다.
본문중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을 저도 읽고 싶은데,
어떤 책인지 궁금합니다.
빠른 댓글 부탁합니다.


queen 2009-02-17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에 대해 알고 싶다고요?
제가 읽은 <철학 삶을 만나다>의 본문에 삼단논법의 허구와 함께
예를 들어서 설명이 잘 되어 있습니다. 저는 논리학을 좋아하고 공부한 경험이 있어서
좀 빠르게 이해한 것 같긴 한데 님께서도 삼단논법의 모순을 지적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을 알고 싶으시다면 논리학쪽 책을 선택하시는 것을 적극 추천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