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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자서전 동행 - 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
이희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1월
평점 :
1987년 노태우, 김영삼 후보와 함께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김대중후보를 처음 보았다. 어른들은 물론 반 친구들까지도 '빨갱이' 라는 둥 무시무시한 소문과는 달리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김후보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잘 생긴 그냥 남자어른이었다. 그 후로도 김대중대통령에 대해서는 항상 무시무시하거나 위험한 인물이라는 언론의 의도적인 악성보도로 그가 어떤 길을 걸어왔으며 어떤 사상을 갖고 있는지는 대학을 졸업한 후 한 참이 지나서였다.
예전에 이경규가 간다라는 MBC프로그램에 대선후보로 나온 김대중.이희호 두 분의 모습을 본 기억이 생생하다. 이유는 물론 너무나 재미있어서였다. 빨갱이 사상(?)을 지녔다는 분이 경직되거나 선동적인 이미지와 달리 너무나 자연스럽게 웃고 게다가 유머감각이 100년에 한 명이 나올까싶을 정도로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 지금도 우리 가족 모두가 신나게 웃었던 기억이 생생한 것은 바로 이경규씨가 김대중 대통령께 ' 총재님, 이희호여사님의 단점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라며 마이크를 들이대자 마자 김대통령께서는 '아 이사람은 다 좋은데 농담을 못 알아들어요' 라고 씩 웃으며 대답하자 그 말을 듣고 있던 이희호여사가 팔꿈치로 김대중 대통령의 옆구리를 팍 치며 '내가 언제요?'라며 자못 심톰난 표정으로 항의하자 김대중대통령이 '그것 봐요, 내 말이 맞죠?' 라며 말하자 세 사람이 다 함께 신나게 웃음을 터뜨리던 장면이었다.
이 <동행>을 읽기 몇 달 전 한승헌 전 감사원장이 쓴 <역사의 길목에서>란 책을 읽다가 거기에 등장하는 김대중대통령과 이희호여사의 글을 읽게 되었다. 1980년 김대중내란음모죄로 기소되어 사형이 선고되기 전 마지막 김대통령의 증언은 장문이었지만 그 속에 드러난 진심이 너무나 희로애락을 다 갖고 있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어서 그만 목이 메이고 말았다.' 나는 역사의 진실을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함께 수감되어 옥고를 치른 동지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나를 위해 결단코 정치적보복을 하지 마십시오! 정치적보복은 나 한사람으로 끝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라는 말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목사들조차 엄두가 나지 않는 말이다.
그리고 남편의 사형선고가 예상되는 그 법정에 들어가는 것도 허락되지 않아 집에 남아 있던 이희호여사의 불후의 기도문' 천지를 창조하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시여, 악은 그 발등상을 쳐서 힘을 못 쓰게 하소서, 바람에 티끌처럼 날려버리소서!' 그 절절하면서도 명료한 기도문을 나는 다이어리에 써 놓고 내 눈 앞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그 거짓과 모함, 그리고 살인의 강도를 지닌 집단의 횡포를 접할때마다 하나님을 향해 크게 외친다. "바람에 티끌처럼 날려버리소서"
그래서 나는 살아 있는 동안 이 두 분을 꼭 한 번 직접 만나뵙고 싶은 것이다. 한 분은 자신을 두 번이나 죽이려 했던 박정희, 합법적인 살인을 저지르려 했던 전두환을 용서한 놀라운 분이시고 또 한 분은 그 억울함과 가정의 모든 짐을 평생 짊어지고 험한 비탈길을 걸어 올라온 참으로 강하고 지혜로운 분이기 때문이다.
이희호여사는 외모 만큼이나 책에 밝힌 내용이 역사적 사실 그대로, 그리고 전혀 과장이나 아전인수격으로 쓴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오히려 마지막 편에서 두 아들의 구속에 대한 일을 적었을 때는 대충 모호하게 표현하거나 합리화해도 될 만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직선적이고 정직한 목소리를 담았다.
책 사이사이마다 오래 전 개인사진들이 선명하고 그 시절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다양한 김대통령과 이희호여사의 사진들이 많이 들어 있어 보고 또 보고 했다. 특히 집나간 강아지 '똘똘이'를 찾기 위해 국회의사당에서 집까지 한 숨에 달려와서 이희호여사에게 원망을 토로하는 김대통령의 모습에서 저런 면이 있는 분이었나 싶을 만큼 놀랍도록 정이 많고 사랑이 큰 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똘똘이와 앉아서 놀고 있는 김대통령의 사진을 보고 있으려니 이 분이 대통령 안하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이렇게 인생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고 사셨다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인간적인 연민까지 느꼈다.
책을 읽다가 당시 상황을 너무나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기술한 덕분에 객관적인 입장에서 주인공들의 시련을 보고 있으려니 너무나 억울하고 비통한 심정이 되어 여러 번 덮을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한 가정에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었을까?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선한 이웃까지도 모두 왕좌를 넘겨보는 정적으로 몰아 은밀한 곳에서 죽일 생각밖에 안 하는 것일까!' 그리고 삼남인 홍걸씨의 말 '공부는 해서 뭐 하나요?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형들처럼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텐데요.' 실제로 김홍걸씨가 고려대학교 불문학과에 합격했을 때 정치권에서 고대관계자에게 합격을 취소하라는 압력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고대 총장이 이를 거절했다는 대목에서는 의분이 일어났다. 5공 정권이 이 정도로 치사하고 소국적인 정치를 하는 수준일 줄은 몰랐으니까!
<동행>을 읽고 있으면 눈물이 난다. 억울함을 호소하고 원수를 원수처럼 대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팔순이 넘어 남편과 한 몸이 되어 이 민주화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이희호여사의 알 수 없는 깊은 속에 감동이 되어서이다. 미움대신 용서와 이해, 그리고 잘 잘못을 따지기보다는 그 역경 속에서도 구원의 손길을 주신 하나님과 그들을 믿고 지지해 준 많은 국내외 친구들에게 진심어린 감사를 계속해서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김대통령 부부처럼 그런 막강한 권력을 잡았다면 나는 그 원수들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 아님 죄 값을 치루도록 절차를 밟아 '청산'을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도무지 쉽지 않은 일이다. 무엇을 보았기에 그 치졸하고 잔인한 원수들을 놓아보낼 수 있었을까? 정말 꼭 살아계실 때 두 분을 뵙고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다. '어떻게 용서가 가능할 수 있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