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와 신용은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았다. 국가가 의도를 갖고 만든 것이다. 근대 경제학은 이러한 허구 상품이 마치 자연스럽게 발생했기에 화폐를 실제라고 우기는 억측으로 이론을 전개한다.‘ 허구를 믿게 하려면 자연법에 근거한 객관적 실재라고 주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근대 사상에서 자연법 역할은 현존하는 권리를 신성화하고 그것을 전복하려는 시도는 부적절하다고 낙인찍는 데 있다. ’자연법 개념은 어떤 현상이 사실이라고 객관적인 기초를 제공하는 듯 보이게 한다. 자연법 이론 논증은 다음처럼 진행된다. 인간 본성은 어떠어떠한 점이 자연스럽기에 여기서 벗어나면 그릇된 일이라는 보는 것이다.’ 하지만 뭔가가 자연스럽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사실 그 자체일 뿐, 어떤 상황이 바람직한지 결정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 실제로 어떤 상황이 자연스러운지 아닌지가 상황의 당위(當爲)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걸 존재[사실]와 당위[가치나 규범]의 간극이라고 하는데,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처음 거론했다. 어떤 사실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 사실에서 규범적 가치를 추론할 수 없다. ‘흄의 논리는 간단했다. 당위[가치]를 이끌어내려면 또 다른 가치를 투입해야 한다. 당위는 단순한 사실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예컨대 사람을 발로 차면 아프다는 “사실”로부터 정당한 이유 없이 사람을 발로 차면 안 된다는 “당위”를 이끌어내고 싶을 경우, 정당한 이유 없이 고통을 유발하는 것은 나쁘다와 같은 이견(異見)이 있을 수도 있는 또 다른 “가치”를 개입시키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가 논리 대전제에 어떠한 ‘자연 상태’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누군가가 주장하는 이데올로기는 달라진다. ‘이데올로기 개념은 마르크스가 역사적인 사실을 자연스러운 사실로 간주하는 근대 자연법사상을 비판하면서 주목받았다. 사실(事實)은 언제나 사실(史實)의 산물일 뿐이다. 이후 변화한 것을 고정된 것으로, 인위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모든 생각이 이데올로기로 비판받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데올로기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은폐되고 감추어진 것을 들춰 다른 의미를 찾아내면 된다. 다른 의미를 찾는 일이 결국 이데올로기에서 해방되는 과정이다.’ ‘우리는 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주장한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명제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인간에게 부여된 자연 상태의 자연스럽다는 규칙과 규범, 권리, 의무 등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인간 자신과 인간 행위는 모습과 형태가 무척 다양하며 무엇이 인간적이고 본성적이며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결정하는 일은 인간 본성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현재 당연하게 여기는 노동 형태나 화폐 시스템도 기괴한 과거 일, 예컨대 유럽 코르셋이나 중국 전족 풍습처럼, 언젠가는 모든 사람이 이를 잘못된 일이라고 비난하지 않을까? 예전에는 자연스러운 일로 보였지만, 현재 우리 관점에서는 그저 자연스럽다고 억측 부리는 일로밖에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세상일에 객관적인 진실은 없다. 상호주관(inter-subjective)만이 존재한다. 상호주관이란 그 당시 다수가 옳다고 ‘믿는 사실’이다.
르네상스를 거쳐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 유행한 코르셋은 여성이 아름다워 보이길 원했든, 많은 남성이 그 아름다움을 갈망했든 우리 현대인에게 좀체 이해되지 않는 상호주관을 보여준다. 빅토리아 시대 여성은 스물한 살이 되기 전에 자신 나이 숫자보다 더 가느다란 허리 크기를 갖고 결혼하는 게 꿈이었다. 당시 여성이 이상적으로 생각한 허리 사이즈는 14∼15인치였다. 가느다란 허리가 여성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동시에 가슴을 돋보이게 한다고 생각했다. 개미같이 가는 허리에 치마를 분수처럼 풍성하게 부풀려 곡선미를 한층 과장한 실루엣이 유행했다. 코르셋 앞면에는 보정 효과를 높이고자 길고 뻣뻣한 지지대를 넣었다. 실용 면에서 보면 동물 뼈나 강철처럼 튼튼한 재료가 더 좋지만, 상류 여성은 장식을 위해 은이나 상아, 고래수염 같은 재료를 넣기도 했다. 또한 지지대에 시 구절이나 명언을 새겨 넣는 일도 유행했다. 지지대는 성적인 의미가 있어 코르셋에서 지지대를 빼내는 행위가 유혹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영화 <캐리비언의 해적>에서 여주인공은 해적을 때려눕힌 뒤 진짜 고통이 무엇인지 코르셋 입는 일에 빗대어 표현했다. “고통이 뭔지 알고 싶어? 그럼 코르셋을 입어봐!” 빅토리아 시대 코르셋을 입은 여성은 따로 쉴 수 있는 방이 있었다. 코르셋이 허리를 너무 조여 숨쉬기 어려운 여성이 많아지자 코르셋을 잠시 풀고 그곳에서 쉴 수 있었다. 그렇지만 호흡곤란으로 종종 졸도해도 창백한 채 기절하면 ‘최고의 미인’으로 대접받곤 했다. 코르셋은 무리하게 여성 허리를 조여 탈장을 일으키거나 장기를 압박해 내출혈을 일으키게 했다. 저녁에 코르셋을 풀 때면 피가 베어나오는 일이 흔했다. 게다가 장기 위치를 영구적으로 변형시키거나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찔러 죽기도 했다. 심지어 재채기만으로도 허리에 무리가 가해져 그대로 사망했다.
코르셋이 유행하던 당시 문학 작품을 읽으면 여성들이 신경 쇠약이나 히스테리, 졸도 등에 시달리는 일이 다반사로 묘사되는데, 모두 코르셋 탓이었다. 심지어 코르셋만으로 가느다란 허리를 얻지 못하면, 맨 아래 갈비뼈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기도 했다. 루소는 가느다란 허리로 남성 부속물이 되고자 했던 여성 허영기를 비난하면서, 코르셋은 ‘여자를 타락시키는 물건’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혼기에 찬 여성에게 가는 허리는 집안이나 재산만큼 자신을 돋보이게 하였기에 코르셋은 20세기 초반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400여 년 동안 코르셋이 유행한 유럽을 좀체 이해할 수 없지만, 중국은 전족이 거의 1천년이나 지속됐다. 전족은 여자 발을 어려서부터 자라지 않게 해 7~10cm 정도로 작게 만들었다. 발을 베로 동여매어 자라지 못하게 하고, 그나마 커진 뼈를 뒤틀어버린 후 발에 살은 고름으로 녹였다. 심지어 세간에는 "발은 썩어 문드러지지 않으면 작아지지 않는다. 문드러질수록 예쁜 발이 된다"고 비법이 전수 되었다. 그러다가 실제 발가락이 하나 둘 떨어져나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전족은 평생 뼈가 부러진 채로 사는 삶을 의미했다. 전족 여성은 일할 수 없고 멀리 걸어갈 수도 없었다. 걷기 힘든 여성은 정상적인 사회활동이나 사교활동을 할 수 없었다. 단지 방안에만 앉아 있었기에 견문이 좁아지고 생계를 꾸릴 수 없었다. 나아가 의타심과 나약함, 게으름, 자괴감만 커져갔다. 여성 지위는 더욱 낮아졌다.
전족 습속은 10세기경 송나라 궁중 무희가 처음 시작했다. 무희는 발을 비단으로 묶고 발끝을 뾰족하게 만들었다. 그런 다음 연꽃 위에서 춤을 추었다. 그래서 전족은 '금련(金蓮)이라고도 했다. 이러한 발이 아름답다고 소문나자 귀족은 신분 표시로 이를 모방했다. 원대를 지나 명청시대가 되면 지배계층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전족이 확산되었다. 청대 인물인 전영이, "사대부 가문부터 편호소민(編戶小民)에 이르기까지 전족하지 않는 이가 없다며, 전족은 용모 단장의 한 요건이 되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명청시대 전족이 널리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전족은 순결과 관련 깊었다. 발을 묶은 소녀는 곧 ‘밖으로 마구 쏘다니지’ 않는다는 뜻이며, 집에만 틀어박혀 ‘좋은 여성’으로 성장하도록 잘 키워 진 훌륭한 가문임을 증명해 주었다. 또한 결혼 후에도 남편이 아내를 한가롭게 집에만 머물 수 있게 할 정도로 재력이 있다는 표식이 되었다. 그러자 중산층은 점잖은 체면을 과시하고자 정조에 대한 입에 발린 찬사를 늘어놓으며 전족을 받아들였다.‘ 또한 ’어떤 부모들은 이렇게 불구가 된 딸이 훨씬 높은 가격에 창녀로 팔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전족의 극심한 고통을 참아내는 소녀는 칭찬받았다. 절에서 벌어진 축제 때는 전족 대회가 열렸다.‘
전족이 유행하던 시기에 여성 평가 기준은 당연히 발이었다. 제 아무리 예쁜 여인도 발이 '뚱뚱'하면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소각(小脚: 전족을 한 발)에 비해 대각(大脚: 전족을 하지 않은 발)은 천하게 여겨졌다. 이후 수백 년 동안 전족은 성적인 욕망이 되었다. 자연스럽지 않게 다리 저는 모습이 남성을 자극했다. 작은 발은 걸울 때 허리에 부담이 되어 음부에 지방이 많아지고 음부를 이루는 골반근육은 더욱 활성화되어 허리에 힘이 세져 성적능력은 배가된다고 믿게 되었다. ‘여성들은 아름답게 수놓은 헝겊신으로 전족을 감싸기도 했는데, 이 역시 남성 흥분을 자극했다. 어떤 남성은 여성 전족 버선을 벗기고, 애무하고, 심지어는 입으로 핥는 것에 성적 흥분을 느꼈다. 발을 만지는 일은 성교에 필요한 서곡이 되었다. 고소설 금병매는 성교하면서 발을 만지는 18가지 체위를 추천한다. 성적 쾌감이 증가함에 따라 발을 잡고 입 맞추고 빨고 조금씩 물어뜯고 씹고 그리고는 입 안에 다 집어넣는다거나 발가락 사이에 놓인 수박씨와 아몬드를 먹는 등의 방중술 서적들이 나왔다. 결국 여성 전족은 부와 여가, 교양, 예술적 재능, 아름다움, 미덕, 남녀 간의 적극적 결합을 이끄는 성적 흥분의 상징이 되었다.’
17세기 중국을 정복한 만주족은 전족 관습을 폐지하고자 포고령을 내리고, 자신들 큰 발에 자부심을 느낀다며 홍보했지만, 전족 관습을 그만두게 할 수는 없었다. 전족은 쾌락이었으며, 남자들은 연민과 희열을 동시에 느꼈다. 1895년에 이르러서도, 중국인 기독교인들은 고해성사를 하면서도 여성 발에 대해 음란한 상상을 한다고 한 프랑스 의사가 보고했다. 20세기 초 전족 반대 운동이 본격화 되었지만, 제약요인이 있었다. 다름 아닌 혼인제였다. 긴 세월 전족 전통으로 인해 남자들은 전족 여성과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많은 여성이 방족(放足), 곧 더 이상 전족을 하지 말아야 할 당위성을 절감했지만 혼인문제에 직면하면 다시 전족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애 의식 변화가 필요했고, 5.4운동이 계기가 되었다. 이 기간 모든 중국 전통에 재평가 이루어졌고, 전족 폐해를 다시 인식하게 되었다. 5.4운동 이후 젊은 지식인을 중심으로 전족 여성과 결혼하는 일이 오히려 수치로 여기는 풍조가 생겼다. 결국 여성 자신이 자유롭게 걷고 싶다는 페미니즘 운동 확산으로 전족 풍습이 점차 사라졌다.
그런데 이처럼 특정 기간, 특정 장소에서 다수가 옳다고 ‘믿은’ 코르셋이나 전족 사례와는 달리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우리는 모두 결국 사람이기에 서로 비슷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중세의 쾌락』 저자 장 베르동은 "육체를 가진 중세 사람들은 쾌락을 과연 거부했을까, 아니 거부할 수나 있었을까?"라고 그들의 육체적 금욕을 의문시하며, 유럽 중세 아자그(Asag) 습속을 소개한다. 이 의식은 중세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 구애 의식 후 첫 번째 키스 전에 사랑하는 여자 나신을 보는 ‘시련’이다. 여성은 알몸인 남자 옆에 나신 상태로 눕는다. 남자는 이 의식을 주도하는 여성 의사에 반(反)하여 어떠한 짓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아자그는 “남자가 여성 자신을 정신적으로 사랑하는지, 아니면 단지 자신 육체를 원하는지 확인“하는 의식이다. 베르동은 유럽 중세가 육체보다 영혼이나 정신을 더 가치있게 여긴 문화임에도, 그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던 남녀가 과연 얼마나 될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렇지만 유럽 중세 아자그와 매우 유사한 번들(bunddle)이라는 풍습을 제시한 『인간의 내밀한 역사』의 저자 시어도어 젤딘 논지는 그와 반대다. 과거 남성이 여성에게 접근할 때 꼭 성적인 관계에 집착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12세기 유럽 기사들은 숭배하는 여인에게 헌신적이었지만, 꼭 성적인 결합을 바라지 않았다. 17세기 이르기까지 영국에서 결혼은 이십대 후반까지 미뤄졌지만 사생아 출생률은 단 3%에 지나지 않았고, 이 비율은 피임이 보편화된 오늘날과 비교해 봐도 극히 적은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며 당시 사회가 우리 추측과 달리 성적으로 문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젤딘은 번들이라는 또 다른 ‘시련’ 습속을 소개한다. 번들이란 구애하는 남자가 여자 초대를 받아 여자 침대에서 함께하는 관례다. “번들은 옷을 입은 채로 껴안고 이야기하고 같이 잔다는 의미였다. 때때로 여자가 허리까지 옷을 벗는 경우도 있었고 신발과 양말을 벗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순수한 애정 표시가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점을 서로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관습은 ”응접실에서 둘이 이야기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하게“ 여겨졌고 따뜻하기에 더 선호되었다. 번들링은 오직 겨울 동안에만 있던 일로 종종 일요일 예배 후에 이루어졌는데 약혼자들 사이로만 이 습속이 제한되지 않았다. 남편은 자기 아내나 딸들과 ‘번들’ 하라고 외부 손님을 초대할 수도 있었다. 이는 영국과 미국, 네덜란드에서 흔했고, 외관상으로는 아프가니스탄에서도 그랬다. 젤딘은 “서로 만지는 것에 대한 금기가 확립되고 성교가 친숙함의 상징으로 확립된 것은” 지난 2세기 전 일이며, 이 같은 과거를 보면 현재 그와는 다른 우리 행동 대부분이 다수가 단지 옳다고 믿는 ‘상호주관’일 수 있다고 암시한다.
우리가 굳건하게 믿는 가족에 대한 견해도 단지 현 시대의 상호주관일 수 있다. 영화 <미나리>가 개봉되자 평론가들은 이 영화가 한국과 미국을 포함해서 전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전통적인 가족을 소재삼아 따뜻함과 유대, 사랑을 잘 표현했다고 상찬했다. 그렇지만 역사학자 에릭 홉스봅이 언급했듯, “통상 낡은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낡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전통(traditions)'은 실상 그 기원을 따져 보면 극히 최근 일일 따름이며, 종종 발명된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 가족이란 사랑과 따뜻한 안식처, 소중한 추억을 의미한다. 분명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인간이 가정을 이루어 자식을 낳아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가족인식은 본능보다 사회로부터 더 큰 영향을 받는다. 가족 간 관계 관념은 오랜 기간을 거치면서 매순간 달라질 수 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가족의식은 비교적 최근에 탄생했다.’ ‘우리나라만 해도 양반층을 제외하고 서민들이 부부와 아이로 구성된 가족을 꾸린 것은 최근 18~19세기 들어와서야 가능했다. 특히 노비가 사회 구성원의 30~50%를 차지하던 16세기 이전에는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있더라도 유지하기 몹시 어려웠다. 심지어 가족이 보편화 되고 그에 따르는 가부장제가 강화된 것은 20세기 들어와서다. 이렇게 동아시아나 한국에서 근대 이후 가족 조직이 강화되었다면, 이는 기존 인식과 다른 점이 대두된다. 즉 가족을 중시하는 현상은 그동안 전근대성으로 취급되었는데, 오히려 근대화나 자본주의화 그리고 가족 조직 강화 등이 서로 보완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가정의 ‘소중한 아이’ 의미도 가족 의미가 바뀔 때마다 항상 함께 변해왔다. 근대 이전 어른들은 아이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품지 않았다. 오히려 오랫동안 아동 이미지는 끔찍했다. ‘태어날 때부터 아이는 원죄가 있는 불완전한 존재, 곧 ‘천사’가 아닌 악의 상징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에서 “이 작은 인간은 무지하고 쉽게 흥분하며 변덕스럽다”고 서술하고 있다. 너무나 타락한 아이 본성을 교정하고자 위협과 회초리, 체벌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오히려 “아이들을 부드럽게 대하면 이들은 타락한다”라는 경고도 있었다. 심지어 “교수형을 선고받은 한 청년은 어머니가 자신을 어렸을 때 제대로 벌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머니 귀를 뽑아 버렸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일반적으로 자식들 가운데 어머니가 가장 아낀 자식이 가장 나쁜 사람이 된다”라는 속담도 널리 퍼져있었다.
‘고대 로마인은 노예이건 업둥이건 간에 사내아이나 계집아이를 집에 두고 “기르기”를 좋아했다. 이러한 ‘귀염둥이’는 장난감 노릇도 하고 성적 노리개 노릇도 했다. 이러한 아이를 귀여워하고 사랑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마인은 아이를 데리고 저녁을 먹고 함께 놀고 응석을 받아주었다.‘ 유럽 중세 부모도 자신 아기를 장난감이나 기계라고 표현했다. 아기 행복이 아니라 부모 스스로 즐기고자 한 일이었다. 아기는 어른들 수중에 놓인 ‘놀이 기구’로, 인격 없는 작은 인간이었다. 아기 인형이 부모를 즐겁게 해 주는 시기가 끝나면, 바로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부모는 자식이 성장한 후에도 계속 기계로 여겼다. 규율을 너무 엄격하게 적용시킨 나머지, 자식은 자신 생각을 드러내지도, 감정도, 이성도 표현하지 않는 데 익숙했다.‘ ’아이를 대할 때 상스러운 농담, 외설적인 언행이 당시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돈을 걸고 도박을 하게 그냥 놔두었다‘ 과거 사람들은 우리 방식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두 세기 전만해도 나무로 만든 나막신만 빼고 당시 유럽 사람이 오늘날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고 느꼈다고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과거‘ 사람들 생각이 우리와 비슷했을 거라고 그릇된 느낌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18세기 프랑스 판본 ’동화‘ <빨강 모자 소녀>를 읽어보아야 한다. 동화는 분명 당시 소녀들에게 숲속에서 늑대를 만나면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이겠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 아이를 재우면서 다음과 같은 동화는 절대 읽어주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옛날 사람들과 우리 생각 차이는 크다.
옛날에 어머니 심부름으로 한 어린 소녀가 할머니에게 빵과 우유를 가져가고 있었다. 그 소녀가 숲속을 걷고 있는데 늑대 한 마리가 나타나 어디 가냐고 물었다. "할머니 집으로요." 소녀가 대답했다. "어떤 길로 가느냐? 핀의 길이냐, 바늘의 길이냐?"고 늑대가 묻자, "바늘의 길이오"라고 소녀가 답했다. 그리하여 늑대는 핀의 길을 따라 할머니 집에 먼저 도착했다. 늑대는 할머니를 죽인 뒤 그 피는 병에 담고 살은 썰어서 접시 위에 놓았다. 그리고는 할머니 잠옷을 입고 침대 속에서 기다렸다. 소녀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늑대가 말했다. "들어오렴, 얘야." 소녀는 늑대가 할머니인 척 하고 있단 사실을 모른 체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 할머니. 빵하고 우유 좀 가져왔어요." "너도 뭐 좀 먹으렴. 찬장에 고기와 포도주가 있단다." 그리하여 소녀는 그것을 먹었다. 그녀가 먹을 때 작은 고양이가 말했다. "더러운 년! 할머니 살을 먹고 피를 마시다니!" 그러자 늑대가 말했다. "옷을 벗고 내 옆으로 들어오렴." 소녀는 할머니라고 여긴 늑대에게 물어봤다. "앞치마는 어디다 둘까요?" "불 속에 넣어라.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코르셋, 치마, 페티코트, 스타킹 등 옷마다 소녀는 똑같은 질문을 했다. 늑대는 매번 똑같은 대답을 했다. "불 속에 넣어라.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소녀가 침대에 들어가서 말했다. "할머니, 왜 이렇게 털이 많아요?" "따뜻하기 위해서란다, 얘야." "할머니, 왜 이렇게 어깨가 넓어요?" "나무를 잘 옮기기 위해서란다, 얘야." "할머니, 왜 이렇게 손톱이 길어요?" "가려운 데를 잘 긁기 위해서란다, 얘야." "할머니, 왜 이렇게 이빨이 커요?" "너를 잘 먹기 위해서란다, 얘야." 그리고 늑대는 소녀를 먹었다.‘
아이는 때때로 하인과 거의 구별되지 않던 시기도 있었다. 아이들은 걸을 수 있게 되자마자 일해야 했고, 특히 19세기 유럽에서 한 집안 수입 3분의 1이나 절반 정도를 책임졌던 시기도 있었다. 가까운 일본만 보아도, ‘일본 전통 사무라이 집안 사내아이는 아주 어린 나이에 낯선 가정에 보내져 남의집살이를 해야 했다. 그곳에서 부족하고 가난한 생활을 했다.’ 어렸을 때 남의집살이를 한 아이들은 일본뿐만이 아니다. ‘유럽 중세 아이는 남아든 여아든 일곱 살에 다른 사람 집으로 보내져 열여덟 살 무렵까지 다양한 봉사를 했다. 이 기간 아이들은 다른 가정에서 시키는 모든 일을 다 했다. 아주 소수 아이만이 집을 떠나지 않았는데, 재산 정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남의 집으로 아이들을 보내고 자신 집에는 다른 아이들을 받아들였다. 사실 부모가 직접 가르칠 수 있는 일들을 자식들이 다른 곳에 가서 배우도록 했다는 점은 이상한 관습이 아닐 수 없다. 아이의 기본 의무는 다른 집 주인을 ‘제대로 잘 섬기는 일’이었다. 시종인 아이는 식탁을 차리거나 침대를 준비하고 주인과 동행할 줄 알아야 했다. 하지만 당시 이런 ‘봉사’는 현재 우리 가치관과 많이 다르다. 봉사라는 관념이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 ‘종속’되었다는 사실은 후세 사람들 생각처럼 그렇게 굴욕적인 일이 아니었다.‘
‘근대 이전에는 부모와 자식 관계가 주로 감정보다는 먹고사는 경제 문제로 결정되었다. 가장 자연스럽다고 인정되는 모성애만 하더라도, 많은 사회학자가 과연 과거에 모성애가 존재했는지, 아니면 근대에 와서 비로소 만들어진 것인지 의심스럽게 여긴다. 산업사회 이전 아이들은 나름의 욕구를 갖고 있지 못하여 아직 완전히 완성되지 않은 불완전한 성인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특별한 주목이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당시 부모는 아이를 방해물이라고 느꼈으며, 불가피한 경제적 희생을 감수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자신 이기심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은 채, 아이라는 짐에서 벗어날 방법만 수없이 되풀이해서 생각했다. 만약 모성이 본능이라면 어떻게 다른 자식들보다 유독 한 자식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 어째서 딸보다는 아들을, 둘째 아이보다는 첫째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당시 어머니는 재산을 혼자 이어받게 될 상속자, 곧 장남에게만 애정을 보였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자신을 의탁할 수 있는 장남과 좋은 관계를 맺는 일이 필수였다.
그러다 18세기 후반이 되자 우리 마음에 혁명이 있었다. 어머니의 이미지와 역할, 그 중요성이 급격히 변했다. ‘모성(母性)’이라는 말에 ‘애(愛)’라는 단어가 결합하면서 어머니 사랑은 자연 발생적이라고 여겨지기 시작했다. 인구 증식 자체가 국부(國富)로 인식되어 유아 생존이 새로운 지상 과제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18세기 말에는 식민지 사람들을 복종시켜 길들이기보다는 자국 인력을 양성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아이는 국가 관심 대상이 되었다. 여전히 사망률이 높아 부모가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젖먹이 아기 생명조차 중요해졌다. 국가는 아이 생명과 교육을 위해서 ‘모성애’라는 말을 모든 어머니 머리에 주입하기 시작했다.‘
사실 18세기 이전 아이는 가족에 속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일원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은 아프리카 속담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뜻은 단지 아프리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가족 내 상호감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부부 사이나 부모와 자식 간 특별한 감정이 꼭 필요하지 않았다. 상호 애정은 가정 밖인 이웃이나 친구, 주인과 시종, 아이와 노인, 남자와 여자로 구성된 아주 긴밀하고 정감어린 공동체 사회가 보장했다. 사람들 일상이 공동체 중심으로 이루어질수록 가족 자리는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근대 산업 사회가 되자 가족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공동체보다 가족 구성원 간 사랑이 중요하게 된 것이다. 이웃 관계에 대한 의식이 적어질수록 가족애가 지배적인 의식이 되었다. 가족의식 발달은 사생활 발달과 가족관계 내밀화를 가져왔다. 가정은 부부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에 필수적인 애정 공간이 되었다. 이제 부모는 아이들 학업에 관심을 두고 항상 정성을 다해 주의를 기울였다. 전에는 결코 이러한 태도를 찾아볼 수 없었다.‘
가족 구성원 간 사랑은 공동체에 따라 변해온 역사다. 공동체가 개인에게 충분한 버팀목이 되면, 개인은 가족 속박을 피했다. 반대로 공동체가 개인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면 가족은 보호처가 되었다. 미국처럼 가족의식이 발달하여 ‘가족애’를 지나치게 내세우는 곳은 공동체가 안전하지 못한 사회다. 그러한 곳에서는 가족 개개인, 예컨대 영화 <미나리> 주인공들처럼 공동체 내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오롯이 그들 스스로 고통을 떠안아야만 한다. 정치경제학자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공동체와 가족은 ‘대립’ 관계에 있으며, 개인이 더 자유롭고자 한다면, 공동체가 가족에 선행해 발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족과 공동체는 반비례해서 발전한다. 공동체와 가족은 상호 보완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대립된다. 가족이 강화되면 모든 사회 공동체 유대가 약화되고, 때로는 공동체가 해체된다. 가족이 긴밀히 단합된 곳에서 공동체는 다만 드문 예외로서만 형성된다. 공동체가 형성되면 가족 유대가 약화되고 개체가 또다시 자유롭게 된다. 개체가 가족에 흡수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이 발생하는데 있어서 최대 적은 가족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만일 가족보다 더 높은 사회 형태인 공동체가 발전하면 가족을 해체, 흡수하는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가족이 나중에 무한히 더 좋은 조건 밑에 새로이 조직될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