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페르니쿠스에게는 당찬 포부가 있었지만 그는 천문학자이자 수학자로 알려져 있었기에 당시 사람들은 그가 자연철학 문제에 나설 자격이 없다고 보았다. 우주론은 자연철학자의 몫이지 천문학자 몫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에 수학과 자연철학은 엄연히 구별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철학의 목표는 물리적 원인의 관점에서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수학은 물리적 원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으며, 단지 다양한 현상에 대한 특별한 유형의 기술적 설명을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금성의 대원과 주전원 그리고 이들 원 각각의 운동을 기술하는 기하학은 언제, 어디에서 금성이 하늘에 나타날지는 알아낼 수 있지만, 무엇이 금성을 계속 움직이게 만드는지, 어떻게 주전원 상에 머물 수 있는지, 왜 자신의 고유한 속력으로 움직이는지 또는 실제로 주전원 상에서 움직이는지 여부 등은 전혀 알려주지 못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 견해에 따를 때 수학은 자연철학 대상이 되기에는 불완전했으며, 스콜라주의에 따르는 대학 전통에서 보더라도 자연철학은 일반적으로 수학적 고려없이 연구되었다. pp. 127-128.
자연이 자신의 법칙을 따르고 매 순간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가정하면, 자유낙하에서 일어나는 과정은 매 순간 동일하다고 확신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으로서, 갈릴레오는 중력으로 인한 가속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단지 어떤 물체가 얻는 속도 증가에 관해 이야기한다. 왜 물체가 빨라지는지 설명하는 대신에 그는 단지 어떤 방식으로 빨라지는지를 기술할 뿐이다. 만약 1초에 어느 정도만큼 빨라진다면 다음 1초에도 동일한 양만큼 빨라질 것이라는 말이다. 갈릴레오는 마치 우리에게 자유낙하에 관한 자연의 법칙을 알려주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중력으로 인한 가속에 관해 말하는 대목에서는 언제나 그 현상을 ‘자연적 가속’이라 일컫는다. 그냥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캐묻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비의적인 냄새가 풍기는 어떤 것도 거부하고 대신에 전적으로 운동 및 운동하는 물체 관점에서 현상을 설명하려는 그의 신도는 다음 세대의 자연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pp. 202-203. 갈릴레오는 하느님이 전지전능한 분으로 어떤 일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므로 인간은 자연 본질을 결코 파악할 수 없다고 보았다. pp. 206-207.
이후 뉴턴도 어떻게 중력이 작동하는지 설명할 수 없음을 기꺼이 인정했지만 여러 상이한 조건에서 중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상세하게 보여줄 수 있었다. 심지어 행성 운동의 정밀한 수학적 예측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뉴턴 업적은 기계론적 철학과 비의적 힘[force]의 실재에 대한 믿음을 결합시켜 이루어진 것이다. 비의적(祕儀的, 비밀스러운 종교 의식과 같은) 힘이 실재한다는 믿은 물론 그의 연금술 연구와 더불어 든든하게 자리 잡은 영국의 자연철학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이 전통은 윌리엄 길버트에게서 시작되어 프랜시스 베이컨에 의해 철학적으로 기품 있는 지위에 올랐으며, 왕립협회가 소중히 이어가고 있었다. 이 전통에 따르면 물체는 숨겨진 능력을 지니고 있는데, 비록 기계론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이 능력은 실험에 근거한 연구를 통해 증명될 수 있었다. 따라서 뉴턴 업적은 그가 상상 초월의 천재였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도 밝혔듯이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서양과학사상사>
“각각의 시대는 저마다 서로 다른 정신 속에서 문화를 꽃피우고 저마다 서로 다른 시대정신은 자신에 고유한 존재 이해를 기초로 한다. 그리고 저마다 서로 다른 존재 이해는 최종적으로 구체적인 사물 개념에 의해 압축된다. 물론 사물을 정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당대의 시대정신과 존재 이해를 표현하는 일이되 서로 경쟁하는 관점들 사이에 패권을 확립하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철학사를 시대정신의 역사로 보았고 하이데거는 그것을 존재 이해의 역사로 간주했다. 하지만 시대정신의 역사나 존재 이해의 역사는 사물 이해의 역사 속에서 압축되고 재구성될 때야 비로소 실제적인 현장 개입 능력을 획득할 수 있다. 하이데거 용어로 하자면 존재 이해의 역사는 존재자 개념 속에서 첨예회되어야 한다. 사실 동서를 막론하고 사물 개념은 끊임없이 인간 사유를 지배하는 이항대립의 계열 전체를 집약하는 위치에 있다.” pp. 57-58.
“자연이란 말은 아주 옛날부터 있어왔지만, 고대인이 생각하는 자연과 근대인이 생각하는 자연은 동일하지 않다. 동일한 말을 놓고 고대인과 근대인은 완전히 다른 것을 떠올리는 것이다. 이런 변화의 역사적 배경에는 무엇보다 17세기 과학혁명과 그것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한 데카르트적 기획이 자리한다. 그리고 그 변화 내용은 고대 목적론적 자연관이 근대 기계론적 자연관으로 전환되었다는 말로 압축될 수 있다.” pp. 65.
“고대 그리스에서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은 어떤 점을 중심으로 상호 대립하는가? 그 둘을 이항 대립 관계로 만들어주는 핵심 요소는 정확히 운동 성격에 있다. 자연적 사물은 스스로 움직이는 반면, 인공적 사물은 외부의 강제력에 의해 움직인다. 자연적인 것은 그것이 동물이든 식물이든 자기 내부에 있는 힘(형상, 영혼)에 의해 자발적으로 움직이거나 변화해간다. 심지어 광물마저도 생성 변화의 원리를 자기 안에 지닌다는 것이 고대인의 믿음이었다. 반면 사람이 제작한 물건은 자기 안에 자발적인 운동이나 변화 원리를 지니지 않는다. 외부의 강제력이 아니라면 인공적인 것은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타성적이라는 것이 인공물의 본성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자연과 인공 관계를 집악하는 또 하나의 개념은 모방(미메시스)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예의 원천을 자연에 대한 모방으로 정의했다. 이런 모방 관계에서 자연적 사물은 원형에 해당하는 반면 인공적 사물은 그것의 모사에 불과하다. 이것은 원형인 자연적 사물이 모사에 불과한 인공적 사물에 비해 존재론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말한다. 자연적 사물은 존재론적으로 탁월한 어떤 것이자 생동하는 어떤 것이다. 스스로 움직이는 것, 자기 안에 자발적 운동 원리를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타성적이라는 것은 죽어 있다는 것과 같다. 외부의 강제력으로만 움직이는 인공물은 죽어 있는 것이며 존재론적으로 열등한 지위에 있다.” pp. 66-67.
“고대인에게 자연의 변화는 무엇보다 질료 내부에서 형상이 발생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런 내생적 발생 원인이 작용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작용인은 형상을 스스로 창조하지도, 외부 형상을 질료에 강제하지도 않는다. 다만 질료에 내재하는 가능성에 특정 형상이 수태, 분만하도록 도울 뿐이다. 만든다는 것을 이렇게 돕는다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 아마 이것이 고대 자연관이 남긴 가장 긍정적인 유산인지 모른다. 여기서는 이러저러한 모습으로 사물을 만든다는 것이 폭력의 강요와 거리가 멀다. 그것은 다만 그 안에 숨어 있는 잠재력을 기르고 보살핀다는 것에 가깝다. 이런 작용인 개념은 선(善)의 이념을 전제한다. 돕고 기른다는 것은 완전하게 한다는 것, 더 좋은 상태로 바꾼다는 것이다. 자연이 무엇을 만든다면, 이 때 만든다는 것은 더 좋은 상태로 만든다는 것, 그래서 완전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의 만들기가 자연의 운동이라면, 그 운동은 어떤 좋은 상태, ‘선’을 목적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작용인은 필연적으로 목적인을 전제한다.” pp. 73-74.
아리스토텔레스는 4원인이 가리키는 네 가지 관점에서 자연을 설명할 때야 비로소 완결된 학문적 인식에 도달한다고 보았다. 반면 17세기 과학은 작용인이라는 하나의 원인만을 통해 자연을 설명해야 한다고 봤다. 이런 차이는 주로 물질 개념의 변화에서 온다. 그리고 이런 물질 개념의 변화는 수학이 자연학의 표준 언어로 자리하면서 초래한 결과다. pp. 76-77. 17세기는 중세를 지배하던 아리스토텔레스-스콜라 전통이 파산하고 피타고라스-플라톤 전통이 부활했다. 이 시기 과학을 주도했던 케플러, 갈릴레오, 데카르트는 이 점을 분명히 의식했던 것처럼 보인다. 수학자였던 이들은 자신들이 피타고라스-플라톤 전통의 후예임을 공공연히 선언했다.
어떤 전통에서든 자연학의 과제는 자연의 비밀을 밝히는 데 있다. 하지만 두 전통에서 자연은 서로 다르게 이해되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스콜라 전통에서 자연이란 살아 있는 듯 움직이는 어떤 유기적인 전체를 말한다. 자연적 사물의 표본은 생물에, 자연학적 탐구의 핵심은 사물이 지닌 질적 특징을 분류하는 데 있다. 반면 피타고라스-플라톤 전통에서 자연은 살아 있는 유기체라기보다는 어떤 영원한 질서의 불완전한 담지자다. 여기서는 자연 자체보다는 자연을 재현할 수 있는 어떤 이상적 평면이 더 중요하다. 사물은 감각적 경험보다는 이성적 통찰이나 추론을 통해 다가서야 할 그 무엇이다. 자연학적 탐구는 사물이 지닌 양적인 특성이나 비례 관계를 측정하는 데 있다. 따라서 수학은 자연학에 필요불가결한 안내자이자 도구일 수밖에 없다.
17세기 과학혁명은 이런 두 전통이 교체되는 사건이다. 질적 분류의 학문이 양적 측정의 학문으로 전환되는 사건, 그것이 과학혁명의 요체를 이룬다. 갈릴레로-데카르트의 수학적 존재론에서 자연적 대상은 수학적 대상과 구별되지 않는다. 자연적인 것이 수학적인 것이 되고 수학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중세를 지배한 아리스토텔레스-스콜라 전통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전제였다. 자연을 살아 있는 유기체로 바라보는 이 전통에서 수학적 대상은 구체성을 결여한 불완전한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연적 사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 정의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을 형상과 질료의 복합체로 정의했다. 형상은 플라톤 철학에서 이데아라 불렸고 라틴어권에서는 본질로 옮겼다. 형상은 사물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형식에 해당한다. 반면 질료는 형식적 구조에 의해 보호, 조직, 육성되는 어떤 내용과 같다. 동아시아 전통에서도 사물은 이(理)와 기(氣)의 결합체로 간주되었는데, 여기서도 ‘이’는 사물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형이상학적 요소에 해당한다. 그리고 ‘기’는 사물의 질료적 바탕을 이루는 형이하학적 요소와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을 제대로 안다는 것이 형상과 질료 모두를 아는 것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스콜라 전통에서 안다는 것은 사물의 질적 특질을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나 중세 과학에서는 따뜻함과 차가움, 무거움과 가벼움 같은 질적 성질이 사물의 본성을 이루는 핵심 요소였다. 이런 사물 이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기하학 도형 같은 수학적 대상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질료가 없는 순수 형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며 질적 성질이 없는 순수 양적 성질만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학적 대상은 자연적 대상에 비해 반쪽짜리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학적 대상을 구체성을 결여한 추상적 대상, 빈곤한 대상으로 간주했다. 온전한 자연적 사물에 비할 때는 한없이 불완전한 대상이고, 따라서 자연학적 탐구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대나 중세의 자연학 책에 숫자나 도형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이런 데 있다.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수학과 자연학은 서로 무관한 학문으로서 서로 다른 진화 과정을 밟아왔다. 하지만 근대 과학혁명의 요체는 수학과 자연학이 분리 불가능한 관계로 통합되는 데 있다. 이런 통합 속에서 어떤 역전이 일어난다. 그것은 수학적 대상이 불완전한 대상에서 완전한 대상으로, 빈곤한 사물에서 이상적 사물로 뒤바뀌는 역전이다.
근대 과학혁명은 일종의 언어혁명이었다. 전근대 과학의 언어는 일상어였다. 반면 근대 과학의 언어는 수학이다. 과학혁명은 일상 언어에 기초한 자연학이 형식적 언어에 기초한 수리자연학으로 탈바꿈되는 사건이자 수학이 자연의 존재론적 문법으로 심화되는 사건이다. 이것이 ‘자연은 수학의 언어로 기록된 책’이라는 갈릴레오 언명이 담고 있는 의미다. 이제 수학은 자연학의 유일한 언어일 뿐만 아니라 자연 그 자체의 언어로 간주된다. 수리자연학 등장 이후 수학적 대상은 자연적 사물의 모델로, 따라서 과학적 대상 자체로 승격된다.” <근대적 세계관의 형성>
뉴턴은 <광학> 제1권의 2부에서 스팩트럼의 색깔들은 마치 한 옥타브 내의 일곱 음정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비율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뉴턴은 심지어 도표까지 제시했다. 따라서 흰빛은 함께 ‘소리 나는’ 다른 색깔들이 전부 모인 하나의 영광스러운 화음인 것이다. 1670년에서 1672년까지 케임브리지 학생들에게 행한 광학 강의에서 뉴턴은 스팩트럼은 다섯 가지 색깔만 구별할 수 있지만, ‘스팩트럼 영상을 더 아르다운 비율을 지닌 부분들로 나누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색과 주황색을 보탰다고 털어놓았다. 베이컨이라면 절대 허용하지 않았을 일이다.
흥미롭게도 오늘날 우리는 무지개가 일곱 가지 색이라고 믿는다. 뉴턴이 피타고라스식의 자연마법 전통인 구의 음악을 맹목적으로 믿었던 영향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셈이다. 무지개가 뜰 때 우리는 아무리 살펴도 결코 일곱 가지 색깔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뉴턴도 일곱 색깔을 볼 수 없었지만 피타고라스식 집착에 들어맞게끔 일곱 가지 색깔이 필요했다. 이후에는 뉴턴 권위 때문에 줄곧 그렇게 여겨졌다. 위대한 과학자가 한 말이니 우리 눈에는 다섯 색깔, 기껏해야 여섯 색깔밖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일곱 가지 색깔이려니 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사실 우리가 무지개의 일곱 가지 색을 믿게 된 까닭은 뉴턴이 생애 후반에 피타고라스식 자연마법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이렇게 적었다. ‘뉴턴은 이성의 시대의 첫 인물이 아니다. 그는 마지막 마법사이자 마법사들로부터 진심 어린 존경을 받아 합당한 마지막 신동이었다.’ pp. 267-268.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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