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왕국 - 북한산성이 전하는 스물여섯 가지 한국사 이야기
조윤민 지음, 경기문화재단 북한산성문화사업팀 엮음 / 주류성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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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성과 왕국>이라 우리나라 산성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았다.

펼쳐 보니 "북한산성"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북한산성을 축성할 무렵인 숙종과 영조 시대에 초점을 맞췄다.

삼국시대 당시 이야기는 너무 뻔한 역사 얘기라 지루해서 계속 읽어야 하나 고민했는데, 실제로 북한산성을 축성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승군에 대해 새롭게 인식한 계기가 됐다.

막연히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을 폈고 승려들이 성을 쌓는 부역에 동원됐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조선의 불교 정책,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조선이라고 하면 무조건 불교를 억압했을 것 같은데, 왕실에서도 의례를 위해서 사찰이 필요했고 왕족이나 고위 관료들이 개인적인 신앙심으로 사찰을 후원했으며 일반 백성들 역시 유교만으로는 종교심을 다 채울 수 없었던지라 여전히 불교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불교 역시 정부의 억압적인 정책에 맞서 자구책의 일환으로 승군 조직이나 종이 제조, 능묘 건설 같은 공사에 동원되어 역할을 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등이 축성되면서 성 내의 사찰을 승영으로 삼아 승군들이 수비를 맡는다.

백성들이 군역을 지듯 승려들이 서울로 올라와 산성을 지켰던 것이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임진왜란 때 승군들이 의병 활동을 펼칠 수 있었나 보다.

전쟁 후 승려가 34명이나 공신에 책봉됐다고 하니 과연 불교계가 큰 활약을 했던 모양이다.

북한산성의 역사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고 벌써 절판된 것이 아쉽다.

영조의 청계천 준설 사업은 백성을 위한 왕의 큰 업적으로 칭송하면서 뜬금없이 오늘날의 청계천 준설은 개인의 탐욕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부분이 어이없어서 기록해 둔다.

역사적 사건을 오늘날과 단순 비교하는 것도 웃긴데 한 쪽은 애민 정신이고 한 쪽은 탐욕이라는 기준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인상깊은 구절>

156p

던컨 교수는 조선 전기의 주요 양반 가문 38개 집안 중 넓게 보아도 16개 집안 정도를 신흥사대부로 볼 수 있으며, 이마저도 조선 초기 중앙관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 건국 때 지배층의 대대적인 교체가 없었으며 사회 혁명이 수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고려 말의 권문세족 가문 다수는 조선시대 들어서도 계속해서 큰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175p

이 두 사건으로 미루어 조선 초기 불교계가 불교억압정책에 대해 그냥 앉아서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맥과 정상적인 통로를 통해 의사를 표명하고 때로는 불법을 저지르면서까지 불교계의 이익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불교계의 이러한 반발과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세조 때를 잠시 제외하면 조선 전기의 억울 정책 기조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177p

당시 조선사회는 억불정책을 철저하게 추진하기에는 사회적 제약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 왕실 사람들이 사찰을 찾고 불교를 믿었다. 사찰에서 왕가의 안전과 번영을 기원했으며 질병 치유를 위해서도 불교의례를 행했다. 왕실이 주축이 돼 불교경전을 간행하기도 했다. 왕조 사회에서 왕실이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을 고려할 때, 왕실의 불교신앙은 정책 추진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추세에서 고위 관료층 일부에서도 사찰을 후원하고 지원했다.

 무엇보다, 공인된 소수의 사찰만으론 당시 백성들의 종교 욕구를 채워줄 수 없었다. 불교는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백성들의 생활에 스며들었고 사찰은 지역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백성들의 불교에 대한 믿음을 없앨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선이 건국 이념으로 내세운 성리학은 윤리 규범과 예절 면에서는 효과가 있었지만 사람들의 종교 욕구를 만족시키기엔 한계가 있었다. 왕실의 잦은 불교의례도 이런 점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억불정책은 현실과 유리된 정책이었다.

 국가 의례에도 아직은 불교가 필요했다. 가뭄과 홍수, 흉년 등의 자연재해 방지를 기원하는 국가 의례에 불교식 의례가 활용됐다. 전염병 방지와 전란을 우려하는 민심을 달랠 때도 백성들이 믿는 불교 의례가 효과적이었다. 외교정책에도 불교가 긴요했다. 당시 외교의 두 축인 명나라와 일본은 불교를 신봉했으며 외교 절차에서 불상이나 불경을 요구했다. 원활한 외교관계 수립을 위해서도 어느 정도 불교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인 요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불교교단 정비와 사찰 수 제한을 통해 토지와 노비를 관에 귀속시킴으로써 국가재력 확보가 가능했다. 이는 국가재정 확충으로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불교억압정책은 조선 초기의 불안했던 국가재정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인적자원 활용이라는 면에서도 불교교단에 대한 통제는 필요했다. 당시 승려 계층은 규율을 잘 갖춘 집단이자 잘 훈련된 인적자원이었다. 조정에서는 부역의 헝태로 승려들을 성곽 축조와 건축물 공사 등 국가 토목사업에 동원했다. 때로는 종이제조와 동전 주조 등 특수한 업무에 활용하기도 했다. 이런 목적이 달성된다면 조정에서는 무리하게 불교계에 개입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조선의 지배층은 억불정책을 추진하면서 한편으론 불교를 용인하고 일부 사찰을 보호하는 포용정책을 추진했던 것이다. 처한 현실과, 현실이 필요로 하는 요구에 의해 조선은 불교억압과 불교포용이라는 상반된 정책전략을 함께 선택할 수밖에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조선 초기의 불교는 상호모순 돼 보이는 이중적 성격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억불정책과 대치되는 정책 사안이 동시에 추진되고 일부는 파행 현상을 드러냈던 것도 이러한 이중 정책 탓이 컸다. 조선 전기의 불교정책은 지배층에겐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다주었겠지만 정책 대상자인 승려들에겐 편치 않은 일이었다. 굴욕적이기도 했을 것이다. 사찰의 기반을 잠식하고 불교의 저변을 뿌리 채 흔드는 존속의 위협으로도 다가왔을 것이다.

180p

조선 전기 억불정책 하에 북한산 지역 일부 사찰은 이전보다 더 보호를 받고 융성을 누렸다. 당시 왕실에는 의례와 기원을 행할 사찰이 필요했고, 도읍에서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북한산 사찰은 이런 왕실의 요구를 충족시켰다. 산세 또한 웅장하면서도 수려했으며, 무엇보다 북한산은 도읍을 지키는 한양의 진산이었다. 삼국시대부터 북한산 지역이 불교 요람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도 왕실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었다.

190p

8년 동안 굴욕적인 볼모 생활을 거쳐 왕위에 오른 효종은 이후 은밀하게 북벌정책을 추진했다. 도성 외곽 방위에도 중점을 두어 한양 주변 지역의 성곽을 보수하고 수비력을 강화했다. 이런 선상에서 효종 말년에 북한산성 축성이 고려됐던 것으로 짐작된다. 북벌 추진이 재정난과 집권층의 반대에 부딪치자 효종은 집권층의 지지기반 하에서 북벌정책을 추진했지만 집권세력은 북벌의 명분만 좇을 뿐이어서 실질적은 정책으로 추진되지는 못했다.

 효종 시기의 북벌정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북벌론을 패배한 전쟁에 대한 책임과 전쟁 후의 위기를 모면하려는 통치 이데올로기의 하나로 본다. 북벌론으로 백성의 관심을 외부로 돌림으로써 국내 문제에 대한 비판과 불만을 억누르고 민의를 하나로 결집시켜나갔다는 것이다. 효종은 북벌론을 내세워 군사력을 증강하고 왕권을 강화했으며, 송시열이 중심이 된 서인 정권은 북벌론을 붕당의 이익 추구와 정치적 입장을 합리화하는 명분으로 삼았다고 본다.

207p

공교롭게도 20일 뒤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유배지에서 압송되는 도중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는다. 왕비 폐출에 동조하지 않았던 남인 세력이 왕비 폐출과 송시열의 죽음을 맞바꾸는 정치적 거래를 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 내막은 차치하더라도 정국은 서인에서 남인으로 완전히 바뀌었고 두 세력 간의 갈등과 충돌에서 숙종의 입지와 목소리는 한층 강화되었다. 남인은 정권을 잡았지만 왕권을 강력하게 견제하기에는 처음부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환국은 숙종이 주도했고 정권 장악은 어부지리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결국 환국으로 가장 큰 득을 본 사람은 왕 자신, 숙종이었다.

 인현왕후에 적대적이었던 남인 중에서도 왕비 폐출의 이유가 무리라고 여겼을 정도고, 사관이 인현왕후와 연결된 서인 세력에 우호적이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왕비 폐출의 이유가 그리 합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왕비 폐출의 숨은 목적이 무엇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이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숙종이 강한 권력욕과 이를 이루려는 과감한 실행력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218p

그런데도 숙종은 여러 신하들의 목소리를 두루 듣는 편이었다. 신하들의 의견을 수렴했고, 때로는 숙종 자신의 의사를 피력하며 근거를 들어 신하들의 의견을 물리쳤다. 신하들은 의사를 표명하며 나름의 이유를 들어 상대방을 설득했고, 거기엔 숙종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고, 거기에 종종 극단적인 감정 표출과 돌발적인 정치 행보를 보인 숙종의 이미지를 고려하면 이러한 토론 분위기는 의외의 사실로 다가온다.

 숙종 대에도 이런 정도의 합리적인 정치협의체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건국과 함께 형성된 재상 중심의 관료체제 덕분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치협의체 아래서는 왕과 신하들이 여론을 살피고 상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왕권과 신권이 조율되고, 재상권과 언관권이 서로를 견제했다. 이를 통해 독단의 폐해를 막고 성급한 정책결정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려 했다.

221p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고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지주층이 늘어났다. 상업적 농업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부농층이 형성됐다. 사회 전체로 보면 눈에 띄는 성장임이 분명했지만 한편으론 가난한 농민이 많아지고 살기 위해 농촌을 떠나는 유랑민이 늘어났다. 이른바 사회 양극화 현상의 심화였다. 도시 빈민도 증가했는데, 한양으로 유입된 유랑민은 도성 지역의 빈민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 유랑민 유입은 당시 한양 인구 증가의 한 요인이기도 했다.

222p

북한산성이 축성되는 18세기 초엔 조선과 청나라는 대체로 긴장관계보다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외침의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동북아 정세에서 반대를 무릅쓰고 축성정책을 추진한 데는 대외적 요인보다는 국내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왕은 고뇌했을 것이다. 정략과 결단을 통해 최고의 권력을 가진 지존의 자리를 지켜나갔지만 나라의 책임자라는 무겁고 엄중한 책무의식 또한 커져갔을 것이다. 숙종은 부지런했으며 항시 일에 철저했다. 백성의 처지를 헤아리는 마음도 깊었으며 이를 실행으로 옮기는 실천력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마 시대의 한계는 아직 두터웠고 그가 볼 수 없었던 난관 또한 많았다. 의지는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고 정책은 종종 현실과 부합되지 못했다. 그래서 왕은 괴로웠을 것이고 또 외로웠을 것이다.

 숙종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그의 극단의 애증 표출만큼이나 심하게 엇갈린다.

(전에는 왕들의 나라 걱정이 피상적으로 느껴졌는데 나이를 들고 보니, 최고의 권력을 누리는 지존이지만 그만큼 엄청난 책임감과 부담감에 시달렸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저 미인들을 끼고 향락에 빠져 있기만 해서는 아무리 전제왕권 시대라 해도 왕이라는 막중한 자리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가는 연산군처럼 쫓겨나고 말았을 것 같다)

234p

축성 결정에서 축성 시작까지의 기간이 2개월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중앙과 지방 관청의 즉각적인 협조는 당시의 행정조직이 순조롭게 운영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여기엔 왕과 최고위 재상들의 통솔력이 뒷받침됐을 것이다. 숙종시대에 강화된 왕권과 숙종의 정책 추진력 또한 효율적인 협조와 지원을 이끌어내고 정책을 발 빠르게 추진하는데 큰 몫을 했을 것이다. 

277p

이렇게 해서 피난처 확보와 군사방어시설 구축으로 시작된 숙종 시대의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은 다음 시대 국가방위정책의 밑거름이 된다. 도성을 떠나지 않고 반드시 사수하겠다는 영,정조 시기 '도성 중심 방어전략'의 기반시설로 자리 잡는다.

283p

임진왜란을 전후에 나타난 이 공명첩은 돈이나 곡식 같은 물질을 통해 관직을 얻고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제도였다. 태어나면서 신분이 정해지고 그 신분의 한계 내에서 사회적 권리가 허용되는 신분제도, 조선지배층의 권위와 권리의 정당성을 보장한 그 한 축을 지배층 스스로가 부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부정'은 신분제도 자체의 허구와 모순에 대한 인식과 이를 변화시키련느 실천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신분제 사회를 유지하면서도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문제를 회피하고, 더 많은 이익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에 따른 것이었다.

286p

전란 후의 피폐한 사회 실정으로 인해 국가사업에 필요한 인력이 부족했던 것도 승려 동원의 한 요인이 되었다. 전란 후 승려의 수는 더 늘어난 상태였으며, 더구나 이들은 승단이라는 조직을 갖추고 일정한 훈련을 거친 인력이었다. 재정 악화로 곤란을 겪던 조정 입장에서 보면 승려만한 인력이 따로 없었다.

292p

교계에서는 억압을 완화시키고 교단의 존속을 위해서도 조정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일정한 선을 두고 불교계와 조정의 타협이 이뤄졌으며 승군 운영은 그 한 결과였다. 조정의 불교정책에 좀 더 적극적인 승려 세력은 이를 기회로 불교진흥을 꾀했을 수도 있겠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고 승려 개인이나 일부의 입신출세에 활용되었을 이다.

306p

변란을 일으킨 세력은 청주성을 함락하고 한양으로 북상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런데 변란에 대처하는 영조의 태도는 이전의 왕들과는 달랐다. 영조는 도성 외곽의 산성으로 피신하라는 대신들의 권유를 물리치고 도성을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인다.

317p

돌과 벽돌을 섞어 쌓음으로써 성벽의 견고함도 높였다. 이처럼 주변에 피난성인 산성을 따로 마련하지 않고 읍성 자체에 강력한 방어시설을 구축함으로써 수원 신읍은 읍성과 산성의 기능을 동시에 갖춘 복합적인 성곽도시로 탄생했다.

 정조는 수원 신읍을 상업도시이자 자급자족의 농업지역으로 육성하고자 했다. 신읍 주변에 국영농장인 둔전을 개간해 군인들이 군사 업무를 맡으면서 농사를 짓도록 했다.


<오류>

110p

고려 전기 성종에 이어 목종이 즉위하자 성종의 왕비이자 목종의 생모인 현애왕후가 섭정을 하게 된다. 

-> 현애왕후가 아니라 헌애왕후이다. 그녀는 성종의 왕비가 아니라 성종의 여동생이고, 전 왕인 경종의 왕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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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최고의 금석문 포항 중성리비와 냉수리비 한국고대사 학술총서 1
이기동 외 지음 / 주류성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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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학술서에 꽂혀 어려운 책들만 계속 보고 있다.

다시 한 번 느낀 바지만, 역시 이런 학술서는 내가 읽을 수준이 못 된다.

이번에는 한자가 없어서 그나마 좀 편하게 읽긴 했지만 학자들 사이에서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들이라, 나 같은 비전공자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인터넷을 검색해 봐도 포항 중성리비에 대한 명확한 내용이 없는 게 의아했는데, 여전히 논쟁 중이라 그런 듯하다.

오죽하면 마지막에 방청객으로 나온 포항시 문화재 관련자가 비문의 내용을 학자들이 정리해서 확실하게 알려달라고 했을까.

정말 공감이 가는 부탁이었다.

중국식 한문이 완전히 도입되기 전이라 당시 신라에서 한자라는 문자를 이용해 우리말을 어떻게 기록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므로 해석하는데 의견이 분분한 것 같다.

비문에 새겨진 몇 글자도 확실치 않아 연대 비정도 각기 다르다.

신사년이라는 간지가 몇 년도에 해당하냐는 것이다.

대체적으로는 501년으로 되어 있는데, 근거가 지절로 갈문왕이 바로 지증왕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그런데 인터넷 기사를 찾아보니 최근 只 가 中 으로 확정되어, 지절로가 아닌 중절로가 되므로 지도로 등으로 불린 지증왕과는 상관이 없게 됐다.

그렇다면 이 비문은 60년 전의 신사년, 즉 441년이 되는 셈이다.

냉수리 비문이 503년인데 훨씬 초기의 한문 구성을 보이는 중성리비가 바로 2년 전인 501년일 수 없다는 주장도 나와 있다.

아무래도 훨씬 연대가 떨어진 441년이 맞지 않을까 싶다.

또 논란이 되는 것은, 두지 사간지 궁과 일부지 궁이 작민, 즉 소작민을 모단벌훼로부터 뺏어가 소송을 했더니 중앙에서 다시 돌려주라고 판결을 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발표자 중에는 정반대로 모단벌훼의 작민을 두지사간지궁에 돌려달라고, 간단히 말해 원고와 피고를 정반대로 해석하기도 하고 작민을 소작하는 백성이 아닌, 인명으로 보기도 해, 뭘 돌려달라는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심지어 여중죄, 즉 판결에 반하는 사람에게는 추가로 죄를 묻겠다고 하는데 누구한테 죄를 물을지도 각기 다르다.

한자 해석만 해도 어려운데 학자들마다 해석하는 내용이 이렇게 다르니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백제가 마한, 즉 전남 지역을 언제부터 실효지배 했는가에 대한 논쟁과 비슷한 논란 같다.

이 책에서도 신라가 진한 12국을 언제 병합했는지 시기 문제가 잠깐 나온다.

사료에는 훨씬 빨리 병합했는데 실제 고고학적 증거는 후대까지 독자적인 고분 양식 등이 남아있어 완전한 복속이 아닌 영향력 행사 정도로 본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심도있게 다뤄지지는 않고 대략 6세기에는 경상도 유역을 실제 지배한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백제의 마한 복속과 비슷한 시기 같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후에 비로소 3국이 한반도에 완전히 정착한 모양이다.

내 수준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학자들이 논거를 가지고 토론하는 내용이라 신라 초기 사회를 이해하는데 대략적인 개념은 갖게 됐다.


<인상깊은 구절>

134p

<봉평리비> <냉수리비> 발견 전에 왕과 왕제, 또는 매금왕과 갈문왕을 다른 세력으로 본 점에는 큰 의의가 있다. 다만 매금왕과 갈문왕의 위상 차이가 있는 '2부 2왕 중심의 6부체제'로 수정해 보는 편이 설득력이 높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부체제적 정치운영은 사탁부 지도로 갈문왕의 집권 이후 사탁부 우위로 전환되다가 점차 집권화로 이행되어 갔다. 그렇지만 집권화와 부체제의 해체가 동시에 이행된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봉평리비>에서 최상위관등은 사탁부가 독점하지만 탁부, 사탁부의 인원 배분은 대체로 균등하다는 점은 지도로 갈문왕을 낳은 사탁부 인물들을 중심으로 집권화를 모색했지만, 법제적으로는 부체제적 정치운영을 한동안 유지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184p

신라 중앙의 정보전달을 문자로 표현하는데 있어, 냉수리비는 '敎'라는 문자를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고, 이는 봉평리비와 그 이후의 비에도 적용된다. 그런데 중성리비는 중앙의 정보전달을 '敎' '云' '口' 등 매우 다양한 문자를 사용해 표현하고 있다. 이는 중성리비 단계에는 아직 문자를 권력표출 의지가 냉수리비보다 상대적으로 약했음을 의미한다. 중성리비의 이러한 문장 작성 방식이나 어휘 사용 방식 등으로 볼 때, 중성리비는 냉수리비보다 2~3년이 아니라 훨씬 이전에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냉수리비로 알 수 있지만, 신라에는 503년 이전에 이미 '前世二王 의 敎 '가 있었다. 503년 단계에 절거리의 사망을 걱정해 재물의 상속방법까지도 별교로 내린 걸 보면, 냉수리비에 기록된 '前世'의 시점은 적어도 한 세대 이상 올라간다고 생각된다. 이는 신라에서 교를 문자로 기록한 시점이 441년 무렵으로 올라갈 수 있음을 암시한다.

307p

출토유물로만 본다면 고구려적인 요소나 경주 왕경과 관련된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단언적으로 고구려의 묘제가 흥해 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냉수리를 거쳐서 경주로 들어간 것인지 안 들어간 것인지에 대해서 확실히 답해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여튼 흥해 지역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집단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원삼국시대의 그런 세력자들이 삼국시대 초기 정도, 5세기 이후가 되면 경주의 영향을 거의 직접적으로 받는 단계에 들어가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묘제들이 어떻게 들어왔는지, 경주의 석실묘가 어느 경로를 거쳐서 왔는지, 낙동강 쪽에서 들어왔는지 아니면 고구려식의 영향을 받았다든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연구를 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336p

진한 시기 흥해의 다벌국이 포항 영일만 지역의 서라벌에 복속한 근기국과 함께 신라 왕국 성립 발전에 국방과 재정의 직할지로서 역사적 역할을 하게 되어 그 과정의 중요한 산물이 6세기 초의 신라 最古 금석문인 중성리비와 냉수리비였음을 인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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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폴란드사
김용덕 지음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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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지루하지 않고 쉽게 잘 읽힌다.

폴란드라는 나라 자체가 생소하다 보니 겨우 퀴리 부인이나 쇼팽, 코페르니쿠스 정도 생각날까 그 외에는 아무런 이미지도 없는 나라인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폴란드, 천 년의 예술> 이라는 전시회에서 얀 마테이코의 대형 역사화를 보면서 관심이 생기게 됐다.

러시아 미술사에 대한 관심도, 한가람 미술관에서 봤던 러시아 이동파 전시회부터였으니 이런 순회 전시가 확실히 문화의 저변 확대에 많은 도움이 되는 듯하다.

폴란드는 동유럽의 넓은 평원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로, 러시아와 스웨덴, 독일,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 등과 끊임없는 전쟁을 벌였고 급기야는 123년 동안 나라가 없어지기까지 했다.

퀴리 부인 전기에서 잠깐 봤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외세 지배가 있었는지는 미처 몰랐다.

1918년 1차 대전 후 독립했다고 하니 식민지 역사, 그것도 같은 유럽인에 의한 지배 역사가 이렇게 긴 줄은 몰랐다.

선거로 왕을 뽑는 전통도 독특하다.

신성로마제국만 선거후 제도가 있는 줄 알았는데, 폴란드도 왕을 대귀족들이 선거를 통해 뽑았고 이런 점이 절대왕정시대에 나라를 흔들리게 했을 것 같기도 하다.

요즘 같은 민주주의 시대의 선거와는 다른 개념인 것 같다.

폴란드가 독립 투쟁을 하던 18세기에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독립 전쟁에 참여해 훈장을 수여받은 장군들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미국에 동상도 있고 거리 이름도 이들을 기념하기 위해 붙여졌다고 한다.

도판이 많아 책이 예쁜데, 아쉽게도 대부분 모르는 그림들이었다.

전시회에서 봤던 얀 마테이코의 작품들만 일부 알아 봤다.

삼국분할 이후 1차 대전을 끝으로 폴란드가 독립하기까지, 또 2차 대전에서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아 나라가 폐허가 되고 소련에 영토를 뺏기고 공산주의화 되는 과정, 그리고 1980년대 이후 민주화까지 현대사가 매우 흥미롭다.

누군가 폴란드의 역사와 한반도가 비슷하다고 하더니만, 과연 이 민족도 독일과 러시아, 오스트리아라는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때로는 모스크바까지 점령한 화려한 시절도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외세에 의해 시달림을 많이 받았던 듯하다.

저자가 폴란드사를 전공한 분이라 그런지 폴란드가 오늘날 민주공화국이 되기까지 수많은 투쟁 과정이 애정어린 눈으로 잘 그려져 영웅들과 민중의 항쟁을 읽을 때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2010년 카티인 숲 학살 현장 방문 도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관료들이 전원 사망했던 보도는 나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인상깊은 구절>

286p

나폴레옹이 만들고 포니아토프스키가 지켜낸 바르샤바공국은 이후 1815년에 세워지는 폴란드 왕국과 같이 변형된 형태로 계속 이어지며 삼국분할이 끝날 때까지 폴란드 국체의 일부분으로 존속했습니다. 바르샤바공국이 1809년에 벌어진 전쟁에서 패배하여 사라졌거나 아니면 폴란드왕국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11월봉기와 같은 역사적 기회는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포니아스토프스키는 조국이 패망한 암울한 시기에 당대 유럽 최고의 엘리트들과 교류하고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릴 줄 알며 애국자란 이런 것이다 하는 본보기를 보여준 영웅이었습니다. 게다가 일개 사병들과도 허물없이 지내던 뛰어난 재능을 자랑하던 귀족이자 군인 그리고 정치인이었던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는 조국에 영광을 가져다주고 절망에 빠진 폴란드 민족의 사기를 진작시키며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게 해준 바로 그런 위인이었던 것입니다.

306p

당시 많은 폴란드인들이 공동의 적인 오스트리아에 맞서 싸우기 위해 서둘러 헝가리로 달려갔습니다. 도착한 폴란드인들은 헝가리 군대 산하에 폴란드군단을 창설했습니다. 폴란드 장군인 유제프 벰이 헝가리 독립 운동에서 명성을 떨치며 탁월한 지휘관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줬습니다. 한번은 오스트리아 군대가 헝가리 대포를 포획하는 장면을 보게 된 벰 장군이 말을 타고 혼자서 적진을 향해 내달리며 다음과 같이 독일어로 외쳤다고 합니다. "이 개만도 못한 놈들아, 저리 비켜라. 이 대포는 내꺼다." 말채찍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장군을 본 오스트리아 군인들이 너무 놀라 유제프 벰이 자신들의 진영을 관통하는 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만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총알 하나가 벰 장군의 손을 맞추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부상당한 손가락을 가위로 자른 뒤 벰 장군은 전투를 계속 지휘했습니다. 헝가리 군대가 대승을 거둔 것은 물론입니다. 그래서 유제프 벰 장군은 조국 폴란드에서뿐만 아니라 헝가리에서도 존경받는 영웅이 된 것입니다.

(위대한 지도자들은 범인과는 다른 불굴의 용기와 카리스마와 넘치는 애국심이 있는 것 같다. 마치 백 척이 넘는 일본의 군함 속을 겨우 12척의 배를 이끌고 가장 앞장 서 돌파한 이순신 장군의 일화를 보는 것 같다.)


<오류>

268p

1975년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프로이센이 세 번째로 폴란드를 분할했습니다.

-> 1975년이 아니라 1795년이다.

432p

1999년 2월 6일에 마침내 56명으로 구성된 정부 대표단과 자유노조를 포함한 재야 대표단이 원탁회의에 마주보고 앉았습니다.

-> 1999년이 아니라 1989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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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음의 과학 - 세계적 사상가 4인의 신의 존재에 대한 탐구
리처드 도킨스 외 지음, 김명주 옮김, 장대익 해제 / 김영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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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리처드 도킨스 덕분이다.

<만들어진 신>을 읽고 기독교를 버렸던 것 같다.

지금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더 정확히는 지구 6000년 설을 믿고 있는 근본주의자인 엄마 때문에 편안한 무신론자가 되지 못하고 내 신념을 지지해 줄 책들을 열심히 읽고 있다.

네 사람의 유명 지식인들이 등장하는데 도킨스의 책만 읽어 봤다.

다른 세 명의 저작들도 곧 읽어 볼 생각이다.

어려워 보이는 제목과는 달리 내용은 아주 평이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네 명이 모여서 편안하게 대화한 내용을 엮은 일종의 대담집이기 때문이다.

유튜브에도 영상이 올라와 있다고 한다.

도킨스의 견해에 가장 동의해서 제일 많이 옮겨 적었다.

우주 그 자체가 너무나 경이롭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존재 따위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종교의 대안으로 인류가 이룩한 문화적 유산은 어떨까?

어떤 책에서 종교가 사라진 현대인들에게 미술관은 교회의 역할을 한다는 글귀를 봤다.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말이 정말로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앞서 읽은 인류학 저서들에 따르면 우리는 숲에서 벗어나 사바나로 진출하면서, 또 아프리카를 탈출해 유라시아 대륙으로 뻗어나가면서 집단을 이루어 포식자와 추위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했다.

이 사회성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우리가 도덕이라고 부르는 기본적인 사회규범이 진화해 왔다고 한다.

종교심도 이런 마음의 진화 내지는 사회성 중 일부일 것 같다.

그렇다면 종교는 인간의 한 본성이므로 사라지지 않을 것 같고 지금처럼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을 끼치지만 않으면 될텐데, 여전히 갈 길이 멀다.

혼자 믿음을 간직하고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면 그저 개인의 가치관 정도로 생각될 수 있을텐데, 전도라는 이름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믿음을 강요하고 더 나아가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드는 게 문제인 것 같다.

특히 창조론을 가르치자는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이나 신의 이름으로 폭탄 테러를 자행하는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이런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엄마와 논쟁을 벌일 때마다 항상 답답했던 점이, 모든 것이 다 성경에 나와 있는데 왜 안 믿냐는 것이다.

성경에 쓰여 있다는 게 바로 근거이다.

이러니 토론이 될 수가 없고 종교는 합리적인 사고의 대상이 아니라 막연하면서도 절대적인 교조적 신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는 과학적 사고방식과 함께 갈 수가 없는데 성경은 과학이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코메디 같다.

과학은 오만하다, 과학이 다 설명할 수 없다고 하지만, 오히려 도킨스에 따르면 과학이야 말로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매우 겸손한 집단이다.

그리고 인간이 우주의 생성 원리에 대해 다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대로 초자연적인 존재의 증거가 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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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폭력의 기원 - 폭력의 동물적 기원을 탐구하다
야마기와 주이치 지음, 한승동 옮김 / 곰출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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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디자인이 참 예쁘다.

"인간 폭력의 기원" 이 과연 무엇인지 시원하게 밝혀 줄거라 기대했는데 솔직히 원하는 답을 찾지 못했다.

역자가 마지막에 정리한 바에 따르면, 유인원들은 폭력을 행사하긴 하지만 인간처럼 대량 학살은 자행하지 않고, 우리가 이런 대규모의 무자비한 폭력을 저지르는 원인은, 지켜야 할 자산이 많은 농경 사회의 출현, 그리고 언어를 통해 본 적도 없는 조상들로까지 정체성을 확대시켜 급기야 오늘날의 민족이니 국가를 만들어 낸 사회성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앞서 읽은 <호모 사피엔스, 그 성공의 비밀> 에서도 인간의 독특한 본능인 문화적 속성과 사회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고릴라를 연구하는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대형 유인원들 역시 사회를 이루고 있으나 인간처럼 집단을 이루면서 짝 생활, 즉 가족을 형성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집단으로 모여 사는 이유는 포식자로부터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다.

오랑우탄은 단혼제로 암컷과 수컷의 체격이 거의 비슷해 무리를 이루지 않고 가족끼리 살아간다.

침팬지와 고릴라는 수컷이 훨씬 큰데 암컷은 핵심 수컷들의 무리에서 보호를 받고 교미 상대가 되어 아이를 키운다.

단 한 명의 암컷과 수컷이 교미하지 않고 여러 명과 교미를 하는데 인간처럼 가족을 이루지 않는다.

다만 아이를 키워주는 친밀도 있는 사람과는 성년이 되어서도 교미하지 않는다.

이 부분이 참 인상적이었다.

근친상간의 터부는 비단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영장류 사회에서도 자신을 키워 준 어미하고는 자녀가 교미하지 않는다.

단 아비가 자녀 양육에 참여하지 않으면 딸과 교미하게 된다.

인간 역시 가족을 이룰 때 교미할 수 있는 상대는 오직 배우자 뿐이다.

아버지와 딸, 혹은 어머니와 아들, 숙부와 조카, 조부와 손녀 등은 절대적으로 성관계가 금지된다.

이런 근친상간의 터부 덕분에 인간은 가족을 이루고 평화롭게 공동육아를 시행하면서 집단을 이룰 수 있게 됐다.

유전적으로도 열성 형질을 피하기 위해 근친상간의 회피가 종 번식에 이득이 된다.

수컷의 새끼 살해도 인상적이었다.

아이를 키울 때는 암컷이 발정하지 않기 때문에 교미 상대가 부족하게 되면 수컷은 새끼를 죽여 버리고 암컷을 차지한다.

보노보의 경우는 육아 기간에 임신을 하지 못하지만 발정은 빨리 가능해짐으로써 새끼 살해를 피한다고 한다.

섹스가 단순히 쾌락의 차원이 아니라 매우 핵심적인 본능이고 오히려 모성애나 부성애가 이차적으로 만들어진 감정 같다.

유인원들은 집단을 이루어 먹이를 나눠 줌으로써 함께 공감하고 협력한다.

앞서 읽은 책에서도 인간이 사회를 이루는 중요한 속성 중 하나가 바로 고기의 공유였다.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생물의 궁극적 생존 목적은 먹이와 성행위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고 사회성 역시 인간의 중요한 본능임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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