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약으로 보는 세계사 강의 - 화해와 배신, 강압과 화합이 만든 결정적 순간들
함규진 지음 / 제3의공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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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재밌게 읽은 책이다.

조약이라고 해서 지루할까 봐 걱정했는데 세계사가 결국 합의를 통한 조약의 연속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특히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의 근현대사 조약들의 의미를 짚어 보고 당시 세계 정세를 설명해 주는 방식이 역사 이해에 도움이 많이 됐다.

핵확산금지 조약이나 남극 조약 같은 최근 이슈들도 같이 있어 흥미롭다.

다만 서독이 1970년대 동독과 기본 조약을 맺고 90년대에 통일에 성공한 반면 남한과 북한은 왜 동방 정책의 성공을 이어가지 못할까에 대한 분석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저자는 단순히 한국의 정치 상황이 정당의 합의가 아닌 행정부의 일방적인 밀어부치기 식이라 기존 정책이 정권 변화에 따라 왔다갔다 해서라고 설명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북한 정권이 전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세습 왕조이기 때문이라 본다.

북한은 동독의 정치 환경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극단적인 체제라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어서 아쉽다.


<인상깊은 구절>

126p

정묘호란 이후 양국은 각자의 강역을 지켜나가며 평화 공존을 유지했다. 청이 조선을 힘으로 정복하려면 못할 것도 없지만 결코 쉬운 상대도 아닐뿐더러, 조선이 먼저 공격해오지 않는 한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사대의 틀에서 조공을 받되 조선의 정치나 체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명나라 방식을 그대로 이어받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136p

법조문을 엄격히 준수하는 일은 선량한 시민의 중대한 의무다. 하지만 가장 중대한 의무는 아니다. 법률 문구에 집착하느라 조국의 파멸을 불러온다면 그것은 법 자체를 파멸시키는 일이다. 즉, 수단 때문에 목적을 희생하는 일이다.

138p

나폴레옹이 300년을 넘길 리가 없다고 비웃었던 이 체제는 빠른 결단과 필요한 물자의 신속한 동원이 장기인 독재 체제에 비해 전쟁과 정복에는 서투를지 몰라도, 협상과 조역을 통해 내실 있고 장기적인 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146p

그러나 실제로 도광제가 그토록 비통해했는지, 정말 중국 군민은 일부 부패한 정치인을 제외하고는 일치단결하여 영국 침략지에게 맞섰는지는 의문이다. 그 당시 중국은 서구적 방식으로 틀이 잡힌 지금의 세계와는 생활문화, 사고방식, 정치철학, 군사기술에 이르기까지 온갖 면에서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부패하거나 낙후되었다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동떨어짐이었다.

149p

영국을 상대하는 청나라가 믿을 만한 것은 먼 거리와 많은 인구뿐이었다.

158p

중화의 천명을 얻은 오랑캐 왕조는 예외 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 문명에 굴복하고 흡수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아주 먼 곳에서 온 낯선 백인들은, 중국인들이 보기에는 외계인이나 다름없을 서양인들은 더 이상 중화도 오랑캐도 없다고 못을 박았다. 세상에는 베스트팔렌 조약의 원칙에 따라 모두 동등한 주권을 가진 국가들이 있을 뿐이다.

185p

당시 조선은 '서양 문물은 백해무익하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굳어져 있었고, 사대부는 물론 거의 모든 백성들이 이런 생각에 공감했다. 그런 마당에 개방을 추진한다면 엄청난 반발이 일어나고 반대파에게 절호의 기회를 줄 게 뻔했다. 따라서 세도정치 세력과 싸워온 대원군은 더더욱 쇄국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의 경험은 그에게 主和는 매국이라는 신념을 더욱 굳게 했다. 

213p

특히 미군, 영국군 포로에 대한 일본군의 가혹 행위와 소련군 포로에 대한 독일군의 가혹 행위가 유명했는데 (그 사실 및 소문은 그만큰 '복수'를 유발했다), 전쟁이 총력전이 되면서 포로까지 챙겨줄 여유가 없어진 데가 이데올로기가 적군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사고방식을 퍼뜨렸기 때문이다. 민간인에 대한 유례없는 가혹 행위 역시 세계인들을 경악시켰다. 이에 따라 '전쟁범죄'라는 개념이 주목받았다.

230p

이 명백한 차별 대우에 격분한 오를란도는 회담장에서 퇴장해버렸다. 이는 훗날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서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불씨가 된다. 일본도 자국의 요구가 거절되자 회담을 거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윌슨이 마지못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자, 이번에는 중국이 반발하며 회담장을 떠났다. ... 이로써 다수의 독일계 주민이 졸지에 외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현실주의가 민족자결주의에 거둔 이 승리의 후유증으로 독일의 나치스 집권이 가능해진다. 이상이든 평화든 간에 자신들이 지나치게 가혹한 대가를 강요받았다고 여긴 독일인들 사이에서 점차 나치즘이 싹텄다.

250p

왜 체임벌린과 달라디에는 그토록 멍청한 실수를 저지른 것일까?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신중한 계산의 결과였다는 주장은 먼저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국민들의 전쟁 기피 성향이 상상 이사응로 높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 히틀러에 대한 경계심도 키운 두 나라의 지도자들은 필요하면 소련과 임시로 손을 잡더라도 히틀러를 없애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전쟁은 불가피해졌으며, 제3제국의 패망과 독일의 분단도 피치 못할 운명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 뮌헨 협정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유화정책의 비극으로 곧잘 거론된다. '불량국가와 타협해서는 안 되니다'는 주장의 근거로 언급된다. 하지만 히틀러가 뮌헨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소련의 그림자 때문이었다. 약간 다른 맥락이지만, 등 뒤를 받쳐 주던 소련이 사라진 다음 이라크가 어떻게 되었는지, 만약 지금 중국이 없다면 북한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국제정치의 셈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외교적 결정에 오판은 있을지 몰라도, 어리석음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상황의 진실과 상대의 진의를 섣불리 판단하고 상대는 어리석을 따름이라고 보는 정채 결정자가 있다면, 곧 자신이야말로 어리석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270p

과도한 군비경쟁이 소련 경제를 장기적으로 거덜 내는 바람에 동쪽 진영이 제풀에 주저앉았다. 뒤늦게 이를 극복하고자 군비 축소와 경제 회생을 추진했던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오히려 혼란과 반발만 가져와 소련의 명을 더 단축시키고 말았다.

274p

최근 미 국방부에서는 "유사시에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동맹은 ANZUS이고, 그 다음이 나토"라는 보고서를 내놓아 한국과 일본, 필리핀 등은 신뢰도가 낮은 동맹 대상임을 고백하기도 했다. 미국이 안주스를 가장 신뢰하면서 그 범위를 한국, 일본, 대만 등까지 확대하지 않은 까닭은 '똑같이 영어를 사용하는 신대륙 국가이며 서구 문명의 일원'이라는 유대감도 얼마간 작용했을 것이다. 다만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동맹을 맺길 권유하고, 그리하여 안주스와 비슷한 동북아 삼각동맹 체제 수립을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한일 간으 뿌리 깊은 적대감이 그런 가능성을 차단했다. 결국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안보 동맹 체제는 안주스 외에 한미 동맹, 미일 동맹 등 개별 동맹의 집합으로만 이루어져 오늘날 아시아가 유럽처럼 하나의 연합체를 이루지 못하고 각자 제 갈 길을 가게 된 한 원인이 되었다. ... 이미 1951년 초, 미국 정부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군사 개입 자체가 실수였다'는 인식 아래 하루바삐 전쟁을 끝내고 철수하려고 휴전협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의 세계 전략상 한국은 애써 지킬 필요가 없는 변방 중의 변방인데, 국지전으로 시작한 전쟁이 이미 중국을 끌어들였고 소련도 실질적으로 개입하고 있어서 자칫하면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 이렇게 되자 당시 한국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노심초사했다. 남한의 전력이라곤 사실상 제로에 가까운데, 미국이 물러난다면 당장에라도 북한과 중국이 밀고 내려와 한반도를 적화통일할 것이 아닌가? ... 안주스 예를 따라 안보 동맹 조약을 맺고, 휴전 후에도 여차하면 다시 한국을 돕겠다는 약속을 한다. 이승만도 그에 만족하고, 휴전협정 체결 후인 1953년 8월 8일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다. ... 주한 미군의 법적 근거를 마련한 이 내용은 안주스 조약이 동등한 국가 간의 안보 동맹인 데 반해, 한미 동맹은 미국이 한국을 보호하는 형태의 동맹이라는 본질적 차이를 나타내준다. ... 이승만은 자동 개입 조항이 없는 점과 제6조에 일방적으로 동맹을 파기할 가능성을 열어 둔 점이 끝내 못마땅해 끝까지 재고를 요청했지만, 미국은 안주스나 필리핀과의 동맹을 예로 들며 입장을 관철시켰다. 어쩔 수 없이 한국에 발목을 잡혔지만, 공연히 연루될 가능성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410p

영국 정부는 국민의 뜻을 받아들여 탈퇴하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왜 피 같은 세금을 써서 무슬림 난민들을 돌봐주고, 그리스나 스페인 같은 나라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줘야 하느냐'는, 상식적인(베스트팔렌 조약 체제에서의 상식이겠지만) 의문이 끝내 EU 잔류로 기대되는 여러 가지 경제적, 정치적 과실을 무시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430p

자동차나 쇠고기 등에서 한국에 너무 많이 양보했다는 비판론자부터 북한의 강경한 태도와 남한의 반미 열풍을 한데 엮어 한국과는 상종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외치는 일부 우파 정치인들까지 부시 행정부를 곤혹스럽게 했다. 그러다가 2006년 10월 9일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자 미 의회 내 '네오콘'들을 중심으로 FTA 회담을 그만두고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472p

제2차 세계대전 등에서 여성이 당한 성적 착취에 대해 국제적 관심이 고조되었음을 배경으로 했다. 그 이전에는? 비록 강제적이었더라도 '정조를 잃은 여인'을 좋지 않게 보는 문화 속에서, 조용히 설움을 삭여야 했던 나날이 수십 년 동안 이어졌다.


<오류>

21p

기원전 15세기에서 기원전 11세기까지 '신왕국 시대'에는 

->신왕국 시대는 기원전 1570~1070년까지로 기원전 16세기부터다.

18왕조의 세티 1세 때에는 아나톨리아까지 진출할 수 있는 요충지인 카데시를 손에 넣었다.

->세티 1세는 람세스 2세의 아버지로 19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이다.

22p

도판에 기원전 2세기 히타이트 제국 지도로 나와 있는데, 기원전 13세기가 맞을 것 같다.

105p

미국이 포함으로 일본을 개항시킨 가나가와 협정(1853년)

->페리 제독이 일본에 온 것이 1853년이고 미일화친조약인 가나가와 협정은 그 다음 해 1854년에 맺어졌다.

133p

나폴레옹은 처남인 샤를 르 클레르에게 2만 5천 명의 병력을 주어 생 도맹그로 보냈으나

->샤를 르 클레르는 나폴레옹의 여동생인 폴린 보나파르트의 남편으로 나폴레옹의 처남이 아니라 매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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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술가 - 인물로 보는 한국미술사 서울대박물관 수요교양강좌 시리즈 1
안휘준 외 지음 / 사회평론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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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수요강좌라는 프로그램에서 일반인 상대로 강연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모양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1995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직장 때문에 이런 좋은 강좌를 한번도 들은 적이 없어 아쉽다.

강사들 면면이 화려하다.

현역 서울대 교수들이 일반인 대상으로 이런 격조높은 강연을 무료로 진행하다니, 정말 의미있는 일 같다.

너무 오래 전에 나온 책이라 도판이나 편집 상태가 조악한 점이 아쉽다.

산수화는 거의 제대로 감상하기가 어렵고 색이 들어간 수묵담채화나 뒷부분에 실린 현대 화가들의 작품은 볼만 하다.

내용 자체는 아주 알차고 유익하다.

우리 역사에 남을 유명화가들이라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다시금 무한한 관심과 애정이 생긴다.

정선과 김홍도는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작품이 너무 익숙해 별 감흥이 없었는데 책에 실린 도판들을 보면서 얼마나 위대한 화가인지 새삼 느꼈다.

정선의 산수화는 과연 관념산수화와 진경산수화가 무엇이 다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만큼 독창적이고 개성있고 김홍도는 못하는 주제가 뭐였나 싶을 정도로 온갖 방면에 능력을 발휘했던 듯 하다.

그림과 한시가 어우러진 수묵화가 비록 제대로 이해는 못하지만 보는 즐거움이 크다.

조희룡의 화려한 매화 그림이나 서옥도 등도 매우 감각적이다.

현대 화가 편에 실린 김환기와 장욱진 그림도 무척 인상깊게 봤다.


<인상깊은 구절>

91p

술을 좋아하는 활달하고 파격적인 일면을 지녔다는 점에서 최북이나 장승업과 비교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김명국은 두 사람처럼 기행과 일탈적 행위를 일삼지 않았으며 60평생 동안 화원이라는 직분을 잊지 않고 도화서라는 제도 안에서 국가의 일정한 회화 업무를 묵묵히 담당하였다는 점에서 다르다.

98p

공재도 격물치지게 있어서 마음 밖에 별도의 理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을 기반으로 하여 바깥 세계의 사물을 실제로 경험하고 증명함으로써 실제적인 이해를 추구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성리학과 예론은 물론 천문, 지리, 의약, 음악, 패관소설, 병서, 공장, 기교 등 다방면에 걸쳐 학식을 넓히게 되었다. 이는 마음 수양에 중점을 두고 있던 당시 성리학의 일반적 학문 경향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형상과 같은 이는 공재의 학문에 대해 그 번잡함을 경계하면서 비판과 충고를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공재 학문의 근간을 이루는 격물치지론은 모든 학문의 출발점이자 방법론으로서 근대적인 사고를 형성하는 중요한 인식론이었다.

138p

조선 후기에 갑자기 윤두서, 정선, 조영석, 심사정, 이인상, 강세황 등 기라성 같은 선비화가들이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서화에 대한 선비 계층의 적극적인 참여와 후원은 조선 후기 화단이 풍성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 이것은 17세기까지 조선화단을 장악하였던 최고의 화가들이 김명국과 이징 같은 직업화가들이었다는 사실과 대비된다. 조선 후기의 선비들은 이전의 직업화가들이 그린 기교가 넘치고 격조가 떨어지는 그림 대신에 선비 특유의 아담한 정취와 예술적 품위가 드러난 그림을 만들어내고자 하였다. 그 과정에서 당시 새로운 자료를 통하여 배울 수 있게 된 중국의 문인화풍에 관심을 가졌다.

174p

심사정은 조선 후기 남종산수화를 이끌었던 문인화가로서 당시 문인들이나 감식가들로부터 "그림에 '아치', '운치', '고상함'이 있으며, 우리나라 천 년간에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현재 그에 대한 평가는 좀 다른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심사정을 중국적 색채가 짙은 화가로 말하고 있다. 그 말의 의미가 조선의 경치나 인물이 아닌 것을 그렸다는 뜻이라면 조선시대의 많은 작품들, 심지어 정선의 작품조차도 중국적 냄새를 풍긴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심사정에 대한 당시의 높은 평가는 그가 추구했던 회화의 세계가 그 시대의 미적 기준과 일치했으며, 그 가치가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210p

강세황은 문인화의 보편적 가치를 이상으로 삼아 한국적 문인화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였다. 일생 문인화의 본질을 추구한 그 자리에 조용하고 담담하며 고상한 강세황 개인의 문인화가 뿌리내렸다. 그의 그림에 나타난 맑고 담박하며 상쾌하고 시원한 기운은 바로 한국적 '담박,소쇄'로서 그가 본보기로 삼았던 중국 문인화의 그것과 차별성을 가진다. 이러한 차이는 일차적으로 공간 구성, 붓과 먹의 사용, 채색의 성질 등 그가 구사한 개성적 양식에서 오는 것이며, 그 그원은 그의 체질인 한국적 미감에 닿아 있다. 

254p

회화와 같은 예술세계는 산림처사나 고관대작의 일상과는 별개의 것으로 그것을 담당하는 인물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그림이 사대부 문화의 한가한 취미로 취급되고 독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반발하여 회화예술의 독자적 의의를 강조한 것이다.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은 예술세계에 몰입하는 전문학의 견해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조희룡의 예술관은 당시 문인들의 회화관과는 크게 구별되는 독특한 것으로, 그의 화풍의 변화과정과도 유사한 흐름을 보인다. ... 이는 예술의 효용을 인격을 수양하거나 학문을 닦는 데에 두었던 유교적인 예술관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 것이다.

355p

이들 세대들은 주로 화면에서 서양과 대비되는 동양의 집단적인 정체성을 표현하려고 노력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그 이후의 세대들이 집단적인 정체성보다는 개개인의 정체성 탐구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과 대조가 된다. 김환기의 경우 자연에 대한 그의 남다른 애정은 한국의 산과 달, 바람, 구름, 나무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그의 일기에 나타나 있다. "나는 외롭지 않다. 나는 별들과 함께 있기에..."

376p

마치 수묵산수화를 보는 듯한 이 작품은 고고한 모습으로 선비의 품격을 상징하는 학이나 초막의 인물, 강이 등장해 도상학적으로나 작가적 심상으로나 전통적인 문인화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장욱진의 태도는 그림 그리기를 일종의 취미로 인식하였떤 문인들의 태도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는 양식적인 면에서 문인화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태도에 있어서는 서구식의 작가 개념에 해당하는 모더니스트였다. ... 서구의 새로운 사조에 빨리 적응하여 그들의 흐름에 동참하는 것이 한국의 미술을 세계화하는 지름길이라고 믿었던 시대에 장욱진의 동화적인 이상적인 세계는 과거를 따라는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었다. 또한 보통 300~400호의 거대한 작품과 영웅적인 태도가 대접을 받던 시대 속에서 장욱진의 '작고 예쁜' 그림들은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류>

169p

호응박토도 (胡鷹搏兎圖)

->오랑캐 胡가 아니라 호걸 豪가 맞지 않을까? 검색해 보니 두 가지 한자가 다 나오긴 하는데 豪가 맞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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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해 - 바이킹의 바다, 북유럽의 숨겨진 보석 KMI 세계의 바다 시리즈 1
김융희 외 지음 / 바다위의정원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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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독특한 형식의 책이다.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했을 때는 막연히 바이킹 이야기 내지는 발트해 연안 나라들의 역사 이야기인가 했다.

그런데 막상 실물을 받아보니 300 페이지 정도의 적은 분량이지만 도판이 정말 선명하고 여러 필자들이 모여 발트해의 역사와 각 나라들의 문화를 다양한 관점에서 풀어써 입체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The Ocean>이라는 잡지에서 발간한 책이라고 한다.

출판 양식이 너무 신선해 이런 책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막연히 발트해라고 하면 바이킹의 나라, 추운 북해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한자 동맹으로 대표되는 중계무역의 꽃이었다.

대서양 무역만 조명됐던지라 그 윗쪽에 이렇게 활발한 무역이 이루어졌는지 처음 알았다.

확실히 나도 서유럽 중심의 세계사를 배우긴 한 모양이다.

박물관 소개나 예테보리와 말뫼의 도시 재생 사업, 크루즈 여행 등도 역사 못지 않게 흥미로웠다.

도자기와 청어 요리 소개도 신선했다.

조용준씨의 유럽 도자기 여행을 참 재밌게 읽었는데 여기 실린 글은 그 책에서 그대로 가져와 다소 아쉽지만 너무나 매혹적인 북유럽 도자기 사진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잡지사에서 만든 책이라 그런가 도판이 정말 훌륭하다.


<인상깊은 구절>

82p

러시아산 곡물이 노동자의 가계에 가장 중요한 식비를 안정시켜 임금 상승의 동기를 지연함으로써 영국의 산업혁명이 순항할 수 있게 도운 셈이었다. ... 값싼 폴란드산 곡믈이 아니었다면 네덜란드는 더 많은 인력과 자본을 농업에 투입해야 했을 것이고, 러시아의 목재, 아마, 대마 없이 영국의 세계 항해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러시아의 수지, 곡물 등이 없었다면 영국의 산업혁명은 좀 더 지체됐을 것이다.

100p

1830년과 1848년에 프랑스 파리의 시민은 정부군을 무력으로 제압해서 혁명을 일으켰다. 이때만 해도 정부군과 봉기 시민의 무장에는 큰 격차가 없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는 1871년 파리코뮌이 보여주듯 봉기 세력이 아무리 용감하더라도 눈부시게 발달한 과학기술을 응용해 만든 첨단 무기로 무장한 정부군을 이길 수 없게 되었다. 시민이 군대를 무력으로 제압하던 시대는 지나갔지만, 이때의 군대는 용병대가 아니라 국민개병제 원칙에 따라 징집된 국민군이었다. 계기만 마련되면 국민군이 시민 편에 설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았다. 20세기 군대는 혁명 세력에게 제압이 아닌 회유의 대상이었다. 지난 300년 동안 그토록 굳건히 체제를 지켜온 군대가 1917년에는 오히려 체제를 무너뜨리는 혁명의 진앙이 되었다.

271p

르네상스 시대의 상인이 직물산업 위에 피렌체를 세웠듯이, 네덜란드는 16세기 말 상인 자본으로 청어산업 위에 근대국가를 세우고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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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23-07-16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마린님
이 책의 유일한 리뷰어인 마린님의 리뷰를 보니 호평 일색인데,,,,그냥 보기엔 오성도 충분한 것 같은데 왜 별은 스리스타인지 궁금해서요 ㅎㅎ 전체적인 호평에도 불구하고 책의 분량이 적어서 하나, 조용준씨 도자기 글이 재탕이어서 둘....그렇게 별 두개가 빠진건가요?? ㅎㅎㅎ 저는 처음에 별만 보고 좀 시시한 책이구나 했는데 마린님 리뷰를 읽어보니 구매욕이 급상승해서요 ㅎㅎㅎ
 
누가 이슬람을 지배하는가 - 세계사를 뒤흔든 중동의 거대한 바람
류광철 지음 / 말글빛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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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전직 외교관이라 현대 이슬람 정치에 대한 얘기인 줄 알았다.

지금은 교수로 있어서인지 이슬람의 역사와 십자군 운동에 대해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처음에는 간략한 이슬람 역사 얘기인가 하고 읽었는데 뒤로 갈수록 일목요연하게 이슬람의 시작부터 현재 IS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정리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이 책의 백미는 2부의 십자군 이야기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라는 만화 형식의 책에서 가볍게 맛본 게 전부였는데 이 책을 통해 200년에 걸친 십자군의 역사를 제대로 정리할 수 있었다.

마치 한 편의 소설을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서술해 정말 재밌게 읽었다.

왜 이슬람이 몰락하게 됐나에 대한 다소 편파적인 평가들이 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매우 성실하고 잘 정리된 책이라 하겠다.


<인상깊은 구절>

123p

전제정치는 코란의 기본 이념에 배치되는 정치형태였으며 대부분의 신민들은 가난했고 농경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공정한 관행에 시달렸다. 창시자 무함마드가 그렇게 강조했던 '평등과 정의'는 이미 이슬람 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68p

무함마드는 종교 세력을 약화시켜 사회를 세속화하기 위해 종교재단의 재산을 몰수하고 울라마의 영향력을 대폭 축소시켰다. 난을 피해 지하로 숨어든 울라마들은 서구식 개혁이라면 치를 떨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보다 보수화됨으로써 반 개혁에 앞장서는 세력이 되었다.

171p

리다는 샤리아의 개혁을 통해 현대화된 이슬람 국가의 창건을 주장했다. 리다는 학생들이 마드라사에서 법뿐만 아니라 인문과학, 사회과학 그리고 자연과학의 다양한 분야를 함께 연마할 것을 주창했다. 이러한 방식의 교육을 통해서만 농경사회의 규범으로 출발한 샤리아아 현대적으로 새로운 종교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프가니, 압두, 리다는 모두 투르크 족이 아랍으로부터 이슬람의 패권을 뺏어간 후부터 이슬람이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본인들의 의도와 관계없이 이들의 생각은 아랍 민족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76p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은 사우디의 이러한 형벌이 고루하고 부적절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사우디가 석유로 벌어들인 부를 왕족 위주로 분배함으로써 빈부격차를 조장하는 것이 오히려 더 코란의 이념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180p

종교의 원류를 막론하고 원리주의는 일정한 특성을 갖는다. 원리주의자는 절대 현실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대문명에 깊이 실망하며 현대적인 사회구조가 자신의 믿음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또한 세속적인 요소가 자신이 믿는 종교에 침투하여 언젠가는 종교를 말살해버릴 것이라는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 모든 원리주의자들은 자신의 투쟁이 생존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력을 다한다.

186p

일견 탈레반은 순수 이슬람사회를 구현한듯하나 자세히 보면 그렇지도 않다. ... 거의 모든 이슬람 원리주의가 코란과 선지자의 가르침을 준수하고 초기 움마 시대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목표와 현실은 딴판인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원리주의자들이 자신의 편의에 따라 코란과 선지자의 가르침을 왜곡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원리주의자들은 종교적 이상주의자라기보다 정치적 편의주의자들이라고 해야 더 맞는 말이 될 것이다. ...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를 정치에 이용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 현대사회가 정교분리 원칙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은 종교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로 인해 엄청난 소요와 분규, 살육, 희생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슬람은 지금 거꾸로 가고 있다. 1400년 전의 유목민사회, 농경사회에는 그 사회에 맞는 규범이 있어야 했고 현대사회에는 이 시대에 맞는 규범이 있어야 사회가 제대로 작동될 수 있다. ... 이슬람 행동주의는 결코 농민이나 빈민의 혁명이 아니라 엘리트들의 놀음인 것이다. 행동파들은 혁신에 반대하는 울라마들을 증오했다. 행동파가 지향하는 것은 이슬람이 서양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미국과 이스라엘을 중동에서 몰아내는 것, 그리고 이슬람의 막강한 영향력을 회

복하는 것 등이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혁명을 지향한다면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혁명'이 될 가능성이 높다.

290p

살라딘은 처음부터 재물이나 복수를 위해 예루살렘을 탈환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에게 예루살렘 회복은 신에 대한 의무이자 그의 신념이고 생의 목표였다. ... 살라딘의 관대함은 타고난 것이자 그의 신념이었다. 그는 불필요하게 피를 흘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 아크레 함락 후 살라딘과 리처드 1세의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났다. 리처드 1세는 이슬람 포로들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3천여 명의 군인과 가족들은 모두 살해되었다. 표면상의 이유는 살라딘이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앞으로 있을 작전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 리처드 1세는 전투의 선봉에 서서 손수 적을 베는 스타일이었으나 살라딘은 스타일이 달랐다. 살라딘도 전투가 벌어지면 화살이 빗발치는 선봉대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전투를 독려하는 용감한 지휘관이었으나 직접 싸움에 뛰어들어 적을 베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 피 흘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전쟁을 좋아하지 않은 그가 십자군과 오랫동안 싸울 수 있었던 것도 신앙의 힘이었다. ... 살라딘은 지하드를 위해 힘과 건강은 물론 재물까지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바쳤다. 살라딘은 재물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초연했다.


<오류>

69p

750년 마지막 칼리프 만수르 2세를 이라크에서 패퇴시킴으로써 마침내 우마이야드의 깃발을 쓰러뜨렸다.

->마지막 칼리프는 만수르가 아니라 마르완 2세다.

269p

2차 십자군은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왕비 엘레오노르 그리고 신성로마제국 황제 콘라트가 참전한 제왕 중심의 원정대였다.

->콘라트 3세는 정식으로 황제 관을 받지 못해 로마왕 혹은 독일왕이라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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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읽는 시간 - 명화 속에 숨겨진 비밀을 찾는 여행
일본박학클럽 지음, 조은아 옮김 / 라이프맵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인터넷에서 그림 검색하다가 참조 서적으로 우연히 발견하고 빌린 책이다.

대출 중이라 예약까지 하고 기다렸다 빌린 터라 기대가 컸는데 내용이 너무 가벼워 아쉽다.

장점은 훌륭한 도판이다.

저자가 일본박학클럽인 만큼 아무 주제도 없이 다양한 화가들 이야기를 두 세 페이지로 짧게 실은 책이다.

이렇게 가볍게도 책을 내는구나 놀랄 정도인데 그래도 그림 보는 즐거움이 있어서 다행이다.

일본에서 나온 책은 정말 역사서만 봐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인상 깊은 구절>

262p

렘브란트와 거의 동시대에 활약하던 페테르 파울 루벤스는 밑그림은 반드시 자신이 직접 그렸다. 그리고 그 밑그림을 주문한 사람에게 보여준 후, 요구 사항이 있으면 그에 맞춰 수정을 가해서, 주문한 사람의 의향을 최대한 존중했다. 다음으로 그 밑그림을 기본으로 하여 이를 확대하고 채색했다. 이 공정을 제자들에게 맡겼는데, 그저 맡겨두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신이 확인하고 밑그림대로 작업이 안 된 부분은 자신이 직접 손을 대서, 스스로 만족할 만한 작품으로 수정하여 완성했다. 반면에 렘브란트는 공방에 우수한 제자를 많이 두어서인지, 거의 작품에 개입하지 않고 서명만 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 결과 당시 렘브란트가 운영하던 공방은 최대 생산량을 자랑했지만, 렘브란트가 직접 그린 작품이나, 그가 손대지 않고 공방에서 그려진 작품이나 모두 '렘브란트의 작품'으로 유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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