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문화예술의 천년
이덕형 지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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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읽어야지 했던 책인데 결국 절판되버렸다.

책바다를 통해 구해 봤더니 무려 830페이지에 이르고 사이즈도 매우 커서 긴장했는데 생각보다 쉽게 잘 읽힌다.

철학적인 부분은 다 이해하지 못했고 가벼운 마음으로 러시아 문화예술의 기본적인 개념을 접했다.

간단히 말해 러시아는 동방과 서방 혹은 범신론과 기독교라는 이중신앙체계로 이루어진 사회였다.

범신론은 자연을 숭배하는 것으로 러시아의 거대한 국토 면적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10세기부터 동방정교를 받아들인 후 기독교가 사회의 근간이 되었으나 서구와는 달리 동양의 禪 적인 면을 중시하는 문화가 함께 어우러져 러시아만의 독특한 생활양식이 성립된 듯 하다.

러시아의 이콘을 보면 마치 우리의 불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서구의 르네상스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른데 이콘화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고 그 안에서 빛과 색을 통해 명상하고 신의 초월성을 관조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비언어성의 시각중심주의 문화라고 설명했다.

논리를 통해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 정의할 수 없는 신의 초월성을 빛과 색을 통해 직관적으로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동양의 선불교와 통하는 부분이 있다.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를 개혁하면서 동양성을 벗고 서구쪽으로 방향을 틀었던 배경이 이해된다.

러시아에서 봉건국가가 형성된 키예프 루시의 정체가 바로 스웨덴의 바이킹인가 하는 점이 흥미로웠다.

저자는 이 의견을 지지해 스칸디나비아에서 내려온 바이킹들이 이미 자리 잡고 있던 흑해 인근의 동슬라브인들과 결합해 세운 나라가 바로 러시아라는 것이다.

이 바이킹들은 무조건 남하한 것이 아니라 고대 수상 무역로인 강을 따라 내려와 터를 잡게 된다.

러시아인의 민족적 기원이 흥미로웠다.

책이 워낙 커서 도판도 정말 훌륭하다.

특히 러시아 그림들을 마음껏 볼 수 있어 눈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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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비 기록으로 만나다 고전탐독 8
이현주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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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비라는 주제는 너무 많이 알려져 있고 식상하지만, 여러 전공자들이 쓴 책이라 기대감을 갖고 읽게 됐다.

조선 왕실 가계도 시리즈를 출간했던 지두환씨는 역시나 실록과 행장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와 장렬왕후 편이 지루했다.

인물에 대해 평가하고 역사적 배경을 같이 기술해 주는 평전 식 서술이 흥미로웠다.

역사학자들이다 보니 한정된 자료로 많은 상상력을 발휘하기는 힘들지만, 대신 신뢰할 수 있는 인물평이다.

원경왕후와 며느리 소헌왕후의 결혼생활이 극명하게 대비되어 흥미로웠다.

이방원은 젊은 시절 과거에도 급제하고 아버지가 나라를 세우는데 앞장서고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기까지 오직 목표만을 위해 달려가느라 여색도 멀리하고 자신을 음으로 양으로 뒷바라지 해 준 아내 민씨와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며 무려 11명의 자녀를 낳았다.

여장부였던 원경왕후는 친정의 배경도 훌륭해 남자 형제들과 힘을 합쳐 남편을 왕위에 올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러나 왕이 된 태종은 누구와도 권력을 나누려 하지 않고 결국 동지였던 아내를 유폐시키고, 처남들을 전부 죽이고 만다.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에 뜻이 잘 맞을 때는 의기투합 했으나 생각이 틀려지자 최악의 상태로 변해버린 것이다.

믿었던 큰아들 양녕대군의 폐위도 부부관계 악화에 일조했을 것이다.

반면 며느리인 소헌왕후는 시어머니처럼 친정이 풍비박산 나고 심지어 어머니는 노비로 떨어지기까지 했으나 남편 세종을 도와 10명의 아이들을 낳고 왕실 가족들을 보살피며 행복한 가정생활을 이룬다.

세종의 훌륭한 치세는 아내의 내조도 크게 기여했을 것 같고, 진심으로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명성왕후 부분에서 애매한 점이 있다.

저자는 명성왕후가 미신을 매우 싫어해 숙종이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데도 친정에서 굿하는 것을 막았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무녀를 궁으로 들여 아들의 병을 쫓기 위해 자신이 한겨울에 찬물로 목욕제계를 하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사극에 나온 야사일 뿐인지, 역사적 기록이 있는지 궁금하다.



<인상깊은 구절>

58p

태종은 소년 시절에 학문에 심취했고, 과거에도 급제했으며, 청년 시절에는 정몽주를 격살하는 등 역성혁명을 주도하고 형제의 난을 극복하는 등으로 야심차고 분주한 날을 보내면서 별로 여색에 탐닉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경왕후는 두 번이나 위기를 겪으면서 남편이 실패할 경우네는 따라 죽을 준비도 하고 있었고, 무당을 불러 몇 번씩 점을 치기도 했다. 이를 보면 그녀의 남편에 대한 간절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65p

소헌왕후는 왕비가 된 직후 친정의 풍비박산을 겪는 등 결코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공손하면서도 부지런하며 스스로를 계칙한다"는 세종의 평가처럼 그녀는 자기통제를 아주 잘하는 사람이었다. 

74p

세종이 즉위한 1418년 8월부터 1422년까지 약 5년간 인사권과 군사권 등 핵심 권력은 상왕인 태종에게 있었다. 이때 세종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집현전 학사들과 학문 토론을 하는 일 외에는 거의 없었다. 세종은 자기 처가가 풍비박산 나도 항의 한마디 못하고, 부왕의 권유에 따라 밤늦게까지 연회에 참석해야 했다.

94p

그럼에도 소헌왕후는 행복한 생애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 행복의 근원은 역시 남편 세종의 사랑이었다. 세종은 1408년 두 살 연상의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인 후 시종 공경과 사랑을 그치지 않았다. 그는 왕비 가문이 몰락한 다음에는 더욱 애틋한 마음으로 왕비를 가까이했다. 또 세종은 아낌없이 소헌왕후를 인정하고 칭찬했다.

(진심으로 부럽다. 세종은 정말 인간적으로도 군자의 기질을 가졌나 보다)

102p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어머니를 잃은 단종이나 갓난아기를 남겨둔 채 저승으로 떠나는 현덕왕후, 이 모자의 슬픈 운명을 안타까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세종은 상례라도 최고로 정성스레 치르고자 했는데, 당대 최고의 학자들은 세종의 마음에 깊이 공감했는지, 현덕왕후의 비석에 이렇게 새겼다.

"원손이 탄생하여 울음소리 황황하니, 종묘에 경사가 넘쳤고 기쁨이 조야에 가득한데, 하늘이여, 어찌하여 나이를 안 주셨나이까. 자는 듯 세상을 떠나시매 복을 누리지 못하셨도다. 슬픈들 어이하리 말씀이나 돌에 새기리라."

(며느리들을 두 번이나 내쫓고 간신히 얻은 손자를 낳은 지 하루 만에 저승길로 간 세자빈을 안타까워 하는 시아버지 세종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진다)

110p

정순왕후 송씨가 단종의 왕비로 간택된 데에는 영응대군의 부인이 된 고모 송씨의 존재, 수양대군이 각별히 사랑한 영응대군의 처조카라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양대군이 밝힌 바, '송현수는 나의 오래된 친구'라는 말에서 보듯 송씨 집안에 대한 수양대군의 친밀감은 남달랐다. 게다가 송현수는 상대를 위협할 정도의 인물이 아니었기에 별도로 관리할 필요가 없는 외척일 수 있었다. 단종의 혼인은 전적으로 수양대군이 강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양대군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왕비로 간택되었으나 결국 사위와 남편의 편에 서서 멸문이 된 송씨 가문이 안타깝다)

162p

당시 16세인 월산군의 처부 박중선보다는 세조의 오른팔이자 예종과 성종의 장인인 한명회를 왕실의 든든한 방패막으로 내세워 왕권을 보호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좋겠다는 현실적인 판단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정희왕후는 한시라도 왕의 자리를 비워두어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예종의 상례에 앞서 그날로 자을산군을 왕위에 즉위시키는 결단력을 보여주었다.

(숙부에게 왕위를 뺏기고 죽임을 당한 단종과 비교해 볼 때 겨우 한 살 더 많았던 성종을 즉위시킨 정희왕후의 정치적 결단은 참으로 과감하고 정확했던 듯 하다. 정치적 감각이 매우 노련했고 그 덕분에 조선 전기가 안정되었을 것이다)

205p

<내훈>을 편찬한 직후에 소혜왕후는 자신의 높은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던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폐위시켰고 결국 사사시키는 불행한 일을 자행했다. 

235p

전근대 사회를 지배한 근본 원리는 신분이었다. '몸의 구분'이라는 그  뜻대로, 신분은 혈통이라는 단일하고 변경할 수 없는 조건 아래 그 밖의 거의 모든 사항을 귀속시켰다. 고귀한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은 탐스러운 가치를 독점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예외도 있지만, 그는 정치적 권력을 행사했고 경제적 풍요를 누렸으며 수준 높은 문화를 향유했다. 

 전근대의 보편적 정치체제였던 왕정은 이런 신분제도의 원리를 가장 높은 수준에서 집약한 제도였다. 국왕은 그야말로 배타적 권력을 행사했고 가장 큰 부자였으며 호사스러운 문화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전근대 사회에서 일차적 차별은 성별이 아니라 신분이었다. 고귀한 신분의 여성은 그렇지 않은 남성보다 훨씬 큰 현실적 지위를 누렸다. 그런 여성들의 정점에 왕비가 있었다.

328p

세자빈으로 책봉되고 나서 '그때부터 后는 더욱 더 자신을 억제하고 조심하면서'라는 구절이 주목된다. 분명 그 이전보다 더 조심했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렇게 소현세자 부부의 죽음을 봤으니 어떻게 경계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조심 또 조심'이 이해된다. 사실 왕실의 모든 여성들이 인선왕후처럼 '경계 또 경계'하면서 산 것은 아니었다. 당장 며느리인 명성왕후만 봐도 인선왕후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342p

아버지 현종이 대단히 온건하고 우유부단한 성품을 가졌던 데 비하면 그의 품성이나 기질은 외가인 청풍김씨 일가에 훨씬 가까웠다

 숙종이 즉위 초에 일으킨 엄청난 정국 변화는 김석주와 같은 외가와 남인의 지원을 받았지만 사실 그 뒤에는 명성왕후의 후견이 있었다. 그녀는 비록 수렴청정을 하지는 않았지만, 현실 정치에 민감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친정의 이해 문제와 아들의 성공에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외가와 어머니의 지원이 없었다면 당시의 정치적 회오리는 14세의 숙종이 아무리 총명했다 하더라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명성왕후나 숙종은 일찍부터 송시열 일파의 서인들에게 깊은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350p

이렇게 장희빈을 두고 여러 차례 환국이 일어나면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더구나 경종이 즉위한 후에 신임환국이 일어나 노론 4대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이것은 주로 숙종의 과격하고 변덕스러운 성격과 당파 간의 투쟁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장희빈이 뿌린 씨앗의 요인도 없지 않았다

 이러한 뒷날의 역사 흐름을 음미하면, 명성왕후가 일찍이 말했던 "만약 그녀가 총애를 받게 된다면, 국가의 재앙이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알 수 있다. 명성왕후의 평판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사람을 꿰뚫어본 통찰력은 인정할 만했다.


<오류>

192 p

사실 그 때 자을산군도 14세로 어리기는 마찬가지였고,

->자을산군, 즉 성종은 14세가 아니라 13세에 왕위에 올랐다.

215p

연산군의 비였던 폐비 신씨(1476~1557)는 연산군이 폐위되자

-> 폐비 신씨의 생몰연도는 1476~1537년이다.

240p

중종은 <고려사>의 "명종기"를 진강하다가 임금이 왕비를 폐출했다는 부분에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고려 명종 때 임금이 왕비를 폐출한 것이 아니라, 며느리였던 태자비 이의방의 딸(훗날 사평왕후로 추존)을 폐출한 것이다.

364p

어머니와 아버지는 인현왕후로 인해 여흥부원군과 은성부부인에 봉해졌으며

->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은 여흥부원군이 아니라 여양부원군에 봉해졌다. 여흥부원군은 원경왕후 민씨의 아버지 민제이다.

407p

효장세자는 1719년(영조45) 2월 당시 왕자 신분이었던 연잉군과

-> 1719년은 영조가 아니라 숙종 45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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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명화 속 현대 미술 읽기
존 톰슨 지음, 박누리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오래 전에 이 책을 처음 읽을 때만 해도 현대 미술에 대해 겨우 이름만 알 때라 무척 힘들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본문에 나온 작품이나 화가들, 소장처 등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 일일이 찾아보느라 한 시간에 겨우 20 페이지 정도 밖에 못 읽어 며칠 동안 붙잡고 있었던 책이다.

몇 년 만에 재독하니 처음보다는 훨씬 쉽고 무엇보다 모방과 재현을 벗어난 현대 미술의 개념과 철학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됐다.

그림이라고 하면 르네상스 시대의 라파엘로나 바로크의 루벤스처럼 정밀하고 똑같이 아름답게 그리는 게 명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이들 낙서 같은 현대 미술을 받아들이기가 참 어려웠다.

그렇지만 책을 읽으면서 회화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 특히 사진기가 발명된 후 회화가 구성으로부터 벗어나 색채와 구도, 색조와 같은 본질적인 것들을 추구하게 된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전히 현대 미술은 어렵고 특히 20세기 이후의 개념미술이나 팝아트, 미니멀리즘 같은 것들은 공감이 어렵다.

색면 추상주의도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한가람 미술관에서 개최했던 로스코 전을 본 후로 거대한 색면이 주는 압도적인 느낌에 감동하여 호기심이 생기긴 했다.

또 덕수궁 미술관에서 주최한 조르디 모란디의 정물화 전을 우연히 본 후 묘한 감동을 받았었다.

이 책에도 소개됐는데 도판만 봤다면 전혀 감흥이 없었을 것이다.

추상 미술은 특히 직접 작품과의 대면이 중요한 것 같다.

책은 장점이 많다.

도판이 다소 어둡긴 하지만 본문에 나온 그림들을 가급적 전부 실어주고, 화가들의 생몰연대와 작품의 크기, 소장처, 제작년도 등도 소상히 밝히고 있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다만 현대미술의 개념 자체가 어려워서인지 문장이 쉽게 읽히지가 않는다.

번역서의 어쩔 수 없는 한계 같아 우리 저자들이 쓴 현대 미술서를 읽어 볼 생각이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색조라는 개념이다.

와토의 <제르생의 상점 간판>이라는 그림의 해설에서 색조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다.

현대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이 평면성과 색채인데 두 색채간의 대비 혹은 조화, 전체적인 분위기를 뜻하는 색조가 매우 중요한 요소 같다.



<인상깊은 구절>

22p

모로는 신비주의의 회귀를 부르짖었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오직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만을 믿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인상주의에 탄력이 붙고 있던 시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예술의 본질은 물론, 그 문화적인 목적의 측면에서도 과격하리만치 시류에 반하는 발언이었다. 새로운 상징주의 예술은 문화의 소양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 그 첫 번째 기능이었다. 모로는 르네상스 전성기의 거장들은 물론 인도와 중국 예술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인상파식 축소지향적인 언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식적인 디테일의 소멸보다는 '선, 아라베스크, 인위 예술에서 가능한 모든 장식적 장치를 통해 생각을 환기시키는' 그림으로의 회귀를 원했다.

29p

훗날 자신의 작품이 코로의 바로 옆에 걸려 있는 것을 본 모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여기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완벽하게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은 내 인생의 가장 슬픈 날이다."

31p

휘슬러는 그림을 통한 도덕적인 설교나 감상적인 내러티브에 기울어진 빅토리아 시대 미술에 반대했다. 그는 '모던'하고, 형식적으로 엄격하며, 음악처럼 '추상적인' 그림을 그리기를 원했다.

34p

모네는 빛의 특정한 분위기나 부수적인 효과, 그리고 색채를 띤 표시의 질서정연한 배열로서의 인지를 추구했다. 사실, 모네는 회화적 추상의 새로운 본질을 얻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런던에 있는 동안 제임스 애봇 맥닐 휘슬러의 <야상곡> 연작 중 초기작을 보았을 것이다. 그만큼 과격한 이미지의 단순화까지는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해도, 사진 기술의 지속적인 발달과 직면하면서 자주적인 시각 언어로서의 회화 진화의 중요성은 이해하고 있었다.

49p

마네는 특히 드가와 가까운 사이였는데, 드가처럼 마네도 모티프로부터 직접 작업하는 것의 효율성에 전적으로 납득하지는 못했다. 제대로 미술 교육을 받은 살롱 화가였던 마네는 프랑스 미술의 위대한 전통을 존중했으며, 여기에 새로운 무언가를 더하면서 계속 그 연장선상에 머무르고 싶어 했다. 마네가 한 번도 다른 인상파와 함께 전시회를 연 적이 없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사실이다.

57p

"조화란, 지배색과 특정한 빛의 영향으로 인하여, 충돌하는 비슷한 색조, 색상, 그리고 선 요쇼들이 명랑하거나, 차분하거나, 혹은 슬픈 조합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조르주 쇠라

60p

폴 세르쥐에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고갱의 요구 -모방을 벗어버리고 그 내면의 논리와 상징의 함에 따라 순수한 색채를 사용하라는-에 대한 응답으로 해석된다. 사실 한 점의 회화로서의 <부적>은 고갱이 시도했던 그 무엇보다 훨씬 전체적으로 추상적인 회화 언어를 포용하고 있다. '평면성'이 고갱의 작품에서는 형태가 채색된 형상으로 강조되기 이전에 이미 선에서 생성되는 반면, 세뤼지에의 작품에서는 붓질의 분산만으로도 생겨나, 채색된 영역과 형태와 대비를 이루는 표현 위에 뭉치거나 퍼진다.

66p

동료 화가인 폴 고갱과 일상을 공유하는 실험은 감정의 재앙으로 막을 내렸다. 감수성 면에서는 두 사람이 막상막하였지만, 고갱의 지배적인 성격이나 하늘을 찌르는 자존심에 고흐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71p

지기였던 반 고흐처럼 고갱도 점묘법을 시도하면서 독학으로 색채 이론을 공부했다. 그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고갱은 과학보다는 직감을, 광학적 진실보다는 상징적인 힘을 더 선호했다. 고갱은 마침내 색채를 단순한 표현에서 분리하게 되고 바로 이 때문에 19세기 후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하나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미래로 향한 길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81p

"나의 예술의 유일한 목표는 관객 안에서 불확정의 세계와의 산만한, 그러나 강렬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오딜론 르동

105p

놀데는 말했다. "원형이나  모델 없이... 명확한 정의 없이... 빛과 색채의 모호한 감각만으로도 충분하다... 혹은 그림은 혼자 힘으로 그 형태를 드러내기도 한다."

113p

채도가 높은 색채의 평평하면서도 서로 겹치는 채색면을 강조함으로써 마티스는 -폴 고갱의 발자취를 따르며- 유럽 회화의 색채에의 근대적 접근을 정의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마티스는 미국 추상화, 특히 채색면을 강조한 추상화의 탄생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24p

기성작은 뒤샹으로 하여금 '미적인 숙고가 더이상 손의 능력이나 재주가 아닌, 정신의 선택에 불과하게끔' 만들어주었다.

134p

칸딘스키의 추상 이론에서 핵심은 다른 어떤 것을 가리키지 않고도 예술 작품의 외형적 형태를 결정할 수 있는 '내적 필요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이란 우선 자신의 '내적 소리'를 확립하고 지속적인 접촉을 가짐으로써 그 시각적인 면을 형태와 색채로 캔버스 위에 풀어놓는 것이다. 간신히 인식할 수 있는 현상의 존재를 암식하는 자연 질서와 유사한 이미지들-파란 부분은 하늘처럼 보이고, 어떤 형상은 인간이나 물고기처럼 보이고-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화가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160p

1920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세잔의 그림을 실제로 본 뒤 그는 형이상학파와 결별한다. 모란디는 예술계나 예술 시장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볼로냐 아카데미에서 조판을 강의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제1타 세계대전 이후 밀려온 볼셰비즘의 파도에 겁에 질린 많은 이탈리아 중산층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처럼 모란디 역시 정치적으로 우파에 섰다. 1920년대 초반, 즉 독일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수년 전에 이미 무솔리니의 지지자였으며 파시스타당의 정식 당원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결국 파시즘에 환멸을 느끼고 무솔리니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돌아선 후, 모란디는 1930년대 초 이후로는 정치적 발언을 중단했으며 교사화 화가로서의 일상 이외에는 공적인 자리를 점점 피하게 되었다. 

165p

"회화적인 표현이 변했다면 그것은 모던 라이프가 그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자동차나 고속 열차로 풍경을 가로지를 때, 그것은 조각조작나 묘사적인 가치를 잃어버리고 대신 합성적인 가치를 얻는다. 열차의 차칸 문이나 자동차의 차창을 통해 바라본 경관은 속도와 조화를 이루어 사물의 일반적인 시각을 완전히 바꾸어놓는다." -페르낭 레제

191p

브라크는 자신이 생각하는 성공작이란 모든 개념이 지워지고 오직 불안정한 느낌만이 남아있는 '지적 공허'에 도달한 작품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정물:그 날> 같은 작품을 보면 그에게 있어 느낌이란 색채의 상호작용과 보기드문 색상조합의 창조에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것 같다.

210p

<신부의 단장>은 매우 디테일하고 환상적인 에른스트 초현실주의의 산물인 동시에, 그가 전통적인 회화 기법 전반 -바탕 채색, 색채 조합, 색채에 광택 입히기 등-에 얼마나 능숙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214p

발튀스는 그 자신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조르지오 데 키리코처럼 기법상의 이유로 동시대 화가들에게 거부당했으며, 옛 거장들의 작품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그들의 태도에 탄식했다. 무엇보다 발튀스는 당시 화가들이 회화 공간에 언어 -과도한 설명과 화려한 언변의 비평 논쟁-를 삽입하기 시작한 것에 깊은 불신을 품었다. 대신 그는 바꿀 수 없고, 옮길 수 없는 회화 이미지의 시각적 풍부함을 주장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반근대적'인 것은 아니다. 발튀스의 작품들을 자세히 관찰하면 다소 구식인 연극조-부르주아들의 예의범절-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 때문에야말로) 발튀스가 오늘날 사회적-성적 노이로제의 예라한 관찰자였음을 보여준다. 

221p

1960년대 이후 날이 갈수록 겉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쇠퇴하는 성적 능력에 신경을 쓰는 것이 회화와 에칭에 그대로 드러냈던 피카소와는 달리 보나르는 자화상에서 점점 내향적으로 변하는 자신의 성격을 표현한 듯하다.

271p

"기대한 것이 이루어지든 그렇지 않든 관계없이, 기대하는 그 자체가 멋지다. 이것이 나의 친구 알베르토 자코메티와 나눈 긴 대화의 주제였다." -앙드레 브르통

297p

그는 추상 표현주의의 감정적 과잉과 단절하여 '예술 그 자체로의 회귀'를 무엇보다 원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라인하트에게 마크 로스코의 작품들은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라인하트는 그림이 한 덩어리의 벌거벗은 시각적 요소들로 줄어드는 것 역시 원하지 않았다.

301p

"예술가의 부름은 삶에 대한 태도이며,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를 끌어안는다. 동작 하나하나가 선해야 한다. 도덕주의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진실이다." -단 반 골덴

315p

뒤샹에게게는 아무리 열렬한 예술 애호가라 할지라도 들어갈 수 없는, 예술가만의 영역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한 공간이 있다. 예술가들이 생각하는, 그리고 관객은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오직 소수의 예외적인 개인만이 공명할 수 있는 사물들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술의 경험은 '종교적 신앙 또는 성적인 매혹과 유사한 구석이 있다- 미적인 반향이 그것이다.'


<오류>

46p

1860년대, 이제는 나폴레옹3세가 된 조르주-외젠 오스망 남작은 파리의 중심부를 바꾸어 놓기로 결심했다.

-> 나폴레옹 3세가 오스망 남작에게 지시했다는 표현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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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목소리 1 - 남성 성악가편
유형종 지음 / 시공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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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춘천으로 파견나가서 기숙사에 한 달 살 때, 한림대학교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 읽은 기억이 난다.

1권은 남성 오페라 가수, 2권은 여성 편이었는데 그 때만 해도 오페라에 대해 전혀 모를 때라 인물 나열이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고 나서 오페라 가수들에 대해 조금씩 관심이 생겼고 지금도 잘 모르긴 하지만 약간의 배경 지식이 생겨 재독하니 훨씬 재밌다.

내가 알고 있는 성악가라고는 얼마 전에 타계한 루치아노 파바로티 뿐이라 아쉽지만 세월의 무게를 이겨낸 불멸의 이름을 획득한 가수들이 실려 있다.

오페라 가수라고 하면 고음을 지르는 테너만 유명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베이스나 바리톤 배역들도 스타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또 몸을 쓰는 일종의 육체 노동이라 그런지 쇠퇴기가 빨리 오고 화가들보다 수명도 짧은 것 같다.

언어의 문제도 있어 다양한 오페라를 소화하기 위해 여러 언어를 잘하는 것도 유리한 듯 하다.

플라시보 도밍고도 잠깐 언급된다.

내가 이름을 알 정도로 현존하는 최고의 테너이고 무엇보다 아주 다양한 레파토리를 소화해 낸다고 한다.

유명 가수는 어떤 배역이든 다 잘하는 줄 알았는데 레파토리를 넓히는 것도 노력을 많이 해야 하는 큰 시도인 듯 하다.

여러 가수들이 다 흥미로웠지만 딱 한 사람을 꼽으라면 프랑코 코렐리다.

사진으로 보니 아주 잘 생긴 이탈리아 가수인데 뛰어난 자질을 가졌음에도 무대에 오르기 전에 끊임없이 긴장하고 자신을 채직찔하고 그럼에도 막상 오페라가 시작되면 누구보다 훌륭하게 배역을 소화해내는 완벽주의적이고 강박적인 성격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강박적인 성격이라 이런 심리가 너무나 이해가 된다.

나는 비록 이런 위대한 예술가들처럼 훌륭한 성과를 내지는 못하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몰아세우고 스스로를 압박하는 그 심리를 잘 알 것 같다.

기악처럼 이른 나이에 데뷔한 사람보다는 다른 직업을 갖고 있다가 성년이 넘어서 전문 성악가로 접어든 사람도 많아 놀랬다.

요즘말로 하면 아이돌 연습생 보다는 오디션에 합격해 가수가 된 경우가 가능한 모양이다.

그만큼 오페라가 일상화 되고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가진 서구 사회라 가능할 것 같다.

심지어 어떤 가수는 옥스퍼드 역사학 박사학위까지 가지고 있었다.

같이 실린 사진들도 훌륭하고 글솜씨도 무난해 편하게 읽었고 올레 TV로 오페라를 감상해 볼 생각이다.


<인상깊은 구절>

196p

코렐리는 격정적인 음성이 뿜어내는 야성적 이미지와는 달리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굉장한 음성을 갖고 있는데도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는 거의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긴장한 상태였으며, 무대에 올라서도 몸이 풀리고 제대로 연기가 나오려면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테발디는 준비가 끝났고 오케스트라도 스튜디오에 모였는데 벌써 도착한 코렐리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어디 갔나 찾아보았더니 글쎄 로레타가 고개 숙인 남편의 등을 두드리며 이제 되었으니 스튜디오에 입장하라고 격려하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야 스튜디오에 올라왔는데, 막상 노래를 시작하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 끝내주더라고요!"

"나는 항상 긴장해 있었습니다. 데뷔 초기에는 높은 B나 C음이 나오지 않을까 두려워했고, 막상 높은 음을 잘 부르게 된 다음에는 그걸 잃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습니다. 공연이 없는 날에도 목소리가 제대로 살아 있을까 계속 의심했지요. 나는 내 모든 공연을 녹음합니다. 공연이 끝나면 그걸 듣느라 3시간이나 보냅니다. 지치고 휴식이 필요한 시간이었지만 그렇게 못 했던 것이지요. 테이프를 듣고 만족하면 기분이 좋아져서 잠을 설치고, 그렇지 못하면 절망해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무슨 인생이 이렇답니까?"

201p

자기 과시적 태도를 지녔던 델 모나코와 달리 코렐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고민하고 또 발전시키고자 노력한 가수였다.

"수면 중에도 노래를 부릅니다. 나는 언제나 스스로를 향상시키고자 정진하기 때문에 절대 편안히 쉬지 않습니다. 만일 내게 완전히 자유로운 석 달간의 휴가가 주어진다면, 오로지 성악 테크닉을 향상시키는 데 쓸 겁니다."

225p

그가 택한 방법은 위대한 이탈리아 선배 테너들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 방법이란 네 사람을 선정해 그들의 레코드를 계속 들으면서 거의 독학으로 스스로 깨우치는 것이었다. 현명하게도 베르곤치는 그들의 음성을 모방하려 들지 않았다. 그가 연구한 것은 테크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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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3 09: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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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도교의 기원과 역사 이화학술총서
정재서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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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도교 관련 전시회를 한 적이 있다.

그 때 도록과 함께 전시됐던 책이라 흥미를 갖고 있었는데 근처 도서관에 없어 오랫동안 숙제처럼 갖고 있다가 드디어 읽게 됐다.

오래 전에 나온 책이라 편집이나 내용이 다소 옛스럽긴 하나 300 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으로 읽기 편하고 도교가 아닌, 한국 도교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 무척 신선하다.

도교도 모호한데 한국 도교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막연히 고구려 고분 벽화에 도교적 색채가 보인다 정도 밖에 몰랐다.

책에 따르면 한국의 도교는 고구려 영류왕 시절 당으로부터 전해진 역사적 기록 외에도 자생적 요소가 있었다고 본다.

이 책의 주제가 바로 한국 도교의 자생적 기원과 고유성을 밝히는 것이다.

화랑의 신선적 성향이나 고구려 벽화의 신선들, 백제의 금동대향로 등을 증거로 내세우고 최치원을 도교의 비조로 본다.

정확히 이해는 못했지만 산을 숭배하고 수련을 통해 신선을 지향하고, 성황신이나 칠성신, 조왕신 같은 무속적인 것도 자생적 도교의 속성으로 보는 것 같다.

샤머니즘이나 무속이 곧 원시 도교라 할 수 있을까?

중국은 도교가 하나의 종교나 학파로써 명확히 실체가 있는데 한국의 도교는 저자의 책 내용만으로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저자는 도교가 발해만 주변의 동이에서 비롯된 변방적 성격의 사상으로써 중원과 다르다고 강조하는데 동이가 곧 한민족도 아니고 중원이 아니면 중국이 아닌 것도 아니니 공감하기가 어렵다.

조선 시대 단학파에 대한 고찰이 무척 흥미롭다.

주자학 일변도의 시대라 다른 학문이라면 기껏해야 실학이나 양명학 등 유교의 다른 갈래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내적 수련을 통해 신선의 경지에 오르려는 단학파라는 흐름이 있었다는 게 신선하다.

김시습, 정렴, 정지승, 권극중 등이 소개된다.

또 최제우의 동학이나 증산도, 원불교 등도 수련을 통한 신선을 추구하는 도교적 성향을 지녔다는 점이 흥미롭다.

원불교는 이름 때문에 막연히 불교 계통인 줄만 알았는데 저자의 평대로 다원주의적 세계관과 평화를 추구하고 생태계까지 아우를 수 있는 포괄적인 사상 같다.


<인상 깊은 구절>

67p

한국 도교에서 성립된 복원궁, 소격서 두 도관의 경우를 볼 때 이들은 결국 왕실과 국가의 도교 의례를 담당하기 위한 공적 기관이었지 도교 수행 자체를 목적으로 한 조직은 아니었다. 따라서 본래 중국 도관이 갖고 있는 여러 기능 중의 일부를 담당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사족 계층에는 도관의 형태를 갖추지는 않았으나 소규모의 자발적인 수련 조직 및 집단은 적지 않게 존재하여 그들 나름의 계보를 갖고 계승되어 왔던 것 같다. 

79p

한국 도교 자생설은 단군 신화 및 고구려 건국 신화에 대한 도교적 윤색 내지 재해석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민족 의식이 기본 정서로서 바탕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민족 의식의 정도는 후대로 내려갈수록 높아지는데 이는 종주국이었던 명이 망한 이후 조선 후기에 일기 시작한 소중화적 자존 의식, 점차 기울어져 가는 국세에 대한 우국적인 정서의 표출 등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90p

전국 시기에 발해만 일대라는 변경에서 일어났던 문화 현상을 단원론적 문화사관에 의거, 오로지 중국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주변 문화의 정체성을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논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고대 중국과 주변 문화와의 관계를 과연 오늘날의 배타적인 국가, 영토 개념으로 규정해도 좋은 것일까? 국경과 문화의 경역은 역사적으로 유동적이어서 일치할 수도, 서로 넘나들 수도 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중국'이라는 개념은 근대 국민 국가 성립 이후에 확립된 것인데 우리는 은연중 이 개념을 고대 중국 문화에까지 연장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 배후에 중국을 고정불변한 실체로 보는 인식이 존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속지주의적인 문화사관은 현재의 중국 영토 내에서 일어난 일이기만 하면 과거의 현상일지라도 모두 '중국적'인 것으로 귀속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대륙 학자들의 '토생토장'이라는 관습적인 표현은 이러한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근래까지도 중국은 문명의 외래설, 특히 서방 기원설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고자 부심하였다. 그러나 동아시아 내부의 문화 문제에 있어서는 이른바 화이론적 사고로써 주변 문화의 정체성을 홀시하고 그것을 모두 중국으로 환원하려는 이중적인 문화사관을 견지하고 있다. 중국 역외의 학자들 역시 이러한 입장을 답습할 뿐 주변 문화의 변별적 자질을 읽어 낼 시각이 부재한 것이 현실이다.

(이런 식으로 따지면 발해나 고구려 역시 과연 한민족의 역사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중국에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의 고대사 전체를 현재의 영토 국가와는 다른 관점에서 봐야 할 것 같다)

104p

당 황실은 원래 서방의 이민족 출신으로 문벌을 중시하던 당시의 풍조에 따라 자신의 혈통을 신성시하기 위해 노자를 원조로 모시게 되고 이에 도교는 국교가 되어 불교, 유교의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당대의 관방 도교는 도교와 황권의 완벽한 결합을 의미하며 이것은 당시의 정치적 목적과 긴밀히 상관된다. 첫째로 이미 말하였듯이 당 황실은 도교의 신권을 빌어 자신의 출신을 윤색하고 건국의 정당성을 보장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둘째로 당시 왕성해 있던 불교의 세력을 꺾음으로써 일정한 정도의 사회, 경제적 효과를 도모하였다. 즉, 사원 경제력의 환수로 인한 국가 수입의 증대, 승려의 환속으로 인한 노동력의 증가 및 세수의 증대 등이 그것이다.

123p

도교는 중원 지역에서 자생한 문화라기보다 변경으로부터 유입된 외래의 이족 문화로서의 성격이 짙다. 초기 도교의 경전들이 모두 동방의 방사 계층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전설 및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따라서 도교가 근원적으로 갖고 있는 주변적, 이족적인 속성은 본질적으로 다원적인 가치성을 지향하게 되므로 한국 문화와 쉽게 동화되면서 자연스레 자주 의식의 입장에 선 대외 자세를 갖게 된다. 고구려의 당에 대한, 고려의 주변 강국들에 대한 도전적인 입장들과 같이 역사상 도교와 자주 노선의 정책과는 긴밀한 상호관련이 있다. 근래 천황제와 도교와의 긴밀한 관계가 밝혀진 바 있었지만, 관방 도교의 강력한 영향하에 성립된 일본의 왕권이 대외적으로 과시하였던 자주성은 이 문제에 대한 유력한 좌증이 될 것이다.

137p

동학은 강일순이 최제우를 선도의 종장으로 칭했을 정도로 도교적 색채가 농후하다. 최제우가 득도를 자각하게 된 신비로운 체험부터 이미 상당히 도교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어느 봄날 최제우는 갑자기 몸이 전율하며 자칭 상제라고 하는 초월적 존재의 계시를 듣게 된다. 최제우의 이러한 종교 체험은 오두미도의 장도릉, 신천사도의 구겸지 등 중국의 초기 도교 교주들의 득도 상황과 거의 비슷하다. 교주들은 신비 체험 중에 신인(대개 천상노군)으로부터 교법이나 경전은 전수받는다. 최제우와 도교 교주들의 이러한 공통적 체험은 양자의 뿌리가 무속에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동학의 교법 중에서 가장 민간 도교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은 부주의 사용이다. 이른바 영부는 최제우가 앞서의 명상 체험중에 상제로부터 받은 것으로 동학교도에게 있어서는 도교의 불사약이나 선약에 상응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75p

도교의 한국 신화의 전유가 명조의 붕괴 이후 조선 후기의 지식계층 사이에 대두한 문화적 자존의식의 한 표현이었는지, 아니면 중국 도교에서 보여지듯이 한국 신화가 한국 도교의 내용이나 특성을 구현함에 있어 자발적인 전변 과정을 거쳐 왔는지 구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4p

"도가적 인생관이 현실 도피만이 아니라 차원을 달리한 현실 참여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고 이에 따라 가령 정렴의 도교 수행을 가세의 변동으로 인한 개인적 굴절로 보기보다는 본래부터 있었던 '일가의 학풍'에 바탕한 자연스러운 처신으로 인식했다. ... 이제 우리는 조선조 단학파의 성격이 종래의 피상적 소견과는 달리 일정한 정치적 지향을 띠고 있으며 그것의 이념적 내용은 민족주의라든가 자주적 역사의식과 상관됨을 알 수 있다.

253p

최치원 도교학의 훌륭한 점은 그가 중국으로부터 귀국한 후 신라에 자생하고 있는 민족의 선도를 재인식하고 그 지위를 중국 도교보다 우위에 둔 점이다. 그는 <난랑비서>에서 고유의 선도에 대한 주체적 인식을 표명하였다. 결국 최치원은 중국의 내단수련법을 체득하고 이를 다시 풍류도의 삼교합일 체계 안에 수용함으로써 한국 수련 도교의 독특한 경지를 이룩해낸 것이다. 최치원 도교학의 이러한 경지는 이후 이자현, 이명, 김시습, 정렴 등에 의해 계승되어 고려, 조선 시기 문인, 사대부 수련 도교의 큰 줄기를 형성하게 된다. 최치원을 한국 도교의 비조라고 일컫는 까닭이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258p

"그대는 이미 세상 밖의 사람이 되었으니, 

모름지기 세상 밖의 일을 행하게나"

마지막 두 구절은 노인이 김시습에게 당부한 말이다. 이제 수양대군에 대한 분노, 단종 복위에 대한 열망은 세상 밖 사람이 된 김시습에게 있어서 모두가 부질없는 일일 뿐이다. 그가 해야 할 의미있는 일이란 '세상 밖의 일' 즉 수련을 하여 신선의 경지에 도달하는 일이다. ... 그러나 이러한 유불도 3교합일의 성향은 김시습 개인 학문의 특성이 아니라 상고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한국 古仙道의 전통이다. 한국 고선도 즉 풍류도의 또 하나의 중요한 취지는 사대주의를 배격하는 자주적 역사 의식이다. 

268p

<용호비결>은 조선의 의학사상 특히 허준의 <동의보감>의 원리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의보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허준만의 독창적인 작품이 아니다. <동의보감>의 기획에는 당대의 여러 학자들이 관계했는데 정렴의 막내 아우 정작이 儒醫로서 참여하여 결정적인 이론을 제공하였다. <용호비결>에서 전개된 정기신론이 <동의보감>의 독특한 도교 의학 체계를 구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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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권 2024-12-27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내용입니다. 도움이 많이 되어 감사합니다. 조선선비들은 은밀하게 도교수련을 많이 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