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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비 기록으로 만나다 ㅣ 고전탐독 8
이현주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8년 11월
평점 :
조선 왕비라는 주제는 너무 많이 알려져 있고 식상하지만, 여러 전공자들이 쓴 책이라 기대감을 갖고 읽게 됐다.
조선 왕실 가계도 시리즈를 출간했던 지두환씨는 역시나 실록과 행장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와 장렬왕후 편이 지루했다.
인물에 대해 평가하고 역사적 배경을 같이 기술해 주는 평전 식 서술이 흥미로웠다.
역사학자들이다 보니 한정된 자료로 많은 상상력을 발휘하기는 힘들지만, 대신 신뢰할 수 있는 인물평이다.
원경왕후와 며느리 소헌왕후의 결혼생활이 극명하게 대비되어 흥미로웠다.
이방원은 젊은 시절 과거에도 급제하고 아버지가 나라를 세우는데 앞장서고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기까지 오직 목표만을 위해 달려가느라 여색도 멀리하고 자신을 음으로 양으로 뒷바라지 해 준 아내 민씨와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며 무려 11명의 자녀를 낳았다.
여장부였던 원경왕후는 친정의 배경도 훌륭해 남자 형제들과 힘을 합쳐 남편을 왕위에 올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러나 왕이 된 태종은 누구와도 권력을 나누려 하지 않고 결국 동지였던 아내를 유폐시키고, 처남들을 전부 죽이고 만다.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에 뜻이 잘 맞을 때는 의기투합 했으나 생각이 틀려지자 최악의 상태로 변해버린 것이다.
믿었던 큰아들 양녕대군의 폐위도 부부관계 악화에 일조했을 것이다.
반면 며느리인 소헌왕후는 시어머니처럼 친정이 풍비박산 나고 심지어 어머니는 노비로 떨어지기까지 했으나 남편 세종을 도와 10명의 아이들을 낳고 왕실 가족들을 보살피며 행복한 가정생활을 이룬다.
세종의 훌륭한 치세는 아내의 내조도 크게 기여했을 것 같고, 진심으로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명성왕후 부분에서 애매한 점이 있다.
저자는 명성왕후가 미신을 매우 싫어해 숙종이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데도 친정에서 굿하는 것을 막았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무녀를 궁으로 들여 아들의 병을 쫓기 위해 자신이 한겨울에 찬물로 목욕제계를 하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사극에 나온 야사일 뿐인지, 역사적 기록이 있는지 궁금하다.
<인상깊은 구절>
58p
태종은 소년 시절에 학문에 심취했고, 과거에도 급제했으며, 청년 시절에는 정몽주를 격살하는 등 역성혁명을 주도하고 형제의 난을 극복하는 등으로 야심차고 분주한 날을 보내면서 별로 여색에 탐닉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경왕후는 두 번이나 위기를 겪으면서 남편이 실패할 경우네는 따라 죽을 준비도 하고 있었고, 무당을 불러 몇 번씩 점을 치기도 했다. 이를 보면 그녀의 남편에 대한 간절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65p
소헌왕후는 왕비가 된 직후 친정의 풍비박산을 겪는 등 결코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공손하면서도 부지런하며 스스로를 계칙한다"는 세종의 평가처럼 그녀는 자기통제를 아주 잘하는 사람이었다.
74p
세종이 즉위한 1418년 8월부터 1422년까지 약 5년간 인사권과 군사권 등 핵심 권력은 상왕인 태종에게 있었다. 이때 세종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집현전 학사들과 학문 토론을 하는 일 외에는 거의 없었다. 세종은 자기 처가가 풍비박산 나도 항의 한마디 못하고, 부왕의 권유에 따라 밤늦게까지 연회에 참석해야 했다.
94p
그럼에도 소헌왕후는 행복한 생애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 행복의 근원은 역시 남편 세종의 사랑이었다. 세종은 1408년 두 살 연상의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인 후 시종 공경과 사랑을 그치지 않았다. 그는 왕비 가문이 몰락한 다음에는 더욱 애틋한 마음으로 왕비를 가까이했다. 또 세종은 아낌없이 소헌왕후를 인정하고 칭찬했다.
(진심으로 부럽다. 세종은 정말 인간적으로도 군자의 기질을 가졌나 보다)
102p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어머니를 잃은 단종이나 갓난아기를 남겨둔 채 저승으로 떠나는 현덕왕후, 이 모자의 슬픈 운명을 안타까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세종은 상례라도 최고로 정성스레 치르고자 했는데, 당대 최고의 학자들은 세종의 마음에 깊이 공감했는지, 현덕왕후의 비석에 이렇게 새겼다.
"원손이 탄생하여 울음소리 황황하니, 종묘에 경사가 넘쳤고 기쁨이 조야에 가득한데, 하늘이여, 어찌하여 나이를 안 주셨나이까. 자는 듯 세상을 떠나시매 복을 누리지 못하셨도다. 슬픈들 어이하리 말씀이나 돌에 새기리라."
(며느리들을 두 번이나 내쫓고 간신히 얻은 손자를 낳은 지 하루 만에 저승길로 간 세자빈을 안타까워 하는 시아버지 세종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진다)
110p
정순왕후 송씨가 단종의 왕비로 간택된 데에는 영응대군의 부인이 된 고모 송씨의 존재, 수양대군이 각별히 사랑한 영응대군의 처조카라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양대군이 밝힌 바, '송현수는 나의 오래된 친구'라는 말에서 보듯 송씨 집안에 대한 수양대군의 친밀감은 남달랐다. 게다가 송현수는 상대를 위협할 정도의 인물이 아니었기에 별도로 관리할 필요가 없는 외척일 수 있었다. 단종의 혼인은 전적으로 수양대군이 강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양대군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왕비로 간택되었으나 결국 사위와 남편의 편에 서서 멸문이 된 송씨 가문이 안타깝다)
162p
당시 16세인 월산군의 처부 박중선보다는 세조의 오른팔이자 예종과 성종의 장인인 한명회를 왕실의 든든한 방패막으로 내세워 왕권을 보호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좋겠다는 현실적인 판단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정희왕후는 한시라도 왕의 자리를 비워두어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예종의 상례에 앞서 그날로 자을산군을 왕위에 즉위시키는 결단력을 보여주었다.
(숙부에게 왕위를 뺏기고 죽임을 당한 단종과 비교해 볼 때 겨우 한 살 더 많았던 성종을 즉위시킨 정희왕후의 정치적 결단은 참으로 과감하고 정확했던 듯 하다. 정치적 감각이 매우 노련했고 그 덕분에 조선 전기가 안정되었을 것이다)
205p
<내훈>을 편찬한 직후에 소혜왕후는 자신의 높은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던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폐위시켰고 결국 사사시키는 불행한 일을 자행했다.
235p
전근대 사회를 지배한 근본 원리는 신분이었다. '몸의 구분'이라는 그 뜻대로, 신분은 혈통이라는 단일하고 변경할 수 없는 조건 아래 그 밖의 거의 모든 사항을 귀속시켰다. 고귀한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은 탐스러운 가치를 독점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예외도 있지만, 그는 정치적 권력을 행사했고 경제적 풍요를 누렸으며 수준 높은 문화를 향유했다.
전근대의 보편적 정치체제였던 왕정은 이런 신분제도의 원리를 가장 높은 수준에서 집약한 제도였다. 국왕은 그야말로 배타적 권력을 행사했고 가장 큰 부자였으며 호사스러운 문화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전근대 사회에서 일차적 차별은 성별이 아니라 신분이었다. 고귀한 신분의 여성은 그렇지 않은 남성보다 훨씬 큰 현실적 지위를 누렸다. 그런 여성들의 정점에 왕비가 있었다.
328p
세자빈으로 책봉되고 나서 '그때부터 后는 더욱 더 자신을 억제하고 조심하면서'라는 구절이 주목된다. 분명 그 이전보다 더 조심했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렇게 소현세자 부부의 죽음을 봤으니 어떻게 경계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조심 또 조심'이 이해된다. 사실 왕실의 모든 여성들이 인선왕후처럼 '경계 또 경계'하면서 산 것은 아니었다. 당장 며느리인 명성왕후만 봐도 인선왕후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342p
아버지 현종이 대단히 온건하고 우유부단한 성품을 가졌던 데 비하면 그의 품성이나 기질은 외가인 청풍김씨 일가에 훨씬 가까웠다.
숙종이 즉위 초에 일으킨 엄청난 정국 변화는 김석주와 같은 외가와 남인의 지원을 받았지만 사실 그 뒤에는 명성왕후의 후견이 있었다. 그녀는 비록 수렴청정을 하지는 않았지만, 현실 정치에 민감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친정의 이해 문제와 아들의 성공에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외가와 어머니의 지원이 없었다면 당시의 정치적 회오리는 14세의 숙종이 아무리 총명했다 하더라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명성왕후나 숙종은 일찍부터 송시열 일파의 서인들에게 깊은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350p
이렇게 장희빈을 두고 여러 차례 환국이 일어나면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더구나 경종이 즉위한 후에 신임환국이 일어나 노론 4대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이것은 주로 숙종의 과격하고 변덕스러운 성격과 당파 간의 투쟁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장희빈이 뿌린 씨앗의 요인도 없지 않았다.
이러한 뒷날의 역사 흐름을 음미하면, 명성왕후가 일찍이 말했던 "만약 그녀가 총애를 받게 된다면, 국가의 재앙이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알 수 있다. 명성왕후의 평판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사람을 꿰뚫어본 통찰력은 인정할 만했다.
<오류>
192 p
사실 그 때 자을산군도 14세로 어리기는 마찬가지였고,
->자을산군, 즉 성종은 14세가 아니라 13세에 왕위에 올랐다.
215p
연산군의 비였던 폐비 신씨(1476~1557)는 연산군이 폐위되자
-> 폐비 신씨의 생몰연도는 1476~1537년이다.
240p
중종은 <고려사>의 "명종기"를 진강하다가 임금이 왕비를 폐출했다는 부분에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고려 명종 때 임금이 왕비를 폐출한 것이 아니라, 며느리였던 태자비 이의방의 딸(훗날 사평왕후로 추존)을 폐출한 것이다.
364p
어머니와 아버지는 인현왕후로 인해 여흥부원군과 은성부부인에 봉해졌으며
->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은 여흥부원군이 아니라 여양부원군에 봉해졌다. 여흥부원군은 원경왕후 민씨의 아버지 민제이다.
407p
효장세자는 1719년(영조45) 2월 당시 왕자 신분이었던 연잉군과
-> 1719년은 영조가 아니라 숙종 45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