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과 신들 - 개정판
주원준 지음 / 한님성서연구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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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책이지만 성경에 대한 인식을 바꿔줬다.

제목만 보고 막연히 구약시대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비판하는 책인 줄 알았다.

구약은 절대적인 경전이라기 보다는 사실은 근동의 여러 종교와 문화가 섞여 있는 일종의 신화라는 식으로 비판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저자는 개신교가 아닌 가톨릭 계열의 종교학자이고 기독교의 근본주의나 성경 문자주의 같은 저급하고 편협한 해석을 경계하고 수천 년 전 고대 근동인의 눈으로 성경에 그려진 절대신을 해석한다.

저자는 이러한 해석을 탈신화화, 재신화하라고 설명한다.

성경은 과학과 합리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의 언어로 쓰여진 게 아니라, 수천 년 전 자연에 영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근동인들의 언어로 자신들이 믿는 유일신을 설명한 경전이므로 신화의 껍질을 벗기고 그 안에 들어있는 알맹이, 즉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바로 탈신화화다.

지구 6천년 설을 믿는 근본주의자들은 기겁할 소리일 것이다.

고대 근동인들은 자연에 인격을 부여해 신으로 섬겼고 이스라엘인들은 그 신들을 모두 야훼 하느님의 피조물로 만들어 버렸다.

하늘을 신으로 섬기는 주변 민족들과 달리, 이스라엘인들은 하늘이 장소에 불과하다고 표현했다.

이러한 절대자, 유일신 사상은 당시로 보면 너무나 놀랍고 독창적인 관념 같다.

또 그 신적 개념이 보편적인 힘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인류 전체에게 영향을 끼치는 종교가 됐을 것이다.

비판적인 눈으로 성경을 볼 때는 성경이란 고대 근동의 잡다한 문화의 짜집기가 아닌가 싶었는데 오히려 그러한 다신론적인 강대국들 사이에서 매우 작은 왕국이었던 이스라엘인들이 유일신 개념을 어떻게 보존하고 지켜 왔는지를 알 수 있는 놀라운 경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전에 믿었던 내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본 좋은 시간이었다.

친절하게 어려운 개념들을 설명해 준 저자에게 감사하다.



<인상깊은 구절>

19p

신약 시대와 현대는 다르다. 과학과 기술 등이 발전하지 않았던 2천년 전 신약 시대 사람들은 신화적 세계관에 젖어 살았다.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신화의 언어에 퍽 익숙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성경도 그런 옛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쓰였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과학과 합리주의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이 고대의 신화적 언어는 무척 낯설기 때문에, 신약성경을 현대인의 눈으로만 읽으면 오해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과거 신화의 언어에 담겨진 속뜻을 잘 새겨서 이해해야 한다.

20p

볼트만은 신약 시대의 세계관이 신화적임을 지적했다. 이런 세계관은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과 크게 차이 나므로, 일종의 해석학적 여과 장치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현대인이 오해 없이 성경을 이해하려면 이런 신화의 언어를 벗겨 내서, 곧 탈신화화해서, 그 알맹이를 합리주의과 과학에 익숙한 현대인의 언어로 설명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신화의 껍질을 '탈각'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학계에 폭넓게 받아들여졌고, 현대의 성서학에서 꼭 가르치고 알아야 할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개념이다)

22p

성경의 언어는 태어날 때부터 객관과 증명에 기반한 과학의 언어와는 거리가 한참 멀고, 의미를 담아내는 신화나 이야기의 언어와 가깝다는 주장이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성경의 언어는 신화의 언어와 일맥상통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풍부한 상징을 담고 있는 신화적 언어는 성경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적절하고도 유용한 수단이다.

23p

하느님은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선택하였다. 이 백성은 수천 년에 걸친 고대 근동의 패권전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이름을 올려 놓지 못했다. 그들의 조상은 보잘 것 없는 떠돌이였고, 한때는 제법 번듯한 왕국을 세웠지만, 늘 큰 나라들의 눈치를 봐야 했고, 얼마 가지 못해 분단되었으며, 북이스라엘도 남유다도 제 힘으로 지켜 내지 못했다. 이런 이스라엘이 장구한 세월을 견뎌 내는 동안 주변 강대국들의 문물을 적잖게 받아들였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것이 구약성경에 고대 근동 신화의 자국이 크게 남은 이유다.

 그런데 그들의 믿음만은 독특했다. 주변 강대국의 신화에서 많은 요소를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의 야훼 신앙에 맞춰 섭취하고 소화하여 자신의 종교를 지켜 내고 심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를테면,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하늘신'은 최고신이었지만, 유배 이전에 이스라엘인들은 언제나 '공간'의 의미로만 사용했다.

27p

종교사적 '지식'이 신자들의 '신앙'과 대립하거나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 보완하여 상승 작용을 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 줄 것이다. 신앙과 지식은 본질적으로 대립하지 않고 서로 보완하고 상승 작용을 일으키는 관계라는 성찰은 가톨릭 교회의 오래된 깨달음이다.

48p

이처럼 구약성경의 저자는 하늘이 인격화되는 표현을 삼간다. 고대 근동의 종교심을 고려할 때, 인격화된 하늘은 곧장 신격화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이 말하였다' 대신에 '하늘에서 하느님이 말씀하셨다'고 정확히 표현하는 것을 선호한다. 

 이렇게 하늘을 장소로 이해한 까닭은 하늘이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82p

예언자도 달신 숭배를 경고한다. 대표적인 신명기계 예언자라고 할 수 있는 예레미야는 일월성신을 섬겨 봤자 아무 소득도 없이 죽으리라고 경고한다.

89p

창세 1장은 이런 큰 신들을 한낱 피조물로 만들어 버렸다. 야훼 하느님은 단 나흘 만에 대제국의 높으신 신들 대부분을 '만드셨다'. 아무리 그들의 권능이 대단해 보여도 그것들은 그저 피조물일 뿐이다. 약소국 이스라엘의 사제계 신학자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90p

창세기 1장을 '창조주를 찬미하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로 서술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하느님의 창조는 이성적, 과학적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으로 찬미할 대상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은 창세 1장을 '큰 의미의 본문'으로 읽었다. 증명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야훼 하느님의 창조 행위와 함께 그분의 크나큰 권능을 '노래'한 것이다. 

116p

현대인과 고대인의 종교심은 어떻게 다를까? 현대인은 '나일 강'과 '나일 강의 신'을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강이라는 '객관적 실체'와 그 객체를 신화화해서 태어난 '상상의 세계', 곧 '강의 신'을 구별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대 근동인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하늘신 없는 하늘'이나 '강의 신 없는 강'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은 '의미 없는 세상'이나 '사랑 없는 연인들'과 같은 말이다. 이런 심성을 공유한 고대 이스라엘인들이게 '이 세상'과 '이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의 관계를 퍽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창조주 하느님 없는 세상은 의미 없는 세상이다. 이렇게 고대 근동인들은 구체적인 강들, 이를테면 나일 강이나 유프라테스 강에서도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129p

인간의 의식 체계는 '통제할 수 없는 우연의 결과'를 '공정하다'고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이를테면 월드컵 본선 조 추첨을 할 때늘 생각해 보자. 제비뽑기의 과정이 극도의 우연성을 보장한다면, 이른바 '죽음의 조'에 걸리더라도, 그 결과를 수용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이런 극도의 우연적 결과에 천문학적인 돈의 운명을 맡기기도 한다. 전 세계 수많은 나라와 지역에서 다양하게 치러지는 로또를 보라.

157p

구원의 피가 온 세상과 온 인류를 깨끗하게 만든다. 셈족의 종교심을 공유하는 신약시대 이스라엘인들은 이런 가르침을 퍽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예수님도 이런 상징으로 구원의 신비를 가르치셨고, 그 가르침에 따라 신앙 공동체는 지금도 성찬례를 올린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이런 셈족의 상징을 몰랐다. 로마인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 그들은 구원자의 피로 온 세상의 죄가 씻긴다는 사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일부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곧, 성찬례를 '인육식사'로 오해하였고, 그런 오해가 흉한 소문을 낳았으며,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다. 결국 그리스도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로마의 박해가 촉진되었다.

 이런 '문화적 차이'는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초대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비셈족에게 설득하고 증명하려고 많은 애를 썼고, 성찰을 심화시켰다. 그 과정에서 초대 그리스도교 신학이 발전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있다. 박해를 받는 입장이었던 그리스도교는 피에 대한 성경의 상징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잔인한 박해에 맞서 흘린 '순교자의 피'로 우리 모두가 깨끗해진다고 새롭게 고백하였다. 이는 교회의 '순교 신심'의 기반이 되었다.

159p

고대 근동인들은 의미의 세계에서 살았다. 신화가 제시하는 의미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 산의 푸른 나무 또는 길가의 큰 나무를 그저 '식물자원'이나 '목재' 따위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런 나무에 어떤 거룩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고 보았다. 나무에 어떤 '마음'이 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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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은 암흑시대였는가? - 중세 민음 지식의 정원 서양사편 3
박용진 지음 / 민음인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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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 사회와 정치 구조에 대한 가벼운 고찰.

앞서 읽은 절대왕정의 기원은 작은 분량에 불구하고 무척이나 많은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번 주제는 피상적인 느낌이라 아쉽다.

중세 천 년을 120 페이지로 담기는 무리였나 보다.

흑사병으로 인구가 감소하고 노동자의 임금이 올라 더 이상 영주들이 농민들을 인신 구속할 수 없어 임대료를 받고 시장에서 재화를 구입하는 시장경제체제로 돌아섰다는 내용은 익히 알려져 있어 새롭지 않았다.

백 년 전쟁을 치루는 동안 국가의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국왕은 신민에게 자원을 징발하고 세금을 거둬들였는데 이 때 삼부회가 이를 추인하는 역할을 한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국왕의 권한이 커지고 조세는 항구화 되어 절대 왕정이 성립되는 과정은 앞의 책에서도 본 바다.



<인상깊은 구절>

65p

도시민들 대부분이 가까운 농촌 지역 출신이며, 가까운 지역일수록 더 많은 수가 이주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더라도 "뿌리 뽑힌 자들"이 교환하는 물품의 양보다 주변 농촌의 농민들이 거래하는 상품의 양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따라서 상인이란 뿌리 뽑힌 자들이나 편력 상인보다는 주변 농촌 출신으로서 상업에 재능을 가진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도시가 발전하는 초기 단계에서는 원래부터 거주하던 토박이들이 도시의 유력자들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외부에서 들어온 상인들의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94p

노동력은 부족해져서 임금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영주는 임금 노동자를 이용하여 자신이 직접 경영하던 토지를 운영하기 힘들어지게 되었고, 이러한 토지조차도 농민에게 임대해 주게 되었다. 대신 영주는 농민들로부터 농산물로 받아 오던 토지 임대료를 화폐로 내도록 하였고, 이 화폐 수입으로 시장에서 농산물을 구입하였다. 이리하여 영주는 굳이 농민들을 속박시켜 놓고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렇게 되자 영주는 이들을 해방시켜 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여 농민들을 각종 부담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게 되었다. 이제 영주는 농민에 대해 경제적 권리인 임대료만을 받게 되었고, 과거처럼 농민을 신체적으로 구속할 수 있는 권리는 갖지 않게 되었다. 이로써 영주는 소작농들로부터 임대료를 받는 단순한 지주로 변화하게 되었다. 

97p

시행정관은 상층 시민들이 독점했으며 이들은 혼인 관계를 통해 강하게 결속했다. 이들의 목표는 귀족이 되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미 그 이전 시기에도 농촌의 토지를 구입함으로써 귀족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을 분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귀족 작위를 받기도 했다. 14세기에 들어서 귀족이 될 수 있는 다른 길이 열렸는데, 그것은 관직으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국왕의 권력이 확대되면서 많은 관료가 필요해졌는데, 이러한 관직에 진출함으로써 귀족이 될 수 있었다. 

100p

기존 교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으므로 기존 교회를 배척하고 개인적인 경건성을 추구하거나 이단이 나타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 지방에서는 신도가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류를 할 수 있으며 개인의 영적 체험을 강조하는 신비주의 운동이 널리 퍼졌다. 

120p

중세 말 국왕은 재정 수입을 늘리기 위해 성직자, 봉건 영주, 그리고 시민의 세 신분으로 구성된 신분제 의회를 소집하여 과세에 대한 국민의 협찬을 얻어 재정 수입을 확보했다. 이러한 제도가 가장 먼저 생긴 곳은 영국이었다. 

 프랑스의 경우 1304년 성직자에 대한 과세 문제로 교황과 대립하던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자신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세 신분으로 구성된 회의를 소집했는데, 이것이 프랑스의 삼부회였다. 프랑스의 삼부회는 백 년 전쟁 내내 전비 마련을 위해서 소집되었고, 국왕의 재정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삼부회는 15세기 말이 되어 왕권이 강해지자 소집되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소집된다고 하더라도 세금을 인정해 주는 거수기 역할만을 하게 되었다.

 절대 왕정의 한 요소로서 상비군과 관료제를 떠받치는 조세 제도의 확립을 들 수 있는데, 이런 점에서 백 년 전쟁은 큰 기여를 했다. 14세기 이전까지 프랑스에서는 신민 전체에 항구적으로 부과되는 세금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국왕은 자신의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자 국왕은 왕국을 방어하려는 자신의 노력에 모든 신민이 기여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신민의 기여, 즉 세금은 전쟁과 같이 '명백한 필요'가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어서, 처음 세금이 징수되었을 대에는 그 기간을 일 년으로 한정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지 않자 세금은 연장되었고, 빈번한 세금의 연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로 하여금 세금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14세기 말에 이르러 국왕이 "그 자신의 뜻에 따라"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동안" 그의 신민에게 과세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든 현실이 되었다.

 백 년 전쟁은 과세의 확립과 더불어 관료제의 확립에도 도움을 주었다. 세금은 세 신분의 대표 회의라고 할 수 있는 삼부회에서 결정되었는데, 삼부회는 과세를 인정해 주는 대신 세금의 징수를 국왕 관료에서 맡기지 않고 삼부회에서 선출한 사람들에게 맡겼다. 조세가 항구화의 길로 접어들었던 14세기 말부터 징세원은 일종의 관료가 되었고 실제로 국왕에 의해 임명되곤 했다. 이리하여 백 년 전쟁이 끝난 이후 프랑스와 영국은 강력한 국민국가로의 첫걸음을 내디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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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절대 군주는 어떻게 살았을까? - 근대 민음 지식의 정원 서양사편 8
임승휘 지음 / 민음인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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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분량의 책이지만 유럽 절대주의 왕정의 기원에 대해 명쾌하고 깊이있게 설명한다.

이런 문고판들은 수박 겉핣기 식인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아주 만족스럽다.

제목만 보고 유럽 절대 군주들의 일상에 관한 책인 줄 알았다.

오히려 제목을 "유럽 절대주의 왕정의 기원"이라 붙여야 할 것 같다.

중세 봉건주의에서 어떻게 왕이 모든 권력을 갖는 절대 왕정으로 넘어가게 됐을까?

저자는 16세기 군사 혁명 때문이라고 본다.

군비 경쟁이 일어나고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걷어야 하는데 이것을 뒷받침 하는 제도가 바로 관료제이다.

어떻게 세금을 걷을 것인가, 혹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자원을 어떻게 동원할 것인가로 정치 체제가 결정된다.

폭압적으로 국내에서 자원을 강탈한 프랑스나 독일 등은 절대주의 왕정을 거쳐 왕의 목이 잘렸으나, 자본이라는 형태를 통해 재원을 마련하고 또 지리적 여건 덕분에 대륙의 군사 경쟁에서 빗겨나 있던 영국은 중세 의회의 전통을 살려 민주정으로 안착된다.

군사적 경쟁을 무시해 버린 폴란드 같은 나라는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책을 읽는 내내 궁금했던 것은, 이미 수천 년 전에 절대 군주제를 확립한 중국 같은 동아시아 세계와 유럽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중국은 오래 전부터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은 황제라는 절대 권력자가 온 나라를 장악했고 과거라는 경쟁을 통해 귀족들을 관료제 안으로 흡수했다.

한국 역시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 오래 전부터 절대 군주정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왜 세계화의 시대가 되면서 동양은 서양에 패배하고 만 것인가?

한국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절대 강자의 우산 안에 너무나 오랫동안 안주했기 때문에 군사적, 산업적 경쟁력을 잃어버린 것 같고, 중국 역시 유럽 대륙이 치열한 군사 경쟁을 통해 성장하던 시기에 정체됐기 때문에 몰락하고 만 것인가?

중국과 유럽의 절대주의 체제 비교도 흥미로울 것 같다.

저자는 유럽의 절대주의가 군사적 긴장을 통해 유지된 매우 예외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유럽은 이런 군사적 경쟁을 통해 국민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19세기에 전 세계를 침략하러 나선 것인가?

절대주의 왕정의 기원과 몰락에 대한 흥미로운 고찰이었다.



<인상깊은 구절>

15p

경제적 위기나 전쟁, 지진,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의 반복과 같이 공동체 전체를 위협하는 위험 요소들은 절대 왕정을 위한 토대이다. 특히 중세의 신분제 국가에서 절대 왕정 국가로의 이행을 촉발하는 가장 좋은 계기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한 집단, 혹은 여러 집단들의 결합이 전체를 위협하는 경우일 것이다. 왕국의 한 신분 집단이 모든 이익을 독점하려 하고, 다른 신분 집단들은 이를 막을 만한 힘을 가지지 못했다면, 그들은 군주에 의지하여 지휘관으로서 그의 능력을 이용하고, 자신들이 지닌 권력의 중요한 부분을 포기하면서까지 왕의 개인적 위신과 신성한 국왕권에 도움을 받으려 할 것이다. 

21p

리슐리외 추기경의 오랜 바람대로 에스파냐 왕국이 무력화되었다고 해서 평화가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17세기인들, 그중 특히 귀족들은 전쟁을 혐오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전쟁에서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정당화할 기회를 보았고, 실제로 많은 가난한 귀족들이 참전했다. 게다가 전쟁은 이제 17세기 유럽의 여러 국가가 주관하는 일종의 기업 활동이 되었고, 이로써 전쟁과 관련된 산업의 황금시대가 열렸다. 농민 대중에게서 걷은 세금의 대부분이 군사 작전과 상비군의 유지를 위해 지출되었다. 평화는 언제나 무장 상태의 대치 상황을 의미했다.

32p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이후, 신자들의 구원을 책임지던 교회가 미신과 농촌 사회의 비정통적 형태의 신앙을 없애기 위해서 악마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다신교적인 감성을 축출하고 무서운 유일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전통적인 민중 문화의 일부가 사탄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 그토록 많은 마녀를 처형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은 처형의 주체, 즉 국가 공권력이 그만한 힘을 지녔고 동시에 문제에 개입하려는 확고한 의지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마녀사냥은 절대 왕정의 이념이 현실로 나타나는 무대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사적인 권력 행사가 공적인 국가 권력으로 대체되는 과정이며, 사회적 범죄와 그에 대한 공적인 처벌 방식의 승리였다.

 이 과정에서 국왕의 사법권을 행사하는 법관들은 종교적 일탈 행위에 강력하게 대응했고,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단일한 질서를 확립할 의무를 부여받았다. 그들은 마녀재판과 처형을 통해 마법에 대한 교회와 국가의 공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농촌 세계에 뿌리내린 오랜 전통을 붕괴시켰다. 중세의 농촌은 각 공동체마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지만, 절대 왕정의 등장으로 이러한 관행에 종지부를 찍으려 했다. 

64p

군대는 국민의 복종을 담보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게다가 군대는 왕권 강화에 대한 귀족들의 저항을 무력화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가난해진 귀족들은 국왕을 위해 봉사하기를 희망했다. 대선제후는 귀족들을 군 장교나 행정 관료로 등용시켰다. 브란덴부르크의 귀족들에게 군대에서의 진급과 성공은 최고의 영예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대선제후는 효율적인 조세 제도를 시행하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관료제를 발전시켰다. ... 유럽의 다른 절대 왕정 국가와 마찬가지로, 프로이센에서도 농민은 거의 모든 세금을 부담해야 했다. 이러한 정책이 성공할 수 있던 주요 원인은 융커 계급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킨 데 있었다. 1651년 이래 대선제후는 더 이상 어떤 참사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중요한 국가 사안들은 밀실에서 처리되었다. 개인 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대선제후는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처럼 집무실 통치를 수립했다. 군주는 이제 그의 동료들로부터 분리되었고, 자신의 집무실 비서를 통해 명령을 하달했다.

68p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는 칼뱅파 교회에서 자극받아 금욕주의적 개혁 운동을 펼친 루터파 경건주의자들의 도움으로 공공 교육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수행했다. 그것은 유용하고 순종적인 신민을 만들어 내기 위해 도덕적 감독과 신체 단련을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성공의 비밀은 칼뱅교회에서 먼저 실험된 규율 전략을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적용시켰다는 데에 있었다. 당시의 관찰자들은 프로이센을 '북구의 스파르타'로, 또는 거대한 감시자가 중앙에 위치하고 수감자들이 관리되는 거대한 감옥인 파놉티콘(벤담)에 비유했다.

 근대 초 유럽에서 중세 때부터 내려온 의회 전통이 그토록 완전히 붕괴되고 국앙 중심적 행정이 그토록 공고히 관료제화된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100p

사실 절대주의는 전쟁의 산물, 다시 말해 군사적인 우월 의지가 만들어 낸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끊임없이 이어진 대외전쟁은 국왕으로 하여금 예외적인 자금 조달 방법을 선택하게 했고, 전쟁과 그것이 수반하는 사회적 긴장이야말로 절대 왕정의 필수 조건이었기에 예외적인 방법은 반영구적 체제로 고착되는 경향이 짙었다. 즉, 전쟁이라는 위급한 상황은 예외적인 조건을 창출하며, 일상적 관행으로부터의 단절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절대주의 체제란 비정상적, 예외적 상황이 영구화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조세의 측면에서 이 점은 명확하다. 

 결국 절대 왕정이 추구한 왕권의 절대화는 결코 보편적인 원리가 아닌 예외적인 상황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절대 군주의 권력이 절정에 달할수록, 그것이 지닌 예외적인 상황 또한 극에 달하는 셈이었다. 중상주의 정책도, 과도한 세금도 엄청난 전쟁 비용을 감당해 내지는 못했다. 그 결과 절대주의가 사회의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고 해도, 절대 왕권의 절대성은 언제나 파산의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할 수밖에 없고, 전쟁 수행을 위해 끊임없는 재정 압박에 힘겨워 한 절대 왕정하에서의 국왕은, 몽테스키외의 말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함은 말할 나위도 없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113p

절대주의의 기원은 인구 과잉과 과잉 정착이 귀족이 토지를 장악하는 힘을 약화시키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14세기 서유럽 봉건제의 위기에 있다. 동시에 상업이 부활하면서 새로운 도시 상인 계급이 흥기했는데, 이들은 귀족이 정치권력을 독점하는 것에 도전했다. 이렇듯 농촌과 도시에서 농민과 상인들의 위협을 받자, 서유럽의 귀족은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국왕의 품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과 프랑스, 잉글랜드와 오스트리아에서 성립된 일련의 새로운 왕조들은 농민과 상인들에 맞서 귀족과 결탁했고 그들의 권력을 유지시켜 주었다. 앤더슨에 의하면 절대주의를 가능하게 한 사회적 토대는 바로 이러한 결탁이었다. 절대주의 국가는 "재충전되고 전환된 봉건적 지배 기구"였다. 반면 동유럽에서는 사회 경제적 조건이 명백히 달랐다. 미개척지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고 인구는 분산되어 있었으며 도시는 허약했다. 따라서 봉건제를 뒤흔든 것은 자생적인 내부의 위기가 아니라 서유럽의 절대주의가 제기한 군사적 위협이라는 외래적 요인이었다. 이러한 위협에 응답하기 위해 동유럽의 지배자들은 상비군을 건설하고 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자원을 끌어 쓸 수 있는 추출 기구를 집중시켰다. 그러나 농민과 상인 계급이 허약했고 절대 왕정의 이러한 맹습에 저항할 수 없었기에 절대주의는 특별히 거칠고 전제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다. 서유럽에서 절대주의가 귀족들에게 점차 쇠락하는 그들의 사회적 권력을 보상해 준 반면, 동유럽에서의 절대주의는 재판 농노제를 통해 귀족의 사회적 지위를 강화시켰다. 앤더슨은 국제적인 군사 경쟁이 행한 일정한 역할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근대 초 국가 형성을 기본적으로는 사회 경제적인 방식으로 설명한다. 

116p

"전쟁이 국가 형성과 변화를 이끌었다"는 제도주의자의 주장을 확인하면서, 이와 동시에 경제 발전의 수준이 군사 동원 전력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자원이 부족한 곳에서, 즉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에서 국가는 중앙 집중화된 추출 기구들을 통해 국가 구성원들로부터 필요한 자원을 직접 추출해 낼 수밖에 없다. 반면 자원이 풍부한 곳에서, 즉 경제적으로 앞선 지역에서 지배자들은 자본가들의 협조하에 필요한 자원을 끌어낸다. 일부 가장 강력한 국가들은 경제 발전의 이익과 국가 행정의 중앙 집중화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다. '국민 국가'의 형태가 격렬한 군사 경쟁을 버텨 낼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근대 자유 민주주의의 뿌리가 대부분의 유럽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중세의 헌정주의'(영국 의회는 이러한 중세 헌정주의의 대표적인 결과물이다) 즉 지방 정부와 의회기구 그리고 법치라는 전통에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나라에서는 헌정주의가 살아남아 민주화를 위한 기초를 제공했고, 다른 곳에서는 그것이 사라져 독재정의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가? 다우닝에 의하면 문제의 전환점은 바로 상비군의 창설을 유도한 16세기의 '군사 혁명'이었다. 용병으로 구성된 상비군을 일으키고 유지하면서 근대 초의 지배자들은 엄청난 조세 압박을 받았다. 프랑스와 브란덴부르크 프로이센과 같이, 국내에서 필요한 자원을 동원하려는 곳에서 신분제 국가의 대의 제도는 파괴되고 국왕의 통제하에 중앙 집중적 관료제로 대체되었다. 그 결과 '군사 관료제적 절대주의' 체제가 들어섰다. 반대로 잉글랜드처럼 지리적인 이유 때문에 군사 혁명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곳, 또는 자원 동원을 위해 다른 수단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곳에서는 헌정주의적인 제도들이 살아남아 19세기의 민주화를 위한 제도적 기초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국제적인 군사 경쟁의 필요성을 단순히 무시했던 폴란드와 같은 국가들은 정복당하고 파괴되었다. 결국 다우닝의 결론은 '독재와 민주주의'의 기원이 사회적인 것도 정치적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각 국가가 16세기 군사 혁명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달려 있었다.


<오류>

91p

그가 1740년 부친의 왕위를 물려받고 프리드리히 3세로 등극하자, 세계는 왕위에 앉은 철학자를 환영했다.

-> 프리드리히 3세가 아니라 2세다.

111p

반란을 응징하기 위한 자금이 필요했던 제임스 1세는 의회를 소집하는 것 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 제임스 1세가 아니라 그 아들 찰스 1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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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이해하는 중국문화 - 최신개정
김태만 외 지음 / 다락원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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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읽은 <일본의 이해>가 백과사전식 나열이라 지루했던 반면, 이 책은 중국 문화의 여러 측면들을 비교적 흥미롭고 깊이있게 잘 풀어쓴다.

여러 전공자들이 함께 쓴 책이라 그런지 분야별로 잘 요약이 되어 있고 특히 현대 중국의 역사와 문화 측면이 도움이 됐다.

중국의 명승지 소개하는 대목이 흥미로웠다.

가본 곳이라고는 북경 밖에 없지만 만리장성이나 만력제의 정릉 관람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중국 관광지에 대한 이미지가 좋게 남았다.

한반도의 44배 크기라고 하니, 과연 다양한 자연환경의 명승지가 존재하고, 5천년 역사가 어우러져 인문기행지로도 손색이 없을 듯 하다.



<인상깊은 구절>

47p

국민당은 중일전쟁이 본격화되었음에도 항일전쟁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인다. 방대한 국토와 인구를 기반으로 장기전을 펼칠 경우 일본에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종전 후 공산당 섬멸을 위해 국민당군의 전력 보전에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51p

문화대혁명이라 불리게 된 연유가 바로 이러한 문화계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 때문이었다. 마오쩌둥은 도시 청년들을 홍위병으로 조직하는 대중 동원의 방식을 취함으로써 문화대혁명의 폭발을 촉진했다. 홍위병은 당정기관과 공장을 습격하고 열차에서 무기를 약탈하여 무장 충돌을 일으켰다. 이는 민간에 뿌리박힌 마오쩌둥 개인숭배 사상과 사인방 세력과 결탁한 군부 린뱌오의 암묵적 지지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결국 텐안먼 광장에 몰려든 수많은 홍위병의 연호 속에서 마오쩌둥은 다시 베이징에 입성할 수 있었다.

98p

안사의 난 이후에도 140년간 당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전란의 피해가 화북에 집중된 반면 강남 지역의 피해는 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절도사 휘하의 사병화된 군사 집단의 횡포는 갈수록 심해져 이를 막기 위해 당제국은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국가재정이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절도사의 횡포와 더불어 조정에서는 환관의 전횡이 날로 극심하였다. 환관이 추밀사에 임명되면서 국가기밀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지방군을 감시하는 감군도 맡게 되었다. 그들은 안사의 난 이후 금병 통수권도 장악하여 그 세력이 더욱 막강해졌다. 마침내 더 이상 환관의 전횡을 참지 못한 조정에서는 환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또 다시 절도사의 도움을 얻어야 했다. 당 말기에 시행했던 소금 전매는 농민의 난을 자초하여 '황소의 난'을 야기시켰다. 그 이후 환관과 관료의 대립이 더욱 극심해지자 재상 최윤은 절도사 주전충으로 하여금 환관세력을 제압하게 하였으나, 907년 주전충은 당의 마지막 황제인 애제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여 후량을 세웠다.

121p

중국의 전통 수학은 실용에 중점을 두어 발전하였기에, 추상적인 이론 체계를 구축하는 것에 있어서는 많이 부족하였다. 다시 말해 천문학적 예측이나 상업 등의 실제 적용에 힘쓴 것이다.

138p

한대 이후 중국의 사상은 당대에 불교사상이 성행한 것을 제외하면, 청대까지 유가사상의 재해석이라는 사상의 흐름으로 일관되었다고 볼 수 있다.

139p

순자는 맹자의 성선설에 반대하여 인간의 본성이 악한 증거로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욕망을 지니고 있고, 이러한 욕망 때문에 사회혼란이 끊이지 않는다는 '성악설'을 주장하였다. 인간의 본성을 하늘의 일부로 여긴 맹자와는 달리 순자는 하늘을 '자연적인 하늘'로 파악하여 그것에는 아무런 도덕적 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인의 예로써 인간의 악한 본성을 바로 잡고 사회기강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유가사상의 큰 변화를 보여주었고, 이렇나 사상은 법가사상에도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141p

위진남북조 시기에 이르면 호족이라는 새로운 지배세력이 출현하게 되는데, 호족의 등장으로 황제지배 체제가 약화되고 사회질서가 혼란해짐이 따라 생사의 초월적 세계나 사후세계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던 유가사상은 쇠퇴하고, 인간의 고뇌와 갈등을 해소해 준 노장사상과 불교가 발전하게 되었다.

147p

한대에는 학자가 곧 관리가 되었고, 관리가 관직에서 물러나면 고향에서 다시 학자로서 학문을 하는 것이 이상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중국인의 의식 속에는 '교육의 목적'이 관리가 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즉, 유교 이념에 따른 교육은, 소인을 군자로 교육하는 것이고 군자가 되면 관료로서 입신양명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과거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당시 관학교육은 관료가 되는 과거 시험의 교육이 되었기에, 순수학문이나 진리탐구의 교육은 아니었던 것이다.

148p

송대의 학교 교육 역시 문신관료제의 발달로 인해 과거 시험의 합격에 중점을 두었기에, 일반교육이나 학문연구로서의 진리탐구는 어려웠다

 고대 관학교육은 조정에서 직접 관할하여 '사서'와 '오경'을 위주로 한 유가경전을 가르쳤고, 이를 통해 통치에 적합한 인재를 배양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유가사상을 기반으로 한 통치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발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가 학문연구를 할 만한 여건이 보편화되지 못한 이유로는, 종이가 발명하기 전이었으므로 책의 보급이 어려웠고, 또한 문자가 통일되지 않아 지역마다 차이가 있어서 지식 획득이 쉽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따라서 사학교육의 보급은 스승이 말하면 제자는 질문하는 형식이었는데, 바로 <논어>가 그 대표적인 강의 내용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학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도 스승의 절대적 권위가 확립될 수밖에 없었고, 스승의 학설을 무조건 순종하는 학풍이 지배했다. 이러한 사학의 영향은 중국에서 객관적인 학풍의 발전을 더디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76p

루쉰은 아큐를 통해 중국인이 수천 년 동안 살아오면서 버리지 못한 비열한 근성인 '정신승리법'을 들추어냈다. 아큐는 영원히 패배자의 지위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사람들에게는 털끝만큼의 신뢰감도 주지 못하며 자기변명이나 거짓말로 일관하면서 살아간다. 

206p

송 왕조의 후예였던 그가 이민족이 세운 원나라에서 관리로 등용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인품을 중시하는 서법의 특성상 예전부터 조맹부의 글씨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313p

오늘날 중국에서 기공이 성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요인 중 첫째는 의료의 혜택이 미비한 상황에서 전통적인 건강 요법은 자신의 건강을 지키는 첩경이 된다는 점이다. 중국 사회의 획일적인 체제에서 벗어나 정신적 자유를 지향하기에 적합한 사상적 논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지 않으며 개인적인 성격이 강한 기공 수련은 자신의 신체를 단련하고 정신적 위안을 추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전히 활성화되어 있다.

322p

사회주의 국가에 속하는 중국은 대중의 건전한 오락을 유도하기 위해 비용이 많이 들지 않으며 쉽게 즐길 수 있는 스포츠와 놀이를 국가적 차원에서 적극 권장하였다. 중국에서 태극권이나 사교춤, 탁구와 배드민턴 같은 활동이 활성화되었던 것도 그러한 원인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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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왕의 초상화 장서각 한국사(조선사) 강의 10
조선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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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초상화에 대해 사회적 의미와 그려지는 과정, 방식에 대해 설명한 책이다.

도판이 선명해 어진을 감상하기 좋았으나 6.25 당시 화재로 남아있는 유물이 몇 점 되지 않아 아쉽다.

꼭 6.25 때만이 아니라 수많은 어진들이 그려졌으나 여러 차례의 화재로 끊임없이 소실되고 다시 그려지는 과정이 되풀이 됐음을 알게 됐다.

목조 건물이다 보니 화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모양이다.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어진 자체를 왕과 동일시 하여 마치 임금을 보듯 초상에 사배를 했다는 점이 독특하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이 망한 이후에도 감히 사진 촬영을 못했다고 한다.

중국이나 일본이 추모와 기념의 의미가 강했던 반면 조선은 어진을 위패처럼 제사의 의미로 숭앙했고, 실제 모습을 그리긴 했으나 사후 그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매우 도식적이라 서양의 초상화처럼 예술적인 느낌이 없고 하나의 기념 사진 같다.

미술사적 의미 보다는 역사적 의미가 부각되는 것 같다.

어진의 제작 과정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으나 다소 지루했다.



<인상깊은 구절>

7p

신선원전에 모셔졌던 어진들은 전혀 촬영되어 있지 않았다. 그  까닭은 우리 민족의 어진에 대한 가장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사고에 기인하였다. 다시 말해 어진이란 단순히 왕을 그린 '그림'이 아니라, '왕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궁궐의 행사 장면을 그려 낸 기록화 어디에도 왕의 모습은 형상화되어 있지 않다. 왕 그 자체로 인식되었던 초상화에 있어서랴. 일제강점시대에도 함부로 사진기를 들이밀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외방에 있던 준원전이나 경기전 어진들은 촬영되어 있지만, 가장 본거지였던 이왕직 산하의 창덕궁 선원전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었을 것이다.

78p

고려시대 사원에서의 왕 및 왕비의 진영 봉안은 사적으로 명복을 빌고자 하는 성격이 강했으나 조선왕조의 진전제도는 초상 봉안 처소로서의 보존 및 제사, 이를테면 기념적 성격이 보다 짙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선조의 내세에서의 명복을 천도하고자 하는데 그 주된 의도가 있었으며, 후자는 어진 봉안 처소로서의 기념적 성격 내지는 제사를 통한 결속이라는 현실적 의도가 주목적이었다고 판단된다. 

81p

미천한 신분인 화원들은 비록 그림 재주는 훌륭했지만 임금 앞이라 너무 긴장하고 용안을 우러러보기 미안하여 자주 실수를 했다. 그러자 대신들은 사대부 화가인 조영석이 임금을 자주 뵈었으니 그에게 초본을 내게 하여 이를 화원들이 참고하도록 하는 것이 어떤가 하는 논의를 했다. 그러나 조영석은 펄펄 뛰면서 '화기는 천기'이므로 자신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하다 결국 의금부에 잡혀가기도 했다. 이런 일화는 당시 사대부 사회 일각에서 그림 재주에 대해 얼마나 경직된 사고가 팽배해 있었던가를 말해 준다.

115p

그 당시 조석진은 상중이었지만 그의 화법이 가장 정묘하다고 판단되어 결국 기용하였다. 숙종 때 김진규의 경우, 친부모의 상에는 차출하지 않았던 것과는 대조를 보인다. 이것은 조선조 말기 유교의 전통적 관념이 해이해진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사대부 신분인 김진규와 화원 신분인 조석진의 차이를 말해 주기도 한다. 참고로 채용신의 경우, 1901년 9월 부친인 채권영의 상을 당했을 때 그는 바깥 활동을 일체 거부했는데 여기에는 그가 철두철미한 유교적 기상을 지닌 화가라는 개인적 성향에 더해 50세까지만 해도 직업화가가 아닌 무관으로서 정산군수까지 지낸 이력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조석진과는 달랐던 그의 신분이 행동방식에 영향을 준 게 아닌가 싶다.

141p

숙종의 이런 처사는 겸양과 검소를 중시하던 조선조 선비들의 눈에는 지나친 처사로서, 상소가 잇달았다. 그중 사간 윤성교의 상소를 보면 비난의 요지는, 아직 건강한 숙종이 자신의 어진을 그려 강화에 모시고, 장녕전이라는 전호까지 내린 것은 지나친 일이라는 것과, 강화도로 봉안함에 있어 승정원이나 의정부도 모르게 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숙종이 왕위에 있는 동안 장녕전을 지어 자신의 어진을 봉안한 것은 전대 임금들이 줄 선왕의 어진을 모시는 데 그친 것과 비교할 때 참으로 과감한 처사였다. 하지만 장녕전이라는 새로 건립된 외방 진전에 숙종어진이 봉안되면서, 그 후 영조 역시 '계술'이라는 명분하에 만녕전에 자신의 어진을 봉안함으로써 결국 외방에도 현왕의 존재감이 확대되어 가는 효과가 이어졌다.

148p

이제까지 세초해 오던 초본을 굳이 오대산 사고에 보관하는 문제와 또 어진을 백관이 봉심할 때 절을 하도록 한 조처를 둘러싹도 사간원과 사헌부는 상소를 올렸으며, 특히 어유구는 숙종의 이런 처사를 빗대어 "스스로 명예를 좋아함이 지나치면 나중에는 무궁한 우려가 된다"라는 중국 송나라 구양수의 말에 빗대어 후대에 미칠 폐단을 심히 경계하였다. 하지만 숙종은 자신의 고집을 철회하지 않고 그대로 밀고 나갔다.

153p

임금 역시 그 초상화도 이미 보였으며, 또 그 형(조영복)의 초상도 보았는데, 아주 흡사했다고 하면서, 조영석에게 직접 붓을 잡으려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조영석은 이미 붓을 잡지 않아도 된다는 성교를 듣고 열심히 감동 일을 하고 있다고 아뢰며, "대저 기예를 가지고 위를 섬기는 사람은 고향을 떠나 사류의 반열에 끼지 못 한다"라는 <예기> 왕제에서의 구절을 빌려, 국가에서 신하를 부리는 데는 각기 방도가 있으니 도화서에 맡기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 이것은 사대부가 그림 재주로 임금에게 봉공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조영석의 논지와 상통하는 것으로서, 당시 사대부들의 그림에 대한 의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163p

정조가 표면적으로는 31세 영조어진 모사가 31세 정조어진 도사의 근거라고 했지만, 사실은 정조어진 도사가 먼저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 또 정조가 80세 영조어진에 큰 의미를 부여했지만 실제로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업의 중심은 자신의 어진 도사였음을 말해 준다고 풀이했다. 이런 면은 특히 정조가 영조의 어진 이모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어진 도사에서는 대신들과 직접 봉심을 거듭하고 7번이나 고쳐 그리게 한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고 보았다. 나아가 이런 점은 숙종과 영조의 선왕 어진 모사에 임하는 태도와는 대조적인 것이었으니, 즉 숙종이나 영조 연간에는 선왕의 어진 모사를 주로 먼저 진행하고, 자신의 어진 도사는 후에 진행했으며, 선왕의 어진 모사는 도감을 설치하여 장대하게 치르는 한편, 현왕의 어진 도사를 국왕권이 안정되었던 정권 말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공식적으로 진행하였다는 점 또한 지적하였다.

 결국 이런 면은 정조의 자기중심적 성향도 한 원인이었지만, 이제 숙종과 영조를 거치면서 어진 도사가 이미 공식적인 국가 행사로 정립되었고, 정국도 좀 더 안정된 국권을 보여 주게 되었으며, 현왕의 존재감 역시 점점 더 굳혀져 가고 있었다고 해석된다.

190p

의정부의정 이근명은 이 행렬을 이끌고 11월 추운 겨울에 평양에 가서 어진과 예진을 봉안하였다. 그러나 이 행렬을 보호하고 호위한다는 명분하에 일어난 폭행 사건, 물가상승과 잡세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은 더 커졌다. 즉 러일전쟁이 진행되고 있고 가운데, 물가가 오르고 수많은 세금 문제가 민생고를 가중시키는 상황에서 내탕금까지 쏟아부어 아직 황실이 건재함을 보여 주려 했으나 결코 효과적이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백성들로부터 충성심을 끌어내지도 못했다.

(대한제국 성립 이후 고종의 황제권 타령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195p

일본인 관료들은 조선왕실을 위하는 제스처로서 지속적으로 어진 화가를 추천하거나 제작에 관여하고자 하였다. 이를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던 고종은 1912년 서회미술회에 갓 입학한 김은호가 송병준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 재능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반신 사진 한 장을 김은호에게 주어 어진 초본을 그려 오게 하고, 그 결과에 상당히 만족했던 고종은 당시 이왕의 신분으로 창덕궁에 있던 순종어진을 도사할 것을 명하였다.

235p

원칙적으로 어진이란 단순히 예술작품이 아니라 왕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전통적인 사고하에 구본과 함께 세초하였다. 그러나 고종 연간부터는 어진에 대한 이런 관념은 상당히 희석되었으며, 고종의 경우 자신의 어진을 비공식적으로 그려 낸 화가 채용신에게 초본을 궁궐 바깥으로 가지고 나가는 것을 허락한 바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는 아마도 어진에 대한 엄중한 고정 관념은 더욱 취약해졌을 것이라고 보며, 당시 일본 유학을 다녀와 최고의 화가로 자타가 공인했던 김은호의 경우, '작가'로서의 자부심이 만만치 않았을 터이니, 자신이 그린 초본을 소지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245p

모두 공신호는 삭훈되었지만, 오늘날까지도 후손들에 의해 조상의 초상화는 보존되어 왔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초상화를 단지 하나의 예술작품이 아니라 조상 그 자체로 여겼던 우리 선조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333p

중국 황제상 중 무엇보다도 조선이나 일본과 너무나 다른 것은 분장 초상화일 것이다. <윤진행락도> 화첩에서 드러나듯 이 황제 초상은 당시 중국이 처해 있던 다종족과 다문화 현상을 반영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문화적 우위에 있던 한족에 대항하는 통치자로서의 모습, 자신의 혈통인 만주족의 자부심이 드러나는 활쏘기와 말타기 명수로서의 모습, 우위에 선 자로서 포섭 대상이었던 인도, 무굴, 티베트, 터키인으로 분장한 모습, 심지어는 서양인으로 분장한 모습 등 청나라 황제는 다양한 페르소나를 소화해 가면서 화면에 등장했다. 이런 분장 초상화는 하나같이 우의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상당히 정치적 선전성이 강한 작품들이다. 

 일본 천황상 역시 생전에 연고가 있던 사찰 내 영당이나 신궁에 봉안되었지만, 조선이나 명, 청대와는 달리 메이지 천황 전까지는 국가적 관리나 황실 전체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보다는 추모나 기념적 의도가 강했다. 따라서 화폭도 그다지 크지 않으며, 위풍당당한 군주의 모습을 형상화하려는 시도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조선시대 어진 그리기에서 가장 중요한 명제는 '터럭 한 올이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였다. 이 말은 중국 송대의 정이가 주창했는데, 원뜻은 제사를 지낼 때 초상화는 똑같이 그리기 어려우니 신주로 대체하라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일반인들이 조상의 초상화를 모시기 위해서는 비용이 많이 들며, 또한 초상화는 조상과의 닮음 여부로 시비도 많았으므로, "조금이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초상화를 제작하지 말고 나무로 만든 위패를 모시기를 권장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러나 원래의 이러한 제의적 명제는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결국 조형적 명제로 바뀌어 버렸다. 우리 화가들은 실제로 초상화를 그려 낼 때 털끝 하나라도 다르지 않게 대상 인물을 화면에 충실히 재현하고자 진력해 왔다. 보는 이들 역시 초상화에 대한 감식안은 참으로 엄격하였다. 당대 최고의 화가가 동원되고 그야말로 거국적 사업이었던 어진 제작에서조차 '칠분모(7할의 완성도)'면 가장 잘된 작품이라고 보았다. 이런 엄격한 잣대로 인해 초상화의 예술적 성취도는 더욱더 고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338p

일본의 경우, 천황상 제작에 동원된 화가들 모두가 중국이나 한국처럼 초상화 전문 화가들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에도 시대 이후에는 직업화가가 아닌 황자나 황녀들마저도 천황상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이들 아마추어 화가가 그린 작품들 대부분이 공식적으로 궁내청이나 근세 천황상 봉안처인 센뉴지에 당당히 봉안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들은 취신(取神)에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완성도 면에서는 아무래도 상당히 부족해 보인다. 이것은 중국이나 한국과는 달리 의례용 군주상이라 하더라도 국가적 차원의 행사보다는 사적 추모에 비중을 두었던 일본 특유의 사고에 기안한다고 생각된다.

340p

조선시대의 어진을 성격 짓는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어진을 하나의 예술작품이 아니라 '왕 그 자체'로 보았던 선조들의 인식이다. 어진 제작은 열과 성을 다한 국가적 행사였다. 매 단계마다 길일과 길시를 택하여 왕 이하 대신들이 봉심하였고, 진전에 봉안하기 위한 어진의 행차는 거의 실제 임금을 모시는 수준이었다. 어진 제작 때 초본이 너무 핍진하면 차마 세초하지 못하고 궤에 넣어 봉안하였으며, 또한 초본을 견본에 옮겨 그리는 상초 작업이 끝나 왕의 모습과 자못 닮게 되면 하루 일이  끝나고 물러날 때 어진 제작 관련자들은 모두 이 상초본에 대해 사배례를 올려야 했다. 왜냐하면 이젠 더 이상 '그림'이 아니라 '임금님'이었기 때문이다.

 '어진은 곧 왕 그 자체'라는 인식은 '어진은 바로 그 왕조의 상징'이라는 것으로 귀결되고, 이런 인식 아래 조선시대에는 전 왕조인 고려시대의 어진들의 보존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려 군주 초상이 발견되면 모두 세초하거나 묻어 버리도록 명했다. 조선시대 임금 중 가장 영명한 군주로 평가되는 세종이야말로 바로 전 왕조에 대한 이런 조처를 가장 가차없이 밀어붙인 왕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류>

100p

선조의 증손인 낭원군 간은 ~

-> 낭원군은 선조의 아들인 인흥군의 차남이므로 증손이 아니라 손자이다.

238p

첫째 능풍군은 일찍 죽었고, 둘째 능양군은 훗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이며

->능양군 즉 인조는 1595년생으로 정원군의 장남이고, 서자인 능풍군은 1596년생으로 둘째이다.

255p

숙종의 비는 김민기의 딸 인원왕후(1687-1757)이다.

->인원왕후는 김민기가 아니라 김주신의 딸이다.

271p

순조는 풍원부원군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

->조만영은 풍원부원군이 아니라 풍은부원군이다. 류성룡이 풍원부원군의 작위를 받았다.

278p

익종은 1819년 영돈녕부사 조인영의 딸과 가례를 올려

->조인영이 아니라 조만영의 딸과 혼인했다. 조인영은 조만영의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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