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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과 신들 - 개정판
주원준 지음 / 한님성서연구소 / 2018년 4월
평점 :
200 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책이지만 성경에 대한 인식을 바꿔줬다.
제목만 보고 막연히 구약시대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비판하는 책인 줄 알았다.
구약은 절대적인 경전이라기 보다는 사실은 근동의 여러 종교와 문화가 섞여 있는 일종의 신화라는 식으로 비판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저자는 개신교가 아닌 가톨릭 계열의 종교학자이고 기독교의 근본주의나 성경 문자주의 같은 저급하고 편협한 해석을 경계하고 수천 년 전 고대 근동인의 눈으로 성경에 그려진 절대신을 해석한다.
저자는 이러한 해석을 탈신화화, 재신화하라고 설명한다.
성경은 과학과 합리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의 언어로 쓰여진 게 아니라, 수천 년 전 자연에 영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근동인들의 언어로 자신들이 믿는 유일신을 설명한 경전이므로 신화의 껍질을 벗기고 그 안에 들어있는 알맹이, 즉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바로 탈신화화다.
지구 6천년 설을 믿는 근본주의자들은 기겁할 소리일 것이다.
고대 근동인들은 자연에 인격을 부여해 신으로 섬겼고 이스라엘인들은 그 신들을 모두 야훼 하느님의 피조물로 만들어 버렸다.
하늘을 신으로 섬기는 주변 민족들과 달리, 이스라엘인들은 하늘이 장소에 불과하다고 표현했다.
이러한 절대자, 유일신 사상은 당시로 보면 너무나 놀랍고 독창적인 관념 같다.
또 그 신적 개념이 보편적인 힘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인류 전체에게 영향을 끼치는 종교가 됐을 것이다.
비판적인 눈으로 성경을 볼 때는 성경이란 고대 근동의 잡다한 문화의 짜집기가 아닌가 싶었는데 오히려 그러한 다신론적인 강대국들 사이에서 매우 작은 왕국이었던 이스라엘인들이 유일신 개념을 어떻게 보존하고 지켜 왔는지를 알 수 있는 놀라운 경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전에 믿었던 내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본 좋은 시간이었다.
친절하게 어려운 개념들을 설명해 준 저자에게 감사하다.
<인상깊은 구절>
19p
신약 시대와 현대는 다르다. 과학과 기술 등이 발전하지 않았던 2천년 전 신약 시대 사람들은 신화적 세계관에 젖어 살았다.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신화의 언어에 퍽 익숙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성경도 그런 옛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쓰였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과학과 합리주의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이 고대의 신화적 언어는 무척 낯설기 때문에, 신약성경을 현대인의 눈으로만 읽으면 오해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과거 신화의 언어에 담겨진 속뜻을 잘 새겨서 이해해야 한다.
20p
볼트만은 신약 시대의 세계관이 신화적임을 지적했다. 이런 세계관은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과 크게 차이 나므로, 일종의 해석학적 여과 장치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현대인이 오해 없이 성경을 이해하려면 이런 신화의 언어를 벗겨 내서, 곧 탈신화화해서, 그 알맹이를 합리주의과 과학에 익숙한 현대인의 언어로 설명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신화의 껍질을 '탈각'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학계에 폭넓게 받아들여졌고, 현대의 성서학에서 꼭 가르치고 알아야 할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개념이다)
22p
성경의 언어는 태어날 때부터 객관과 증명에 기반한 과학의 언어와는 거리가 한참 멀고, 의미를 담아내는 신화나 이야기의 언어와 가깝다는 주장이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성경의 언어는 신화의 언어와 일맥상통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풍부한 상징을 담고 있는 신화적 언어는 성경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적절하고도 유용한 수단이다.
23p
하느님은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선택하였다. 이 백성은 수천 년에 걸친 고대 근동의 패권전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이름을 올려 놓지 못했다. 그들의 조상은 보잘 것 없는 떠돌이였고, 한때는 제법 번듯한 왕국을 세웠지만, 늘 큰 나라들의 눈치를 봐야 했고, 얼마 가지 못해 분단되었으며, 북이스라엘도 남유다도 제 힘으로 지켜 내지 못했다. 이런 이스라엘이 장구한 세월을 견뎌 내는 동안 주변 강대국들의 문물을 적잖게 받아들였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것이 구약성경에 고대 근동 신화의 자국이 크게 남은 이유다.
그런데 그들의 믿음만은 독특했다. 주변 강대국의 신화에서 많은 요소를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의 야훼 신앙에 맞춰 섭취하고 소화하여 자신의 종교를 지켜 내고 심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를테면,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하늘신'은 최고신이었지만, 유배 이전에 이스라엘인들은 언제나 '공간'의 의미로만 사용했다.
27p
종교사적 '지식'이 신자들의 '신앙'과 대립하거나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 보완하여 상승 작용을 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 줄 것이다. 신앙과 지식은 본질적으로 대립하지 않고 서로 보완하고 상승 작용을 일으키는 관계라는 성찰은 가톨릭 교회의 오래된 깨달음이다.
48p
이처럼 구약성경의 저자는 하늘이 인격화되는 표현을 삼간다. 고대 근동의 종교심을 고려할 때, 인격화된 하늘은 곧장 신격화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이 말하였다' 대신에 '하늘에서 하느님이 말씀하셨다'고 정확히 표현하는 것을 선호한다.
이렇게 하늘을 장소로 이해한 까닭은 하늘이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82p
예언자도 달신 숭배를 경고한다. 대표적인 신명기계 예언자라고 할 수 있는 예레미야는 일월성신을 섬겨 봤자 아무 소득도 없이 죽으리라고 경고한다.
89p
창세 1장은 이런 큰 신들을 한낱 피조물로 만들어 버렸다. 야훼 하느님은 단 나흘 만에 대제국의 높으신 신들 대부분을 '만드셨다'. 아무리 그들의 권능이 대단해 보여도 그것들은 그저 피조물일 뿐이다. 약소국 이스라엘의 사제계 신학자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90p
창세기 1장을 '창조주를 찬미하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로 서술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하느님의 창조는 이성적, 과학적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으로 찬미할 대상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은 창세 1장을 '큰 의미의 본문'으로 읽었다. 증명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야훼 하느님의 창조 행위와 함께 그분의 크나큰 권능을 '노래'한 것이다.
116p
현대인과 고대인의 종교심은 어떻게 다를까? 현대인은 '나일 강'과 '나일 강의 신'을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강이라는 '객관적 실체'와 그 객체를 신화화해서 태어난 '상상의 세계', 곧 '강의 신'을 구별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대 근동인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하늘신 없는 하늘'이나 '강의 신 없는 강'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은 '의미 없는 세상'이나 '사랑 없는 연인들'과 같은 말이다. 이런 심성을 공유한 고대 이스라엘인들이게 '이 세상'과 '이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의 관계를 퍽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창조주 하느님 없는 세상은 의미 없는 세상이다. 이렇게 고대 근동인들은 구체적인 강들, 이를테면 나일 강이나 유프라테스 강에서도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129p
인간의 의식 체계는 '통제할 수 없는 우연의 결과'를 '공정하다'고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이를테면 월드컵 본선 조 추첨을 할 때늘 생각해 보자. 제비뽑기의 과정이 극도의 우연성을 보장한다면, 이른바 '죽음의 조'에 걸리더라도, 그 결과를 수용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이런 극도의 우연적 결과에 천문학적인 돈의 운명을 맡기기도 한다. 전 세계 수많은 나라와 지역에서 다양하게 치러지는 로또를 보라.
157p
구원의 피가 온 세상과 온 인류를 깨끗하게 만든다. 셈족의 종교심을 공유하는 신약시대 이스라엘인들은 이런 가르침을 퍽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예수님도 이런 상징으로 구원의 신비를 가르치셨고, 그 가르침에 따라 신앙 공동체는 지금도 성찬례를 올린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이런 셈족의 상징을 몰랐다. 로마인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 그들은 구원자의 피로 온 세상의 죄가 씻긴다는 사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일부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곧, 성찬례를 '인육식사'로 오해하였고, 그런 오해가 흉한 소문을 낳았으며,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다. 결국 그리스도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로마의 박해가 촉진되었다.
이런 '문화적 차이'는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초대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비셈족에게 설득하고 증명하려고 많은 애를 썼고, 성찰을 심화시켰다. 그 과정에서 초대 그리스도교 신학이 발전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있다. 박해를 받는 입장이었던 그리스도교는 피에 대한 성경의 상징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잔인한 박해에 맞서 흘린 '순교자의 피'로 우리 모두가 깨끗해진다고 새롭게 고백하였다. 이는 교회의 '순교 신심'의 기반이 되었다.
159p
고대 근동인들은 의미의 세계에서 살았다. 신화가 제시하는 의미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 산의 푸른 나무 또는 길가의 큰 나무를 그저 '식물자원'이나 '목재' 따위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런 나무에 어떤 거룩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고 보았다. 나무에 어떤 '마음'이 서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