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유럽의 절대 군주는 어떻게 살았을까? - 근대 ㅣ 민음 지식의 정원 서양사편 8
임승휘 지음 / 민음인 / 2011년 8월
평점 :
120 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분량의 책이지만 유럽 절대주의 왕정의 기원에 대해 명쾌하고 깊이있게 설명한다.
이런 문고판들은 수박 겉핣기 식인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아주 만족스럽다.
제목만 보고 유럽 절대 군주들의 일상에 관한 책인 줄 알았다.
오히려 제목을 "유럽 절대주의 왕정의 기원"이라 붙여야 할 것 같다.
중세 봉건주의에서 어떻게 왕이 모든 권력을 갖는 절대 왕정으로 넘어가게 됐을까?
저자는 16세기 군사 혁명 때문이라고 본다.
군비 경쟁이 일어나고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걷어야 하는데 이것을 뒷받침 하는 제도가 바로 관료제이다.
어떻게 세금을 걷을 것인가, 혹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자원을 어떻게 동원할 것인가로 정치 체제가 결정된다.
폭압적으로 국내에서 자원을 강탈한 프랑스나 독일 등은 절대주의 왕정을 거쳐 왕의 목이 잘렸으나, 자본이라는 형태를 통해 재원을 마련하고 또 지리적 여건 덕분에 대륙의 군사 경쟁에서 빗겨나 있던 영국은 중세 의회의 전통을 살려 민주정으로 안착된다.
군사적 경쟁을 무시해 버린 폴란드 같은 나라는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책을 읽는 내내 궁금했던 것은, 이미 수천 년 전에 절대 군주제를 확립한 중국 같은 동아시아 세계와 유럽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중국은 오래 전부터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은 황제라는 절대 권력자가 온 나라를 장악했고 과거라는 경쟁을 통해 귀족들을 관료제 안으로 흡수했다.
한국 역시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 오래 전부터 절대 군주정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왜 세계화의 시대가 되면서 동양은 서양에 패배하고 만 것인가?
한국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절대 강자의 우산 안에 너무나 오랫동안 안주했기 때문에 군사적, 산업적 경쟁력을 잃어버린 것 같고, 중국 역시 유럽 대륙이 치열한 군사 경쟁을 통해 성장하던 시기에 정체됐기 때문에 몰락하고 만 것인가?
중국과 유럽의 절대주의 체제 비교도 흥미로울 것 같다.
저자는 유럽의 절대주의가 군사적 긴장을 통해 유지된 매우 예외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유럽은 이런 군사적 경쟁을 통해 국민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19세기에 전 세계를 침략하러 나선 것인가?
절대주의 왕정의 기원과 몰락에 대한 흥미로운 고찰이었다.
<인상깊은 구절>
15p
경제적 위기나 전쟁, 지진,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의 반복과 같이 공동체 전체를 위협하는 위험 요소들은 절대 왕정을 위한 토대이다. 특히 중세의 신분제 국가에서 절대 왕정 국가로의 이행을 촉발하는 가장 좋은 계기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한 집단, 혹은 여러 집단들의 결합이 전체를 위협하는 경우일 것이다. 왕국의 한 신분 집단이 모든 이익을 독점하려 하고, 다른 신분 집단들은 이를 막을 만한 힘을 가지지 못했다면, 그들은 군주에 의지하여 지휘관으로서 그의 능력을 이용하고, 자신들이 지닌 권력의 중요한 부분을 포기하면서까지 왕의 개인적 위신과 신성한 국왕권에 도움을 받으려 할 것이다.
21p
리슐리외 추기경의 오랜 바람대로 에스파냐 왕국이 무력화되었다고 해서 평화가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17세기인들, 그중 특히 귀족들은 전쟁을 혐오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전쟁에서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정당화할 기회를 보았고, 실제로 많은 가난한 귀족들이 참전했다. 게다가 전쟁은 이제 17세기 유럽의 여러 국가가 주관하는 일종의 기업 활동이 되었고, 이로써 전쟁과 관련된 산업의 황금시대가 열렸다. 농민 대중에게서 걷은 세금의 대부분이 군사 작전과 상비군의 유지를 위해 지출되었다. 평화는 언제나 무장 상태의 대치 상황을 의미했다.
32p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이후, 신자들의 구원을 책임지던 교회가 미신과 농촌 사회의 비정통적 형태의 신앙을 없애기 위해서 악마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다신교적인 감성을 축출하고 무서운 유일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전통적인 민중 문화의 일부가 사탄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 그토록 많은 마녀를 처형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은 처형의 주체, 즉 국가 공권력이 그만한 힘을 지녔고 동시에 문제에 개입하려는 확고한 의지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마녀사냥은 절대 왕정의 이념이 현실로 나타나는 무대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사적인 권력 행사가 공적인 국가 권력으로 대체되는 과정이며, 사회적 범죄와 그에 대한 공적인 처벌 방식의 승리였다.
이 과정에서 국왕의 사법권을 행사하는 법관들은 종교적 일탈 행위에 강력하게 대응했고,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단일한 질서를 확립할 의무를 부여받았다. 그들은 마녀재판과 처형을 통해 마법에 대한 교회와 국가의 공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농촌 세계에 뿌리내린 오랜 전통을 붕괴시켰다. 중세의 농촌은 각 공동체마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지만, 절대 왕정의 등장으로 이러한 관행에 종지부를 찍으려 했다.
64p
군대는 국민의 복종을 담보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게다가 군대는 왕권 강화에 대한 귀족들의 저항을 무력화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가난해진 귀족들은 국왕을 위해 봉사하기를 희망했다. 대선제후는 귀족들을 군 장교나 행정 관료로 등용시켰다. 브란덴부르크의 귀족들에게 군대에서의 진급과 성공은 최고의 영예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대선제후는 효율적인 조세 제도를 시행하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관료제를 발전시켰다. ... 유럽의 다른 절대 왕정 국가와 마찬가지로, 프로이센에서도 농민은 거의 모든 세금을 부담해야 했다. 이러한 정책이 성공할 수 있던 주요 원인은 융커 계급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킨 데 있었다. 1651년 이래 대선제후는 더 이상 어떤 참사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중요한 국가 사안들은 밀실에서 처리되었다. 개인 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대선제후는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처럼 집무실 통치를 수립했다. 군주는 이제 그의 동료들로부터 분리되었고, 자신의 집무실 비서를 통해 명령을 하달했다.
68p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는 칼뱅파 교회에서 자극받아 금욕주의적 개혁 운동을 펼친 루터파 경건주의자들의 도움으로 공공 교육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수행했다. 그것은 유용하고 순종적인 신민을 만들어 내기 위해 도덕적 감독과 신체 단련을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성공의 비밀은 칼뱅교회에서 먼저 실험된 규율 전략을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적용시켰다는 데에 있었다. 당시의 관찰자들은 프로이센을 '북구의 스파르타'로, 또는 거대한 감시자가 중앙에 위치하고 수감자들이 관리되는 거대한 감옥인 파놉티콘(벤담)에 비유했다.
근대 초 유럽에서 중세 때부터 내려온 의회 전통이 그토록 완전히 붕괴되고 국앙 중심적 행정이 그토록 공고히 관료제화된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100p
사실 절대주의는 전쟁의 산물, 다시 말해 군사적인 우월 의지가 만들어 낸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끊임없이 이어진 대외전쟁은 국왕으로 하여금 예외적인 자금 조달 방법을 선택하게 했고, 전쟁과 그것이 수반하는 사회적 긴장이야말로 절대 왕정의 필수 조건이었기에 예외적인 방법은 반영구적 체제로 고착되는 경향이 짙었다. 즉, 전쟁이라는 위급한 상황은 예외적인 조건을 창출하며, 일상적 관행으로부터의 단절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절대주의 체제란 비정상적, 예외적 상황이 영구화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조세의 측면에서 이 점은 명확하다.
결국 절대 왕정이 추구한 왕권의 절대화는 결코 보편적인 원리가 아닌 예외적인 상황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절대 군주의 권력이 절정에 달할수록, 그것이 지닌 예외적인 상황 또한 극에 달하는 셈이었다. 중상주의 정책도, 과도한 세금도 엄청난 전쟁 비용을 감당해 내지는 못했다. 그 결과 절대주의가 사회의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고 해도, 절대 왕권의 절대성은 언제나 파산의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할 수밖에 없고, 전쟁 수행을 위해 끊임없는 재정 압박에 힘겨워 한 절대 왕정하에서의 국왕은, 몽테스키외의 말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함은 말할 나위도 없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113p
절대주의의 기원은 인구 과잉과 과잉 정착이 귀족이 토지를 장악하는 힘을 약화시키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14세기 서유럽 봉건제의 위기에 있다. 동시에 상업이 부활하면서 새로운 도시 상인 계급이 흥기했는데, 이들은 귀족이 정치권력을 독점하는 것에 도전했다. 이렇듯 농촌과 도시에서 농민과 상인들의 위협을 받자, 서유럽의 귀족은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국왕의 품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과 프랑스, 잉글랜드와 오스트리아에서 성립된 일련의 새로운 왕조들은 농민과 상인들에 맞서 귀족과 결탁했고 그들의 권력을 유지시켜 주었다. 앤더슨에 의하면 절대주의를 가능하게 한 사회적 토대는 바로 이러한 결탁이었다. 절대주의 국가는 "재충전되고 전환된 봉건적 지배 기구"였다. 반면 동유럽에서는 사회 경제적 조건이 명백히 달랐다. 미개척지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고 인구는 분산되어 있었으며 도시는 허약했다. 따라서 봉건제를 뒤흔든 것은 자생적인 내부의 위기가 아니라 서유럽의 절대주의가 제기한 군사적 위협이라는 외래적 요인이었다. 이러한 위협에 응답하기 위해 동유럽의 지배자들은 상비군을 건설하고 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자원을 끌어 쓸 수 있는 추출 기구를 집중시켰다. 그러나 농민과 상인 계급이 허약했고 절대 왕정의 이러한 맹습에 저항할 수 없었기에 절대주의는 특별히 거칠고 전제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다. 서유럽에서 절대주의가 귀족들에게 점차 쇠락하는 그들의 사회적 권력을 보상해 준 반면, 동유럽에서의 절대주의는 재판 농노제를 통해 귀족의 사회적 지위를 강화시켰다. 앤더슨은 국제적인 군사 경쟁이 행한 일정한 역할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근대 초 국가 형성을 기본적으로는 사회 경제적인 방식으로 설명한다.
116p
"전쟁이 국가 형성과 변화를 이끌었다"는 제도주의자의 주장을 확인하면서, 이와 동시에 경제 발전의 수준이 군사 동원 전력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자원이 부족한 곳에서, 즉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에서 국가는 중앙 집중화된 추출 기구들을 통해 국가 구성원들로부터 필요한 자원을 직접 추출해 낼 수밖에 없다. 반면 자원이 풍부한 곳에서, 즉 경제적으로 앞선 지역에서 지배자들은 자본가들의 협조하에 필요한 자원을 끌어낸다. 일부 가장 강력한 국가들은 경제 발전의 이익과 국가 행정의 중앙 집중화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다. '국민 국가'의 형태가 격렬한 군사 경쟁을 버텨 낼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근대 자유 민주주의의 뿌리가 대부분의 유럽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중세의 헌정주의'(영국 의회는 이러한 중세 헌정주의의 대표적인 결과물이다) 즉 지방 정부와 의회기구 그리고 법치라는 전통에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나라에서는 헌정주의가 살아남아 민주화를 위한 기초를 제공했고, 다른 곳에서는 그것이 사라져 독재정의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가? 다우닝에 의하면 문제의 전환점은 바로 상비군의 창설을 유도한 16세기의 '군사 혁명'이었다. 용병으로 구성된 상비군을 일으키고 유지하면서 근대 초의 지배자들은 엄청난 조세 압박을 받았다. 프랑스와 브란덴부르크 프로이센과 같이, 국내에서 필요한 자원을 동원하려는 곳에서 신분제 국가의 대의 제도는 파괴되고 국왕의 통제하에 중앙 집중적 관료제로 대체되었다. 그 결과 '군사 관료제적 절대주의' 체제가 들어섰다. 반대로 잉글랜드처럼 지리적인 이유 때문에 군사 혁명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곳, 또는 자원 동원을 위해 다른 수단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곳에서는 헌정주의적인 제도들이 살아남아 19세기의 민주화를 위한 제도적 기초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국제적인 군사 경쟁의 필요성을 단순히 무시했던 폴란드와 같은 국가들은 정복당하고 파괴되었다. 결국 다우닝의 결론은 '독재와 민주주의'의 기원이 사회적인 것도 정치적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각 국가가 16세기 군사 혁명에 어떻게 대응했는가에 달려 있었다.
<오류>
91p
그가 1740년 부친의 왕위를 물려받고 프리드리히 3세로 등극하자, 세계는 왕위에 앉은 철학자를 환영했다.
-> 프리드리히 3세가 아니라 2세다.
111p
반란을 응징하기 위한 자금이 필요했던 제임스 1세는 의회를 소집하는 것 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 제임스 1세가 아니라 그 아들 찰스 1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