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천년의 시간을 걷다 - 벚꽃향 아련한 흥망성쇠 이야기 Creative Travel 3
조관희 글 그림 / 컬처그라퍼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다니던 도서관에 없던 책이라 무척 읽고 싶었는데 상호대차 시스템이 시행되면서 빌리게 됐다.

저자는 중국사 전공 교수로 알고 있는데 아마도 교토에서 1년을 지내면서 이 책을 낸 것 같다.

오래 머물러서 그런지 단순한 기행문에 머물지 않고 교토의 지역과 역사에 대한 많은 정보를 주고 있어 흥미롭게 읽었다.

역시 아쉬운 점은 도판.

색감이 선명하지 않다.

쓸데없는 개인적 감상을 많이 넣지 않아 읽기 편했고, 교토의 구석구석을 역사적 연원과 함께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 유홍준씨 책과는 또다른 매력이 있다.

도래인의 존재를 항상 강조하느라 약간의 거부감이 든 부분도 있었다.

천 년 수도 교토의 구석구석을 역사와 함께 살펴 본 좋은 시간이었다.



<인상 깊은 구절>

173p

항상 전장에서 적과 싸우는 장수들은 삶과 죽음을 일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간이 갖고 있는 본연의 것일진대, 아무리 용감한 사무라이라도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법. 아울러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적과 마주해 싸울 수 없기에 사무라이들은 살고 죽는 것을 그저 덧없는 한바탕의 꿈인 양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던 것이지요. 여기에 선불교가 일본에 들어오자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를 넘어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현세 초월적인 풍조가 일시에 풍미하게 되었습니다.

210p

인생사 오십 년

넓고 넓은 우주와 비교하면

꿈과 같이 허망하도다

한 번뿐인 생을 얻어

죽지 않는 자가 어디 있을까 

-오다 노부나가의 시 중에서-

211p

한 시대를 풍미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하늘의 뜻이라 할 수 있는 천운도 따라야 하는 법입니다. '전쟁의 신'이라 불릴 만큼 전투의 귀재였던 다케다 신겐에게도 적이 있었으니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연전연승 싸우는 족족 승리를 거두며 교토로 향하던 도중에 병사하고, 천하통일의 대업은 오다 노부나가의 손으로 넘어가고 맙니다.


<오류>

다이고 천황이 죽고 스자쿠가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외조부인 좌대신 후지와라노 다다히라가 다시 섭정을 맡았고

-> 후리와라노 다다히라는 스자쿠 천황의 외조부가 아니라 외삼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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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과 미술 - 서양미술의 갑작스러운 고급화에 관하여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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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의 물질성에 초점을 맞춘 연구서다.

어려운 제목과는 달리 내용이 아주 흥미롭고 상업적, 특히 동서무역의 관점에서 본 르네상스 회화의 폭발적 성장이라는 주제가 신선하다.

무엇보다 도판이 매우 좋다.

소장처나 크기 표시가 안 된 점이 아쉽지만 도판의 질이 정말 훌륭해서 한 권의 미술책으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과연 저자가 서문에서 도판에 특히 신경을 썼다고 얘기할 만하다.

전문 연구자인 만큼 분석의 깊이가 남다르다.

다소 어려운 개념, 이를테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추구한 명도의 깊이라는 부분은 잘 이해를 못했다.

이번에 루브르 가서 <암굴의 성모>라는 유명한 작품을 봤는데 (모나리자는 줄서서 한참 기다려야 해서 못 보고 말았다) 색감이 너무 어두워 책에서 보던 만큼의 큰 감동이 없었는데 이 책에 따르면 이런 어두운 분위기는 화가가 추구했던 것 중 하나라고 한다.

나도 항상 의문이 있긴 했었다.

왜 갑자기 르네상스 시대에 서양미술의 수준이 확 올라갔을까?

저자는 수준에 더해 양적으로도 엄청나게 폭발했다고 한다.

그저 몇몇 천재 화가들의 탄생 덕분이 아니라 이 모든 회화혁명이 중세 상업혁명을 통해 거부가 된 상인들이, 귀족과의 차별화를 통해, 혹은 흑사병으로 죽어가는 개인의 구원을 위해, 또 미술품 자체가 하나의 상품이 됐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유럽의 상인들이 직접 안료를 수입하여 거래했기 때문에 그 식견이 탁월해서 (당시로서는 장인 수준이었을) 화가들에게 색채에 대한 까다로운 요구를 했고 이것을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회화의 수준이 확 올랐다는 점이다.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안료들의 수입이 활발해지는데 이것을 취급하는 상인들이 미술을 통해 과시적 소비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잘 아는 분야인 색채감을 까다롭게 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도 바로 "상인과 미술"이다.

거상들은 평민이나 귀족과의 차별화를 위해 미술에 엄청난 투자를 한다.

흑사병도 매우 중요한 키포인트다.

"모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명구가 유행일 정도로 흑사병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가 일상화됐던 시절이라 중세인들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그 전에는 제단화 같은 공적인 미술품만 있었다면 추모 열기가 과해지면서 개인이 영혼 구제를 위해 캔버스화 등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게 용인되는 분위기로 바뀐 것이다.

비단 거상들 뿐 아니라 하층민들도 작은 패널화라도 갖길 원했고 상인들은 미술품을 상품으로 인식해 대량 생산이 되면서 가격도 떨어지게 된다.


왜 자본주의 경제가 승리하게 됐을까?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상품을 만들어 내고 그 과정에서 질적 수준이 높아져 사회가 계속 발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동양에서처럼 단순히 우아한 선비의 취미 정도로는 시대의 흐름을 선도하기 어려운 것 같다.

상업의 발달이 예술의 발전을 견인했고 결국 사회의 흐름도 바꿔 놓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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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읽는 독일문화
김홍섭 지음 / 전남대학교출판부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340 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인데 아주 유익하다.

저자가 독문학자인 것 같은데 미술에 대한 관심이 많은 분 같다.

대학출판사에서 이렇게 좋은 책이 발간됐다는 게 놀랍다.

책의 수준이나 내용은 당연한 거겠지만, 디자인이나 도판도 읽기 편하고 정말 선명하다.

도판의 선명도가 떨어지거나 어두운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도판이 정말 마음에 든다.

클림트와 뒤러의 자화상이 그려진 표지도 개성있다.

보통 미술이라고 하면 전근대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혹은 네덜란드, 스페인 정도이고 현대는 미국이나 영국 정도라, 독일 미술에 대해서 기술한 책은 거의 못 봤던 것 같다.

뒤러를 좋아하기 때문에 관련 서적을 읽은 기억은 난다.

제목은 미술로 읽는 독일문화이지만, 건축도 많이 포함되어 있고 넓은 의미의 독일 문화권인 오스트리아 문화도 잠깐 나온다.

역사와 미술이 따로 놀지 않고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어 독일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특히 앞부분의 성당 건축은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이 많아 100% 이해가 안 갔지만 많은 정보를 얻었다.




<인상깊은 구절>

44p

카페 왕조는 제후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시민계급을 지원하였다. 국왕의 지원을 받은 시민계급들은 정치 참여를 늘리는 한편 자신들의 종교적 열정과 물질적 부를 과시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성당 건축에 참여하였고, 그렇게 건립한 웅장한 성당을 자신들의 위상을 상징하는 기념비로 삼고자 하였다. 이 점에서 고딕 건축은 시민들의 자부심의 표현이자 도시들 간의 경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91p

대부분의 시민은 교역으로 부를 이룩한 교양 있는 상인들과 부유한 귀족들로, 그들은 문화적 삶을 즐기는 예술의 후원자들이었다. 뉘른베르크에는 금은 세공품과 인쇄술이 발전했고, 과학기구를 만드는 공방도 여럿 있었다.

 이런 풍부한 문화적 토양 속에서 성장한 뒤러는 북유럽과 남유럽의 회화전통을 접목시켜 독일 르네상스 시대를 연 장본인이자 1500년대 유럽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위대한 예술가로 평가된다. 

93p

자신의 작품에 AD라는 서명을 적어 넣을 정도로 자신의 예술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북유럽에서는 예술가가 일개 장인에 불과한 존재로 간주되고 있었는데, 뒤러는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그 곳 예술가들이 인문학자요 과학자로 존경받는 것을 보고 북유럽 화가들에게 이탈리아의 학문세계를 전파하는 한편 예술가에 대한 일반인들의 편견을 타파하기 위해 진력하였다. 

97p

뒤러는 두 번에 걸친 베네치아 여행을 통해 르네상스 미술로부터 인물의 형태나 자세를 따오는 데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미술원리를 철저히 이해하기 위해 미술이론 연구에도 몰두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어떤 화가도 미술이론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최고의 예술가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는 점에서 원근법이나 해부학 등 미술 이론에 몰두한 것은 더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단순한 장인이 아니라 과학자요 인문학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또한 뒤러는 고딕 미술이 도외시했던 인체의 아름다움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인간 형태가 가지는 미의 법칙성을 발견하기 위해 여러 고전을 연구하고 인체 비례에 대한 여러 가지 실험을 시도하였다.

100p

뒤러의 유화는 초상화가 대부분이고 제단화는 그리 많지 않다. 제단화라 하더라도 개인 예배당용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당시 진행되던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교회의 제단화 수요가 절대적으로 감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가로서 뒤러의 업적이 최고 수준에 도달한 것은 제단화라고 할 수 있다. 

119p

루터는 1522년 번역을 마친 독일어판 성서에 요한 계시록의 내용을 설명하는 목판화를 삽입하는 등 성서의 내용을 시각화하는데 많은 관심을 보였다. 모세 율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것은 단지 하느님을 대신하는 이미지에만 해당된다고 지적하고, 따라서 우상 숭배와 관련되지 않은 그림이나 조각은 허용될 수 있으며, 또한 하느님이 교회에서 성상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 명령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성상 사용에 대해 스스로 선택할 정신적 자유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성경의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은 하느님의 구원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긍정적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하였다. 나아가 미술의 교육적 특성에 더욱 주목하여 심미적이고 예술적 관심보다는 훈계나 선도의 목적으로 신앙적 내용을 형상화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미술의 교육적 의미에 강한 확신을 표명하였다. 이후 루터는 성인이나 성물 숭배 등에서 유래한 미신적인 그림을 제외한 교육적 목적의 종교미술을 허용하고 설교집이나 기도서, 찬송가, 교리 문답집 등에 삽화나 장식 등을 적극 이용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미술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특히 루터파가 득세한 독일의 경우 종교적인 변화가 예술가들의 활동을 억압하지 않으면서 미술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122p

번역출간된 성서에서도 삽화를 수록함으로써 일반인들이 성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수십 년에 걸쳐 루터의 성서 판매부수가 엄청났던 점으로 미루어 종교개혁에 대한 크라나하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해볼 수 있다.

131p

한스 홀바인은 바젤에서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나고 신교도들이 정권을 잡자 1532년에는 아예 영국으로 이주하였다. 스위스는 츠빙글리와 칼뱅이 급진적인 복음주의에 기반을 두고 이미지 숭상을 철저히 배격했기 때문에 성상파괴 행위가 극심했고 예술가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던 반면, 영국은 성공회가 교리나 의식 등에서 가톨릭과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예술 활동에도 별다른 지장이 없었다.

135p

근대에 접어들면서 시민들의 초상화가 크게 늘어났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도 시민 초상화의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이르면 상류층뿐만 아니라 평범한 중산층도 자신의 직업과 신분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게 된다. 신분이나 혈통이 아니라 어떤 직종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게 되었다.

138p

<대사들>은 주인공의 부와 직업적 활동을 과시하듯 드러내고 있지만, vanitas, 즉 지상의 모든 것이 부질없고 헛되다는 교훈을 동시에 담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자신의 직업을 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부를 신의 은총으로 생각하면서 늘 경건한 삶을 살고자 했던 당시 북유럽 상인들의 윤리의식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47p

다음으로 중요한 요인은 독일 제후들의 후원이었다. 사실 루터교회의 성립과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일반 대중들이 아니라 독일 내 각 영방국가의 제후들이었다. 그들은 루터의 반란 이후 초기에는 사태를 관망하다가 루터가 대중적 지지를 얻게 되고, 황제 카를 5세가 국제적인 문제로 인해 국내 문제에 간여할 여력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후에야 루터교를 받아들였다. 그들의 조치는 개인적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영토에서 성직자를 임명함으로써 주권을 확보하고, 교황청으로 흘러들어가는 엄청난 종교세와 수도원을 비롯한 막대한 교회 재산을 차지하는데 더 큰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153p

예수회는 신앙의 단순성과 교파 분열로 특징지을 수 있는 개신교와는 대조적으로 화려하고 장엄한 교회를 통해 가톨릭의 일치된 힘과 신앙의 웅대함을 드러내고 가톨릭의 개혁을 과시하고자 하였다. 또한 다양한 예술작품을 통해 가톨릭의 심오한 정신을 구현하고 관람자로 하여금 작품에 직접 참여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신앙심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바로크 미술은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해 역동적이고 극적인 효과를 추구했고, 이를 통해 현실감 있는 환영을 만들어냈다. 바로크의 넘칠 듯한 풍부함은 가톨릭교회가 되찾은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고, 역동적이고 극적인 효과를 통해 공감을 유도하는 방식은 가톨릭의 교화방식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195p

슁켈은 프로이센의 군사적 패배를 문화와 교양으로 대치시키고자 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의지를 구현하고 프로이센의 문화적 자의식을 고전적 이미지로 표현하는 한편 독일 통일에 대한 의지를 구현하고자 했다. 그의 감독 하에 이루어진 새로운 건축물들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한 독일인들에게 심리적 위안과 긍지를 심어주었고, 프로이센의 국가적 위신을 회복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223p

빈 분리파는 오스트리아 예술의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문화적 고립을 벗어나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고자 하였고, 모든 예술이 삶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삶을 예술적으로 고양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분리파는 건축, 회화, 조각, 공예, 장식 등 모든 예술의 상호작용을 주장하고 총체예술작품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장식과 공예를 회화나 조각의 하위 장르로 보지 않고, 건축을 중심으로 모든 예술이 동등하게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는 '총체예술작품'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227p

클림트는 '장식의 화가'였다. 200여점에 이르는 그의 회화 작품에서는 장식이 화면을 압도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그가 그린 수많은 여성상은 장식과 밀접하게 얽혀있었는데, 얼핏 보아 빈 상류사회 여성들의 구미를 맞추기 위해서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드로잉과 마찬가지로 그의 회화에도 역시 여성에 대한 클림트 자신의 개인적 환상이 존재한다. 그는 장식을 이용해 빈 사회에 걸맞은 격조 높은 분위기를 창조했지만, 그 세부 장식에서는 여러 가지 상징적 기호들을 통해 자신의 에로틱한 욕구를 표현하였다.

238p

림트가 우아하고 매혹적인 상류사회의 여성들을 주로 그렸다면, 쉴레는 어딘지 조야하고 저속한 여성들을 즐겨 그렸다. 클림트가 화려한 모자이크 장식 등으로 공간을 가득 채우는 데 비해, 쉴레는 화면의 인물을 위협하거나 때로는 압도할 정도로 공간을 비워둔다. 클림트가 장식을 통해 관능적 욕구를 간접적으로 우아하게 표현했다면, 쉴레는 관능적 욕구를 솔직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클림트가 고급스러운 문양과 기교적인 장식을 통해 빈 사회가 그리는 꿈의 세계를 표현했다면, 쉴레는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 탐욕스런 허위의식, 성에 대한 호기심 등을 고통스럽게 파헤침으로써 빈 사회의 모순을 폭로한다. 클림트가 평생을 두고 몰두했지만 간접적으로만 표현했던 것들을 쉴레는 보다 직접적으로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240p

쉴레는 한 편지에서 "별 같은 광채의 흔들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자신이 항상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고, 자신도 모르게 점점 더 빛나는 어떤 것들을 자신의 내부에서 생산해내고 있다고 말한다. 쉴레는 예술에 어떤 특별한 힘이 있으며 "나는 너무도 풍요롭기 때문에 나 자신을 남에게 나눠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이런 메시아적 믿음으로 인해 그는 자신의 영적인 무언가를 구체적인 예술 행위를 통해 표현하는 수단으로 자화상을 이용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의 자화상은 무엇보다도 자아도취적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258p

키르히너, 베크만, 마르크, 딕스 등 많은 표현주의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참전하였는데, 이는 당시 독일 지식인들의 보편적인 정서이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속물적인 부르주아 문화와 산업화로 인한 비인간성 등을 목격하면서 유럽이 이미 늙을 대로 늙어 구제불능 상태에 있다고 생각했고, 전쟁이 몰락기에 접어든 유럽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올 돌파구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전쟁을 높이 평가하고 전쟁이 일어나기를 고대하기도 하였는데, 마침 전쟁이 일어나자 새로운 유럽을 건설하는 역사적 현장에 참여한다는 생각에 너도 나도 자원해서 열광적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그들이 생각하는 그런 전쟁이 아니었다. 이전의 전쟁이 군대들 간에 밀고 밀리는 싸움으로 다소 낭만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면, 이번 전쟁은 자동화된 첨단무기들과 독가스 등을 이용해 군인과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대량학살을 감행하는 무자비한 전쟁이었다. 이에 낭만적인 꿈을 안고 참전했던 많은 지식인들은 전쟁의 실상을 직접 목격함으로써 열렬한 반전주의자가 되었다.

 키르히너 역시 자원입대했지만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신 쇠약에 걸려 요양소로 보내졌다.

263p

입체주의나 다른 화가들들도 추상적인 구성을 시도하였지만, 그들은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나온 적이 없었다. 칸딘스키는 여러 가지 색채와 선을 통해 형태를 왜곡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표현주의의 이념을 더욱 발전시켜 아예 주제를 고려하지 않고 전적으로 색채와 형태의 효과에는 의존하는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였다. 그는 순수한 색채와 형태의 심리적인 효과를 통해 정신적인 의미를 효과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이로써 '추상미술'이라 불리는 새로운 양식이 정식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3401p

키퍼는 자타가 공인하는 전후 독일미술을 대표하는 예술가이다. 전후 세대인 그가 일찍부터 독일을 대표하는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미국 화단의 호평 때문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독일에서는 과거의 아픈 기억을 건드렸다는 이유 때문인지 그 작품성을 떠나 별다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0년대 후반 미국에서 대대적인 키퍼 회고전이 개최되면서 그에 대한 인기가 급상승했고, 일약 세계적인 예술가가 되었다. 그에 대한 독일 내의 다양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는 추상회화가 주류를 이루던 전후 독일회화에 형상성과 역사성을 되살렸고, 독일사회가 금기로 여겨오던 나치 과거 문제를 직접 거론하고 역사적 트라우마에 대한 성찰을 통해 독일의 정체성 회복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독일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오류>

231p

<다나에> 도판의 소장처가 빈의 뷔르틀레 미술관으로 나온다. 그런데 검색해 봤더니 이 미술관은 1995년에 문을 닫았고 위키에 따르면 현재 이 그림은 레오폴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혹은 다른 자료에서는 개인 소유로도 나와서 소장처가 애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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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安東 金門 연구
이경구 지음 / 일지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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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너무 좋은 책인데 한자가 많아 힘들게 읽었다.

한자만 아니면 역사에 조금만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번에 쭉 읽을 수 있을 만큼 흥미로운 저작이다.

한자로 표시를 해야 뜻이 정확해지는 용어들이긴 하지만, 기왕이면 한글 표기를 같이 했으면 훨씬 가독성 있었을 것 같다.

읽을 줄 모르니 마우스로 네이버 사전 필기 인식기에 힘들게 그리면서 찾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19세기 세도정치로 나라를 망국으로 이끈 주범이라고만 생각했던 안동 김문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애써왔고 당대 최고의 벌열 가문으로서 부족함이 없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책을 읽는 내내 느낀 점은, 도대체 이덕일씨는 어느 포인트에서 노론이 정조를 죽였다고 추론했을까 하는 점이다.

정조야말로 18세기 후반 노론의 의리론을 국시로 정립시켰고 안동 김문을 국정 파트너로 삼아 척신으로 키우려고 한 사람이다.

정조는 왜 개혁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까?

문체반정도 정조니 그 정도로 끝났지 다른 왕이었으면 다 죽였을 것이고 사실은 패관잡기류의 변화를 정조가 지지한 것이라고 설명했던 책이 생각난다.

전혀 그렇지 않다.

정조는 원래 존주의리와 순수 주자학을 신봉했고 노론의리를 정론으로 생각해 자신이 국정을 주도해 나갔다.

그가 대표적인 척화가문인 안동 김문을 외척으로 선택해 척신으로 키운 것이다.

정조는 첫째 아들 문효세자의 처가로 김이중을 생각했고 아들이 요절하자 결국 훗날 순조의 처가로 김이중의 아들인 김조순을 선택해 국정을 맡긴다.

노론을 마치 악의 축처럼 인식하는데 노론의 순혈주의가 결국 조선을 폐쇄적이고 고립된 전근대 국가로 만들고 말았지만, 그 당시로서는 양난을 극복하고 모든 학설의 도전을 이겨내고 우뚝 선 가장 탄탄한 이론을 가진 집단이었다.

안동 김문은 김상용, 김상헌 형제로부터 시작된 척화의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김수항, 김창집, 김제겸 3대가 죽임을 당하고서 왕위에 올린 영조 시대에 조정은 물론 재야의 산림도 장악하게 된다.

단순히 권력욕에 취해 나라를 어지럽히는 가벼운 가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역사책에서는 자주 안 나와 존재감을 몰랐던 김창협, 김창흡, 김원행 등의 학문적 저변 확대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처음 알았다.

단순히 관료로서만 잘 나간 게 아니라 뒤에서 학문적으로 탄탄하게 받쳐주던 가문의 학자들이 있었기에 안동 김문이 조선 최고의 명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생각 둘

1) 역시 서울에 살아야 한다.

안동 김씨가 경파와 향파로 분기되면서 끝까지 서울에 세거했던 청음파는 인적 교류의 폭이 넓어지고 많은 정보를 얻으면서 자연스레 경화사족으로써 위상이 올라가게 됐다.

조선시대에도 지방 차별은 엄청났던 것 같다.

대한민국의 서울 중심주의는 비단 요즘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2) 가문이 잘 되려면 누대에 걸쳐 관료직에 나가야 하고 당대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은 가문의 부속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처럼 개인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시대와는 다소 맞지 않는 것 같지만, 부모가 강남 살아야 중심부 문화를 맛보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 좋은 직업을 얻게 되고 그것을 발판으로 자식에게는 더 많은 것을 물려주는 패턴이 일반적인 흐름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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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 계보와 구성원 조선왕실의 의례와 문화 5
원창애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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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궁금했던 조선 시대 종친과 의빈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는 책이다.

막연한 추론이 아니라 통계를 가지고 학술적으로 결론을 낸 책이라 신뢰도가 아주 높고, 무엇보다 이해하기 쉽게 풀어 써서 교양서로 바람직한 수준이다.

종친은 왕의 4대손, 즉 현손까지로 관직에 못 나가는 대신 종친부에서 관작과 녹봉을 줘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

5대손부터 9대손까지는 원친이라 하여 친진되는 대신 과거를 볼 수 있고 그 전에도 이미 음직 등으로 많이 출사해서 관료가 된 후에 문과에 급제하면 국가 정책에 관여할 수 있는 당상관으로 빠른 승진을 했다.

10대손은 원친에서도 배제되지만 그렇다고 나몰라라 하지 않고 국가에서는 역을 면제해 주는 등의 혜택을 부여해 왕실 후손으로서 위엄을 세워준다.

종친이 4대손까지 일종의 사회적 금고에 처해지는 반면, 왕의 외손들은 경제적 혜택과 더불어 관직에 나갈 수 있고 빠른 승진이 가능해 조선 후기로 올수록 문반 관료 가문으로 위상이 높아졌다.

대표적인 예가 정명공주와 혼인한 풍산 홍씨의 홍주원 가문을 들 수 있다.

종친이라고 해서 대를 거듭할수록 다 번성했던 것은 아니고, 후손들이 생원, 진사시에 붙어 관직에 나가서 관료가 되어야 하고 특히 혼맥이 중요했다.

좋은 가문과 혼인을 맺어야 사회적 위상을 유지하는데, 종친은 원칙적으로 사대부가와 혼인해야 하지만,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서얼이나 중인 가계와 혼사를 맺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사대부들이 첩의 자식과의 혼사를 꺼리기 때문이다.

본인은 적자라 하더라도 윗대에 서자가 있으면 서자 가문으로 인지되어 가격이 떨어지는 것이다.

왕의 후손이라 해도 어머니가 첩이면 관료로 나가기 힘들고 혼사도 격이 떨어지는 가문과 이루어지면서 중인 가계로 전락하는 경우도 간혹 발생했다.

조선 시대의 양반이란 집안에 적어도 관료나 관료 예비군이 있어야 하고, 혼인을 통해 가문의 격을 유지했다는 말이 이해된다.

아버지의 신분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신분도 사회적 지위 확립에 매우 중요했던 것을 보면, 확실히 조선은 완고한 신분제 사회였던 게 분명하다.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와는 매우 다르게, 가문의 한 사람으로 존재하고, 여러 대에 걸쳐 애를 써야 비로소 자손들이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게 되고, 그것도 영속적인 게 아니어서 당대의 노력이 없으면 다시 몰락하게 되는 걸 보면 전근대 사회에서 개인은 가문이라는 집단의 구성원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15p

조선 초기에는 태종이 외척의 정치 개입을 막아서 외척가문 성장이 어려웠으나, 16세기 이후는 왕실 혼인이 외척가문의 성장 내지는 유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조선시대 왕실과의 혼인은 현달한 가문이 그들의 族勢 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킬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41p

송에서 親 이 다한 5.6대 왕실구성원에 대한 배려로 단문친의 관직 제수와 종실 親試 를 제도화하여 그들이 왕실 후손으로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세종도 역시 단문친에게는 돈녕부 관직 제수라는 통로를 열어 주어 왕실 후손이 사회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44p

세종 종친 봉작법에 자품은 없지만, 정1품으로 규정되었던 대군과 군은 <경국대전> 종친 봉작법에서 무품으로 법제화하였다. 이것은 왕자가 왕세자, 대군, 군 등의 서열이 있긴 하지만 모계 출신에 상관없이 모든 종친과 관료와는 비교될 수 없는 지위에 있다는 것을 뜻하였다.

51p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종법은 승습할 적장자에게 후사가 없으면, 양자를 세워 승중하게 되어 있었다. 반면 조선 전기의 종법에 대한 인식은 적장자의 후사가 없으면 중자가 계승하고, 중자 역시 후사가 없으면 첩자가 계승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정통성이라는 명분이 아니라 혈엽에 입각하여 종법이 시행되었다는 증거이다. 결국 <경국대전>에는 당대의 친족 의식이 반영되어 있었다.

63p

17세기 중엽 이전 왕후보첩 수록의 기준점이 왕후의 고조부가 아니라 조부였던 것은 보첩이 미비된 것이 아니라 조부 이하의 자손을 친족으로 의식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영조대에 이르러서야 오복제에 의한 친족 의식이 왕실에도 나타났다. 영조는 왕실의 친족을 종성 4대손까지, 이성은 외손자까지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선원계보기략>에 잘 반영되어 있다.

67p

정조 역시 대동보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정조는 국왕으로서 탕평을 통해서 권력과 이념을 주도하려 하였으므로 왕실가문의 지원이나 영향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19세기에 들어서 권력의 주도권은 국왕에게서 세도를 장악한 관료들에게로 넘어갔다. 이러한 정국하에서 국왕은 공적으로는 국가 기구의 수장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왕실가문의 대표자로 전락되었다.

 더욱이 조선 후기의 왕실구성원은 계속 쇠락해 갔다. 선조대 이후로 종친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효종, 영조, 정조, 순조 등의 소생 왕자군은 왕위를 계승할 원자 1명만 두었으며, 숙종이 낳아 장성한 왕자 두 사람은 모두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는 종친이 거의 없었다.

76p

사왕 자손은 일련의 조처를 통해서 완벽하게 왕실구성원이 되었다. 태종이 이들을 선원세계에서 배제했던 정책이 이때 논란 없이 폐지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사왕 자손이 더 이상 왕위 계승권 경쟁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왕의 4대손까지 종친으로 봉작하더라도 고종대에 와서 사왕 자손들에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사왕 자손들에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사왕 자손들에 대한 군역이나 천역 면제는 12대 손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12대손까지라는 제한이 큰 의미가 없었다. 이들은 선원의 지파로 이미 대수에 상관없이 국역에서 면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이들을 왕실구성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쇠락한 왕실을 재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사왕 자손을 포함한 왕실 후손이 하나의 거대한 가문임을 보여 줌으로써 왕실이 허약하다는 인식을 불식키시고 왕권의 위엄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103p

얼마 되지 않는 종친도 역모에 연루되는 자가 많아서, 종친이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다. 특별히 조선 후기에 종친의 정치적 희생이 많았던 것은 왕통의 정당성이 약하였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조선 후기에 왕후에게서 난 적장자가 왕통을 이은 예는 현종과 숙종뿐이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대부터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왕실 내부의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하였다. 

108p

이주가 자신의 서녀를 서자의 아들에게 시집보내자, 종친들이 이를 불편하게 여겼다. 이에 대해서 성종은 종친이라도 천첩 소생을 명문가에 억지로 혼인시키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당시에 이미 종친의 적서를 막론하고 반드시 사족과 혼인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이것은 종친이 지체 낮은 집안과 함부로 혼인하여 왕실의 권위를 실추시킬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종부시에서는 종친의 혼사가 원만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단속하고, 종친과의 혼사를 거부하는 타당한 이유가 없을 경우에는 처벌까지 하였으나, 당시 사회적 통념을 무시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111p

서자 출신 종친이 대부분 서자 혹은 중인가문과 혼인한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하여 종친은 적서와 상관없이 사족과 혼인해야 한다는 규정이 반드시 지켜진 것도 아니었다. 신분제 사회의 혼인에 있어 家格 은 무시할 수 없다. 가계가 서자 계통인 경우 그 집안의 가격이 점차 낮아지기 마련이다.

112p

영순군의 활발한 정치 활동은 그의 자손들이 명문가와 혼인을 맺을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결국 종친으로 가격이 높은 가문과 혼인하고 그 후손들이 번성할 수 있으려면, 첫째, 종친이지만 정계와의 긴밀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둘째, 서자 가계 출신보다는 적자 가계 출신이어야 했다.

184p

왕후를 배출한 성관끼리 서로 혼인 관계를 맺거나, 왕후가문에서 지속적으로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것은 혼인이 사회적 지위를 형성 유지하는 데 중요 요인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190p

17세기 현종비 이후 선대 부계 친족 특히 왕후 부친 형제, 종형제 등이 관원인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사실은 왕후가문이 명문가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부원군 이외의 외척가문 출신 관료가 관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여기에다 왕후의 모계 선대 친족까지 보태진다면 왕후의 친인척이 왕후 책봉 이전에도 정치 세력화되어 있었거나 혹은 그럴 가능성이 배태되어 있었음을 밝힐 수 있다. 이것이 17세기 외척이 조선 전기의 외척과는 다른 면모이다.

201p

두 왕후의 친족은 관직 진출이 용이하긴 했으나,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당상관으로서의 승진은 많지 않아서 척신정치로 발전되지는 않았다.

205p

정희왕후는 수렴청정 당시 원상과 대신들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성종 즉위 전부터 원상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성종이 즉위한 후 정희왕후의 남동생 윤사흔이 원상이 되었다. 정희왕후는 원상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대신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여 겸판서 제도를 활용하였다. 정희왕후의 친족으로 정국 운영에 참여하였던 사람은 극소수이며, 인척 중 몇 사람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순원왕후의 친족이 대거 관직에 진출하고, 그중 많은 인원이 당상관에 포진되었던 것과는 달리 정희왕후의 측근에 있었던 친족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조선 전기만 해도 수렴청정 제도가 비교적 잘 운영되어 한 가문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제도적으로 수렴청정이 미비된 상태라 그럴 수도 있고, 정희왕후가 측근정치를 하지 않고 대신들과 같이 국정을 운영하는 현명한 선택을 해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조선 후기 순원왕후 시절의 세도정치와는 매우 비교되는 모습이다)

212p

조선 전기 국왕의 외손은 문과 합격자 인원이 매우 미미하였으나, 선조대 외손의 문과 합격이 급증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16세기 이후 왕실 인척의 문과 합격이 급증하는 것은 문과를 통한 관계 진출이 완전히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문과에 합격한 후에 관계에 진출해야 참상 청요직을 획득하고, 아경 이상의 대신으로 승진이 용이해지는 관료 체제가 정착되었다. 그러므로 왕실 인척도 역시 문과를 통해서 관직에 진출하려 했다.

 둘째, 왕후가문이나 국왕 외손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태종의 외척 억제 정책이 지속되다가 중종, 명종대에 이르러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사림정치가 활발해지자 사림가문 외척의 정치 참여도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왕후가문에서의 관직 점유율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247p

국왕의 4대손까지는 왕실 근친으로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친진된 이후 국왕의 원친은 사회적 지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원칙적으로 과거를 통해서 관직에 나가야 했지만, 이들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완전히 끊기는 것은 아니었다. 친진된 이후 관직에 나가지 못한 왕실 원친은 16세가 되면 충의위나 족친위에 소속되어 군직을 받을 수 있었으며, 잡역도 면제되었다. 국가에서의 경제적 지원이 있을 때에 왕실 후손들은 손쉽게 과업에 힘쓸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국왕과의 촌수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명문가와의 혼인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높았고, 서울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인적 교류의 폭도 넓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여건은 원친이 문과에 합격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252p

친진되어 왕실 종친의 지위에서 벗어나면, 원친은 그 이전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여야만 했다. 특수 병종에 입속하여 서반 관직을 받는 것으로는 양반으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야 했다.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하는 방법 중 하나가 생원, 진사를 획득하는 것이다.

 왕실 종친의 지위에서 벗어난 원친 가계에서는 우선 생원, 진사를 획득하여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1차 목표로 삼았을 것이다. 생원, 진사를 획득한 이후 문음으로 관직을 획득하고, 청요직과 당상관으로 승진하기 위해서 문과에 응시하였다. 

257p

 원친이 문과에 합격하여 많이 활동하던 시기는 조선 후기 인조대에서 정조대까지로 치우져 있었다. 이 당시에 왕실은 국내외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국외적으로는 전쟁을 겼었고, 국내적으로는 왕실의 정통성 문제를 정립해야 했으며, 당쟁정치로 인한 페혜도 컸다. 또한 왕실 후손이 귀한 시기에 국왕들은 자신의 지지 세력을 필요로 하였다. 정계에서 활동하는 왕실 후손들이 국왕의 지지 세력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후기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국왕들은 능력이 있는 원친에게 아경 이상의 관직을 제수하여 정계를 이끌어 가게 하였다.

 그러나 10대손 이하 문과 합격자가 정계에 많이 나간 시기는 19세기였다. 이 시기는 척신 세도정치가 형성된 시기였다. 그러나 왕실 후손 관료들이 세도정치의 핵심이 될 수는 없었다. 정3품 당상관까지 승진되기는 하였으나, 척신 세도가들이 왕실 후손에게 아경 이상의 관직을 제수하지 않아 정국 운영에 참여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258p

조선에서 사족으로 인정받으려면 적어도 가문 내에서 생원, 진사가 배출되어야 한다. 중종은 4조 이내 6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자가 있어야 하고, 문,무과 합격자의 자제 그리고 당사자가 생원, 진사이어야 사족이라 할 수 있다고 규정한 바가 있다. 이 규정은 전가사변이란 형률에서 면제될 수 있는 범위의 사족을 언급한 것으로, 좁은 의미에서 사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규정을 확대하면, 대수는 차치하고라도 가문 내에 6품 이상의 관직자, 문,무과 합격자, 생원,진사 등이 있어야 사족 행세를 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사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가문 내에 관료나 관료 후보군이 존재해야 된다.

261p

안원대군파의 생원, 진사와 문과 합격자는 시기적으로 17세기 이후에 처음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안원대군파의 생원, 진사와 문과 합격자의 거주지는 거의 정주라는 점이 주목된다. 정주는 평안도 지역으로 사족이 드물고 상업이 성행한 지역이었다. 중국의 명과 청이 교체되자, 평안도 지역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이 같은 국제 정세의 변화로 서북 지역이 국방상 요지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이곳에 사는 지역민들을 성리학적으로 교화시키고, 인재를 등용하여 변방의 안정을 꾀하고자 하였다. 특히 문과, 무과의 경우에는 道科 라는 이름으로 함경도과와 평안도과를 신설하여 그곳 지역민만을 대상으로 시험이 시행되었다. 서북 지역민에 대한 교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생원, 진사나 문과 합격자가 급격히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정주에 세거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안원대군파 역시 그러한 경우이었다.

 관료가문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생원, 진사의 배출이나 문과 합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문과 합격자가 연속적으로 배출되어야 핵심 관료가문으로 성장해 갈 수 있었다. <표23>에서 10명 이상의 문과 합격자를 낸 17개 파가 핵심 관료가문의 전부라 할 수는 없다. 문과 합격의 연속성이 강하게 나타난 가계만이 핵심 관료가문으로 성장하였다. 

270p

그가 늦게 관계에 나가서 80세가 넘을 때까지 관직에 머물 수 있었던 것은 정계에 영향력이 있는 인물들과의 깊은 교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이수광과 그의 형들은 관직에 나가지 못했으나, 이유간이 교유한 인물들은 선조, 광해군, 인조 때 정계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다. 

275p

이경석은 최고 엘리트 관원의 승진 경로를 그대로 밟았다. 문과에 합격한 지 7년 만에 당상관에 오른 것은 초고속 승진이었다. 이경석이 참상 청요직을 두루 거쳐서 당상관에 빨리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지적 능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인이 주도하는 정계에서 관료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활동 시기에는 정치적인 장애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형 이경직과는 달리 참상 청요직을 거쳐 바로 당상관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290p

이천수 집안에는 삭과를 당한 인물이나 역당으로 몰린 인물이 있기는 하나 조선 후기까지 문관 관료가문으로서의 문지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이경직, 이경석 가문과는 달리 노론가문으로서 정치적인 부침이 적었기 때문이다. 

307p

이처럼 무과를 통한 무반 관료를 6대 이상 지속적으로 배출하는 무반가문임에도 무반 벌열가문으로는 성장하지 못하였다.

 무반 벌열가문들은 무반 고위직 진출자가 많이 배출되는 동시에 왕실 또는 종실과 외척 관계를 이루거나 다른 무반 벌열가문과의 통혼 관계를 통해서 벌족화되는 경향이 있다. 결국 무관가문이라고 하더라도 파계 내에 동반 관료가 포진되어 있을 때 무반 벌열가문으로 성장하기가 수월하였다. 대장직은 도성을 지키고 국왕을 시위하는 군영의 최고위직이었다. 그러므로 국왕의 측근이거나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당대 핵심 동반 관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이들이 대장으로 발탁될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파계 내에 핵심 동반 당상이 다수 존재하는 왕자군 파계 내의 무관가문에서 대장직이 주로 배출되었다. 화의군파의 경우에는 문과 합격자가 적었기 때문에 그만큼 가능성이 적을 수밖에 없다.

327p

중인 가계가 왕자군파 내의 절손된 계통에 끼어 들어갔다. 18세기 이후 족보의 간행이 성행되면서 양반으로 행세하기 위해서는 족보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따라서 족보를 위조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전주이씨의 성관으로 활동하던 중인 가계가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왕자군파의 가계와 연결시킨 것으로 가정할 수 있다.

343p

18세기 이후 국왕 자손이 귀해져서 종친의 규모가 급격히 축소되었다. 세도정치하에서 국왕은 왕실 후손의 단합된 모습으로 왕실의 권위를 지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간 왕실구성원 중심으로 왕실보첩을 편찬하던 것을 <선원속보> 라는 형식으로 고쳐 대수에 제한 없이 왕실 후손 모두를 등재하고자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고종은 조선 초 왕실 후손에서 의도적으로 제외했던 4왕 자손까지 왕실 후손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348p

외척의 직역 분포에 있어 명종비인 인순왕후 이후로 당상관 점유율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전기 태종의 외척 견제 정책이 효력을 상실한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왕실이 핵심 관료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핵심 관료가문이었다고 하더라도 왕후를 배출한 가문에서 당상관이 양산된다는 것은 결국 외척이 주요 정치 세력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349p

조선 전기 왕후가문에서는 문과 합격자 배출이 매우 저조하지만, 16세기 이후에는 왕후가문에서도 문과 합격자 배출이 많아지고 있다. 이것은 첫째, 문과 합격 이후 관계에 진출하는 것이 청요직을 획득하고 아경 이상의 대신으로서 정국 운영에 핵심이 되는 관료 시스템이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왕후가문이나 국왕 외신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태종의 외척 억제 정책이 지속되다가 중종, 명종대에 이르면서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척족정치가 행해진 문정왕후 가문의 관직 점유율이 14.5%이다. 17세기에는 왕후가문의 관직 점유율이 대부분 25%를 넘으며, 특히 세도정치기에는 70% 이상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350p

문과에 합격한 이후에는 승진에 어떠한 장애도 없이 아경 이상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국왕의 외손은 과거가 아니라도 25.8%는 당상관직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국왕의 외손이야말로 핵심 관료로 승진할 수 있는 부류였다.

352p

원친이 문과 시험에 합격하고, 지속적으로 문관 관료가문이 되기 위해서는 종친이지만 정치적인 활동 영역을 넓혀야 한다. 종친은 원칙적으로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있지만, 반정이 있을 때마다 종친이 개입되어 있었다. 적절한 정치 참여를 통해서 그들의 정치적, 사회적 지위를 확보해야만 명문가와의 혼인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종친의 지위에 있을 때에 정치적 기반이 확고해야만 친진된 이후에도 왕실 후손이 기댈 수 있는 기반이 된다. 그 기반이란 다름이 아닌 문관 혹은 음관으로라도 관직에 나갈 수 있는 여건 형성이다. 예를 들면 덕천군파의 이유간은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음관으로 관직에 나갔다. 다행히도 그의 두 아들이 문과에 합격하면서 관료가문으로 기반을 마련하였다. 특히 이유간의 경우 왕실의 친인척, 학맥 등의 네트워크가 폭넓어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교유하였다. 그중 가장 비중이 컸던 것은 서인계였다.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그 가문의 출셋길이 열렸다.

 화의군의 가문은 무반 벌열가문으로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화의군이 정변에 연루되면서 가문의 문지가 약해서 무반 벌열가문과의 혼인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파계 내에 문관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무반 벌열로 발전한 효령대군파 같은 경우는 갈래는 같지 않더라도 문관이 왕성히 배출되는 친족들이 있었다. 문관들의 후원이 전혀 없는 화의군파는 지속적으로 무관 관료가문이긴 했으나, 벌열가문으로 발전되지 못하였다.

 왕자군파 내에서 기술직 중인가문을 형성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 모계가 천인이거나, 서얼인 경우 일시적으로 중인의 지위에 있을 수는 있다. 



<오류>

87p

정종의 장남 이원생은 언제 태어났는지가 확실하지 않다. 이선생처럼 11세쯤 종반직이 처음 수여되었다면, 이원생은 1402년(태종2) 전후에 태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추론이 맞다면, 1400년 정종이 동생인 정안군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왕위를 전해 줄 때에는 명실상부한 정종의 친자는 없었다.

-> 다른 자료를 찾아보면 1392년생, 1393년생,1399년생 아들들이 여럿 존재한다. 어떤 게 맞는 건지 좀더 찾아봐야 할 것 같다.

89p

고려적인 관점에서 보면 정종의 아들들은 부정윤에조차도 제수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실록에서는 정종의 자녀들을 거론할 때마다 궁인 소생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궁인의 소생들을 소군이라 하여 봉작하지 않았다. 이들은 대부분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야만 하였다.

->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정종의 후궁 성빈 지씨와 숙의 지씨는 자매 사이로 고려 시대 재상을 지낸 지윤의 딸들로 나온다.

그녀들의 언니는 정종의 형 진안대군의 부인인 삼한국대부인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문벌가의 딸들인데 이 책에서는 전부 궁인으로 나오니 헷갈린다. 궁인이었다면 성빈이라는 직첩도 못 받았을 것 같다.

207p

장경왕후의 형제 윤지임이 인종의 외삼촌으로서 문정왕후를 견제하려다~

-> 장경왕후의 형제는 윤지임이 아니라 윤임이다.

256p

특히 이경여와 이이명은 조부와 손자로서 정승까지 올랐다. 이건명과 이이명 역시 6촌지간이었다.

-> 이경여의 아들 이민적은 작은 아버지 이정여의 양자로 갔고, 그 아들이 이이명이다. 이건명은 이경여의 아들 이민서의 아들이므로 실제로는 4촌이고, 족보상으로는 6촌이다. 그런데, 이이명은 다시 이경여의 아들인 이민채의 양자로 갔기 때문에 결국 둘은 6촌이 아니라 4촌이 맞는 것 같다.

283p

최승녕의 장남 최도일 역시 그의 딸들을 왕실에 시집보냈다. 예종이 세자였을 때 소훈으로 간택되어서, 예종이 즉위한 후 공빈이 되었다.

-> 최씨는 예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숙의가 되고, 예종 사후 성종 14년 1483년에 귀인에 봉해졌다. 공빈 최씨의 존재는 영조 대 문제가 되었던 듯하다. 위에 나온 최도일의 딸은 귀인 최씨이고, 전주 최씨 족보에 공빈 최씨라는 인물이 있어 그녀가 문종의 왕후인지 논란이 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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