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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역을 상상하다 - 조선 연행사절단의 연행록을 중심으로
거자오광 지음, 이연승 옮김 / 그물 / 2019년 2월
평점 :
500 페이지 정도의 꽤 두꺼운 책이라 어려울까 봐 걱정했는데 원전을 밝히는 주가 많고 무난하게 읽을 수 있는 수준이다.
처음에 이역을 상상하다는 제목을 읽고, 중국인 저자가 쓴 책인 만큼 중국인들이 이역, 즉 조선에 대한 이미지에 대해 쓴 책인 줄 알았다.
조선인이 쓴 연행록을 읽고 당시 중국인들이 조선을 어떻게 봤는지가 주제인 줄 알았는데 정반대의 내용이다.
제목의 이역은 바로 조선인이 바라본 중국 대륙이다.
그것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명분론에 입각해 현실을 도외시 하고 마음대로 해석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이미지를 뜻한다.
어찌 보면 당시 조선인들의 비현실적이고 어리석은 관점을 살짝 비웃는 제목이기도 하다.
지성으로 사대하던 명나라, 그것도 원군을 보내 줘서 일본군을 쫓아내 준 재조지은을 베풀어 준 신종 황제가 다스리던 명나라가 망하고 청이 들어섰는데 조선인들은 이러한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자신들을 강압적으로 굴복시킨 명백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또 명나라가 망하고, 심지어 청이 중국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자랑하면서 승승장구 하고 있었으나 심지어 조선이 거의 망할 때까지도 청의 국력을 무시하고 오랑캐 운수는 백년이다 곧 망할 것이다 자위하고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연호를 사용해 왔다.
진정한 중화 명나라가 망했으니 오랑캐 나라 청에는 문명이 사라졌고, 그래서 대신 조선으로 문명이 넘어왔다고 믿는 소중화 개념을, 우리 역사책에서는 자랑스럽게 설명하지만, 실제로는 청의 국력을 무시하고 사라져 버린 나라를 상상 속에서 추종하는 정신승리란느 느낌이 든다.
시대 변화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를 붙들고 있는 조상들의 모습이 안타깝다.
실학의 대표적인 학자인 홍대용도 서양 학문에 관심을 보이긴 했으나 청나라가 명의 의관을 버리고 정주학을 한물 간 학문으로 여기는 태도에 분개하면서 한족을 비웃는 대목이 여러군데 나온다.
실학의 실체도 결국은 주자학의 변형에 불과한 게 아닌가 싶다.
오히려 중국에서는 송대의 주자학을 철지난 고리타분한 옛 학문으로 여겨왔는데 비단 청나라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원군으로 왔던 명나라 사람들도 조선에 양명학이 없음을 보고 놀랬다는 기록이 있다.
너무나 폐쇄적인 나라였기 때문에 조선말까지도 굳건하게 주자학의 위상이 흔들리지 않았던 것일까?
삼번의 난 때 운남 지방에서 심양까지 포로로 잡혀 온 계문란이라는 한족 여성이 쓴 시가 조선 사신의 연행길에 발견됐다.
이 시는 망국의 여인이 포로 생활을 하는 안타까움을 토로했는데 조선 사신들은 청에 올 때마다 명을 추앙하는 이 여인을 기리는 시를 썼고, 급기야는 자결을 했어야 의리가 완성됐을 거라고 비판하기까지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계문란이라는 여성은 명나라 망할 때 포로가 된 것이 아니라, 청나라에서 분봉왕으로 호위호식하다가 황제를 칭하게 된 오삼계의 반란 때 끌려왔다.
당시 조선인들의 상상의 나래는 당시 청나라 사람들이나 오늘날의 눈으로 보자면 어이없는 정신승리다.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현실을 도외시하고 사람의 생각을 한쪽으로 몰아 세우는지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확인한 느낌이다.
저자는 동아시아가 명나라가 존속했던 17세기까지는 중화문명이라는 같은 문화권에 있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과 청나라의 건국 이후 세 나라들은 각기 다른 길을 갔기 때문에 유럽처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한 문화권에 속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가 흔히 유교 문화권이라고 하여 한중일 3국을 한데 묶어 동아시아라고 지칭하지만 실제로 이 세 국가는 17세기 이후 각자의 길을 갔기 때문에 유럽연합이 탄생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일본은 그렇다 쳐도 중국은 끝까지 사대외교를 유지하면서 같은 문화권이라 생각했는데 이 부분이 다소 충격적이다.
그러고 보면 현재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매우 상이한 체제를 택하고 있다.
해방 후 한국은 오히려 일본과 매우 동질적인 사회라는 어떤 책의 내용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오류>
359p
주문모 신부는 일찍이 정조대왕의 이복조카인 상계군의 처 송씨와 며느리 신씨에게 전교하였는데~
-> 상계군의 처가 신씨이고 송씨는 아버지 은언군의 처, 즉 상계군의 어머니이다.
360p
정순왕후의 소생은 없었고 정빈 이씨의 소생인 사도세자와 사이가 나빴다. ... 능은 원릉이며 시호는 定順 이다.
-> 사도세자는 영빈 이씨의 소생이고, 정빈 이씨의 소생은 효장세자이다. 定順 왕후는 단종의 비이고, 영조의 계비는 貞純 왕후이다.
444p
조선 세자의 <심관록> 역자주: 인평대군 이요를 말한다.
-> 심관록은 소현세자가 심양관에서 머무를 당시 쓰여진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