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규 언더그라운드 여행기 - 젊은예술가의 세계기행 2
박훈규 지음 / 안그라픽스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별 생각없이 집어 든 책인데 퍽 재밌게 읽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는 말이 생각나는 책이다
나는 정해진 길 정해진 방법으로만 살아 왔다
서른 살의 삶,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한 번도 내가 스스로 원해서 개척한 길은 없었던 것 같다
대학을 가는 것은 물론 직장을 구하는 것까지 다 정해진 수순대로 그대로 쭉 걸어 왔다
가장 전형적인 인생을 살아 온 셈이다
그래서인지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당혹감과 함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나 하는 호기심을 갖게 된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궁금증 내지는 약간의 회한이랄까...

내가 원하는 길은 역사학자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역사책 읽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그렇지만 아빠가 원하는대로 이과에 진학했고 지긋지긋한 수학과 물리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세계사나 국사 시간에나 수업을 들었을까, 나머지 시간에는 잠만 잤던 것 같다
자율학습 시간에는 열심히 글을 쓰고, 수업 시간에는 자거나 책을 읽었다
그나마 대학에 무사히 갈 수 있었던 게 감사할 정도로 공부와 참 인연이 없었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시절은 정말 행복하고 지금 생각해도 너무너무 좋다
어떤 사람들은 고3을 지겹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지난 30년 동안 내 삶을 돌아보자면 고등학교 3학년 때가 내 인생의 절정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나는 정말 즐거운 학창 시절을 보냈다
비록 원하는 대학은 못 갔지만 (사실 특별히 원하는 대학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어쨌든 난 고3 때가 가장 즐거웠다
어쩌면 남들이 한심하게 생각하는 것에 가치를 두는 사람들은, 나처럼 후회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비록 정규교육은 끝마치지 못했으나 이 사람은 후회가 없는 것 같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가출로 사회에 발을 내딛었지만, 지나온 삶에 후회없이 최선을 다해 정말 행복하고 즐겁게 보낸 것 같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참 따뜻했다
정해진 길이 전부는 아니다
그런데도 사회는 끊임없이 기준을 만들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질책하고 마치 지진아라도 되는 양 한심하게 쳐다본다
또 그 기준을 초과하면 지나치게 떠받들어 당사자로 하여금 과도한 자부심을 갖도록 만든다
획일적인 사회, 하나 뿐인 기준, 정해진 행로, 대한민국 사회가 개인에게 주는 부담감은 참 크다

한 면은 글로, 한 면은 저자의 그림으로 구성돼서 읽기 편하고 보는 즐거움이 있다
첫 장을 넘길 때부터 예사롭지 않은 솜씨에 놀랬는데 "사디" 라는 디자인 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선생님이라고 한다
한 번도 초상화를 그려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지 못했는데 책을 읽고 나니 문득 거리의 화가들에게 그림을 부탁하고 싶어진다
호주와 영국에서 1년 넘게 초상화를 그렸다니, 모험심이 대단하다
나 같으면 절대로 시도조차 못했을 일이다
비단 예술계가 아니라서기 보다, 나는 그럴 베짱이 없다
그러고 보면 예술가들은 남다른 기질과 열정이 있는 족속들이다
또 정형화 되지 않은 사고와 스타일이 일반인과 다른, 개성강한 독특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리라
잘 생긴 얼굴은 아닌데 인상이 강하고 선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왠지 호감이 가는 스타일이다
저자도 남들과 잘 지내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썼다
이해되는 대목이다

왜 제목이 "언더그라운드 여행기" 인가 했더니 부모님에게 돈 타서 방학 기간 동안 배낭여행 하는 그런 부르주아 여행기가 아니라, 유럽에서 1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체류하면서 직접 돈을 벌고 그림을 그리는, 가난하고 자발적인 여행을 했기 때문에 붙인 이름 같다
또 저자의 삶이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자격 미달처럼 보여서일 수도 있다
물론 지금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써 당당한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적어도 고등학교 1학년 중퇴는 대한민국 같은 학벌 사회에서 쉽지 않은 이력이다
잘 나가는 대단한 경력을 가진 사람의 글이 아니라서일까?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힘이 느껴지는 여행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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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10-05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춘표류라는 책도 비슷한 사람들을 다루었습니다

marine 2006-10-05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청춘표류와는 좀 다른 느낌이었어요 그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훨씬 더 언더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