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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광하는 스포츠 은폐된 이데올로기 ㅣ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7
정준영 지음 / 책세상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생각만큼 어려운 책은 아니었다
전작 TV 비평과 비슷한 수준?
대중을 위한 글쓰기라서 그런지, 또 전공 분야가 대중문화다 보니 쉽게 글을 쓰는 것 같다
이데올로기라는 말이 들어가서 잔뜩 진장했는데 걱정할 필요 없다
사실 너무 나가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타고난 신체적 차이마저 불평등이라고 말한다면 대체 어떤 식으로 평등을 이뤄야 한단 말인가?
그럼 수명도 다 같아야 하는 거 아닌가?
먼저 죽고 늦게 죽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가장 큰 불평등 아닐까?
지나치게 확대된 평등주의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저자가 지나치게 나간 건 아니다
그렇지만 학문적으로, 사회 현상에 대해 자꾸 파고 들어 엉뚱한 결론을 내는 것, 맘에 안 든다
그래도 스포츠는 규칙을 가지고 내면의 폭력성을 순화시킨 훌륭한 경쟁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국민의 눈을 가리기 위한 3S 정책이다, 이 따위의 저급한 논리는 아니라서 마음에 든다
스포츠가 왜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행하게 된 건지 나름대로 합리적인 근거를 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데올로기라는 교조적 표현을 쓸 필요가 없지 않을까?
프로 스포츠 보다 아마추어리즘이 더 고귀한 정신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은, 책을 읽으면서 다소 수정됐다
왜냐면 돈을 벌기 위해 스포츠를 하는 사람은 노동자 계급이고, 신사답게 규칙을 준수하면서 페어 플레이 정신으로 임하는 즉 아무 댓가도 바라지 않고 순수한 의미의 경기를 하는 사람은 귀족 계급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우아한 귀족들께서, 일 안 해도 먹고 살 재산이 든든한 귀족들께서 천박스럽게 돈 몇 푼 벌자고 관중들 앞에서 악에 받쳐 경기를 하겠는가?
프로 스포츠는 어쩌면 노동자들을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만 해도 의사나 법률가가 일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중인 계급이었던 것처럼, 노동자 계급은 돈을 벌기 위해 스포츠를 한다
당연히 규칙을 어기는 경우도 많고 승패에 목숨을 걸게 된다
왜 안 그렇겠는가?
밥줄인데
그러고 보면 올림픽의 정신이 아마추어리즘이라는 것도 다 허구인지 모른다
누가 생업을 가지고 일하다가 잠깐 경기 때만 나와서 실력을 겨룰 수 있겠는가?
쿠텐베르크 남작께서는 지나친 관념주의에 빠지신 게 아닌지...
그렇다고 해서 미국처럼 아주 노골적으로 산업화 된 프로 스포츠가 꼭 좋다는 건 아니다
가끔 미국 프로 농구나 미식축구 같은 걸 보면 저렇게까지 철저하게 상업적이어야 할까 회의적일 때가 많다
또 천정부지로 치솟는 스타 플레이어들의 몸값에 입이 딱 벌어지기도 한다
광고 모델들의 억대 출연료에 뒤로 넘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의 말대로 이데올로기는 나름의 타당한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런 게 전혀 없다면 피지배 계급이 순수하게 받아들일 리 없다
다만 문제는 지배자적인 입장만 너무 강조하다 보니 한쪽으로만 흐르는 것이다
교조주의의 폐해라고 할까?
마라톤에 대해 생각해 봤다
저자 역시 중산층과 마라톤을 연결해서 생각한다
1970년대 마라톤 열풍이 분 미국처럼, 한국도 90년대 후반부터 우후죽순 격으로 마라톤 대회가 생겨났다
대체 한국인이 언제부터 그렇게도 열심히 그 먼 거리를 달렸단 말인가?
그것도 취미로 말이다
그런데 나만 해도 나름대로 조깅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다
왜 나는 달리기를 좋아하는가?
그리고 실제로 진짜 좋아하긴 한 걸까?
한 가지 위안은, 누구나 운동을 하기 싫어한다는 점이다
정말 너무 좋아서 미치고 환장할 만큼 훈련 과정을 즐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열혈 마라토너들도 달리기 연습에 임하기 위해 기분을 밝게 가지려고 애쓴다니, 우리처럼 평범한 이들은 말 다 했지 뭐
그렇다면 왜 그 힘든 달리기에 열정을 바치는 걸까?
저자는 마라톤이 주는 자기 극복 이미지에 주목한다
일단 마라톤은 돈이 들지 않는다
그러니 골프처럼 괜히 남들에게 으스대기 위해 운동을 한다는 빈축을 살 일이 없다
또 별다른 기술도 필요없이 그냥 달리면 되니까 누구나 바로 시작할 수 있다
또 달리기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다
마라톤을 완주하는 사람은 3시간이 넘는 긴 시간을 인내심과 끈기로 버틴다
검약과 더불어 자기 절제 혹은 고통의 극복이라는 중산층의 두 가지 덕목을 함께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운동이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니 나도 마라톤에 덧씌워진 사회적 의미가 좋아서 누구에게든 자랑스럽게 내 취미는 달리기라고 말했던 것 같다
내가 정말 달리기를 좋아하는가?
오, 노~~
런너스 하이는 나같은 초심자에게는 어불성설이고, 달리는 내내 정말 힘들어 죽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일어나 7km 이상을 달렸다
체력이 약한 나에게 이건 어마어마한 노동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뛰고 나면 상쾌하다
그렇지만 아침마다 헬스 클럽에 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늘 번뇌에 쌓인다
순수하게 재밌는 운동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고 보니 골프도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 골프 자체가 좋은 사람도 있겠지만 성공한 사람, 혹은 왠만큼 산다는 이미지를 위해 골프채를 드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달리기와는 달리 초기 비용이 엄청나게 들고 혼자는 절대 못 배우고 비싼 돈 들여 강습을 받아야 하며 한 번 골프를 치려면 꽤나 비싼 돈을 들여야 하는 운동이니, 서민층은 아무리 골프가 좋아도 직접 필드에 나가 휘두르기엔 너무 힘든 운동이리라
그래서 골프는 선망의 대상이면서도 드러내놓고 좋아하기엔 다소 껄끄러운 운동이기도 하다
일단 위화감 조성에다가 돈자랑 하는 느낌이 풍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리기는 다르다
누구나 운동화만 있으면 뛸 수 있다
그러니 나 달리기 좋아한다고 말해도 비난할 계층은 하나도 없다
물론 노동자 계급에서 보면, 고된 육체노동 후에 다시 트랙을 돌 여력이 없을테니 일종의 불평등이긴 하지만 말이다
노동자 계급이 축구를 즐기자, 그들과 구별짓기 위해서 럭비를 선택한 영국의 귀족 계급처럼, 마라톤은 중산층을 위한 운동이다
퇴근 후 야근을 할 필요가 없이 여가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사람, 근무 시간에 책상에 앉아 육체적 소모 없이 일을 하는 화이트 칼라들이 아니라면 사실 일부러 매일 시간을 내서 체력 소모가 큰 달리기를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골프를 치면 어느 정도 지위가 있고 재력이 된다는 일종의 사회적 인정이듯, 마라톤을 완주하면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바람직한 인간이라는 이미지를 얻는다
유산소 운동이기 때문에 마라토너들은 날씬하기까지 하다
비만이 무능력과 가난의 동의어가 된 미국에서는, 정작 뛰어야 할 흑인 하층민들은 퇴근 후 육체노동에 지친 몸을 카우치에 눕히고 싸구려 감자 튀김을 먹으며 TV에서 하는 미식축구에 열광한다
반면 뛸 필요가 전혀 없을 것 같은 날씬한 백인 상류층들은, 편안하게 앉아 근무시간을 보낸 후, 남아 있는 체력을 모아 트랙을 돈다
또 그들은 싸구려 감자 튀김 따위는 먹지 않고, 유기농 야채처럼 값비싼 저칼로리 음식만 먹기 때문에 더더욱 살이 찌지 않는다
정말 비만은 가난의 댓가가 되버렸는가?
격투기 같은 종목에 불만이 많았는데 책을 보면서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의 공격 본능을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순화시켜 푼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갈수록 안전해진다
또 경찰력 때문에 치안이 확실하게 보장된다
함부로 공격 본능을 발산했다가는 영창가기 딱 좋다
그러니 사람들은 격투기나 권투 같은 과격한 스포츠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발산한다
특히 하층민들은 직접 스포츠 활동에 참여할 여력이 없기 때문에 관람하는 스포츠에 열광한다
훌리건의 경우, 영국 하층계급 젊은이들이 사회를 향해 발산하는 일종의 저항 행위라는 시각도 있다고 한다
뭐, 그렇게까지 의미를 부여할 건 없지 않나 싶으면서도 달리 스트레스를 풀기 힘든 하층민들의 경우는, 약간의 필연성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미국에서 가장 높은 범죄율을 자랑하는 집단이 흑인이 아닌, 백인 하층민이라고 하니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다
선진 사회로 갈수록 여가 시간이 늘어나고 여가에 쓸 돈도 많아지기 때문에 (요즘같은 주5일제 시대에는 더더욱) 보는 스포츠 보다는 하는 스포츠의 비율이 늘어난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프로 스포츠, 혹은 엘리트 스포츠를 비난하는 건 아니다
저자의 말대로 직접 스포츠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이 심미안을 가지고 보는 스포츠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잘 모르면 승패에만 관심을 갖지만, 많이 알수록 경기의 전반적인 흐름과 디테일한 부분까지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미술품 관람의 진리가 스포츠에서도 통하는 법
생활 체육과 엘리트 체육의 조화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