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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송호정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2월
평점 :
품절
예전에 읽은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도서관에서 실물을 보니 전혀 다른 책이었고, 500 페이지 이상이 두께에 일단 기가 질렸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 (더군다나 상호대차라 연장도 안 되고) 반납하면 다시 읽기 힘들 것 같아 반납기한에 쫓겨 일종의 강제독서를 했는데 정말 유익했다.
(이런 게 바로 도서관 대출의 장점인 것 같다. 내 책이었으면 아마 계속 미뤘을 것이다)
송호정 교수의 다른 책, <단군, 만들어진 신화>를 먼저 읽었는데 그 책은 약간 중구난방 식으로 여기저기 발표한 글을 모은 것 같았지만 이 책은 본격적인 학술서로 고조선의 실체적 접근에 많이 유익했다.
토기와 동검 같은 고고학적 유물에 대한 설명은 내 이해력이 부족해 자세히 읽지 못했지만 저자가 논증하고자 하는 바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사실 나도 늘 의문이었던 게, 정말 비파형 동검이 나오는 지역을 전부 고조선 영토였다고 할 수 있냐는 문제다.
국사 교과서에서도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의 표지 유물이라고 배웠고 저자가 책에서 비판한 역사스페셜, 고조선 편에서도 분명 그렇게 설명했다.
환단고기 등을 근거로 고조선 제국 운운하는 사람들도 비파형 동검을 고조선 영역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비파형 동검은 남만주 일대에 널리 퍼진 양식이고 고조선의 중심지인 요동보다는 산융 등으로 대표되는 유목민들의 거주지, 요서에서 훨씬 더 많이 발견된다고 한다.
이덕일씨 책에서 동이족을 한민족의 조상으로 규정하고 상나라까지도 중국의 한족과는 다른 민족, 즉 동이족이 이룬 문화로 설명했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동이족은 산둥 반도로부터 남만주 일대에 사는 동쪽 오랑캐에 대한 범칭이므로 특정 종족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제일 흥미로웠던 건 기자조선의 실체다.
기자동래설은 한나라 때 생겨난 일종의 전설로 보고 조선 시대 때는 중화사상 때문에 수용한 것으로 생각한다.
실제 요서 지방에서 백이 숙제의 나라인 고죽국이나 기후 등의 명문이 새겨진 청동예기들이 발굴되는데, 저자는 이를 주나라 건국 후 쫓겨 온 상족의 후예라고 본다.
실제 이 요서 지방은 산융이라는 토착 유목민들이 거주했는데 주나라 건설 후 상족 유이민과 섞어져 주의 분봉을 받은 연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한다.
흔히 예맥족을 한민족의 선조로 인식하는데 예족과 맥족 두 집단이 혼합되어 예맥족이 되었고 이들은 요서가 아닌 요동에 분포했다고 한다.
조선족 역시 비슷한 지역에 거주하는 일족이나 선진문헌에서는 구별되는 종족으로 봤다.
저자에 따르면 예맥족은 요동 지역에, 그리고 고조선은 청천강을 경계로 한 서북한 지역에 거주했다고 한다.
청천강, 즉 평안남북도의 경계를 패수로 보는데 이 선을 기준으로 중국 문화와 한민족의 문화가 나눠진다.
고조선이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한 기원전 8세기로부터 연의 장수 진개가 침입하여 2000리 영토를 빼앗았다고 하는 기원전 4세기 무렵까지 요동에서 청천강 이북까지 조선연맹체라는 느슨한 정치 체제가 있었고 (저자는 이를 전기 고조선 사회라고 본다) 기원전 3세기 무렵 연의 세력이 청천강 이북까지 밀고 내려오자 서북한 지역으로 중심지를 옮기면서 철기 문화를 받아들여 국가 체제를 정비한다.
이 때 진의 폭정 등으로 연나라 사람인 위만이 유민을 이끌고 조선으로 넘어와 위만조선이 성립된다.
저자는 이 위만 조선을, 중국계 관인 조타가 장악한 남월과 비슷한 맥락으로 본다.
지배층의 출신지만으로 국가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므로 저자의 주장대로 남월이나 위만조선을 한의 식민국가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논리로 발해의 건국자 대조영이 고구려인이라는 이유로 발해를 한민족의 나라라고 볼 수 있을까?
민족이야 말로 19세기의 발명품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사료 비판과 고고학적 물질문화 증거를 기반으로 한 저자의 고조선사 인식은 매우 현실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고대 국가가 위대했다고 해서 현대의 우리가 더불어 위대하지는 것도 아니고 민족주의와 역사학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터넷을 보니 송호정 교수가 식민사관에 물든 사람이라는 비판이 많은데, 적어도 이 책은 학술적 논거가 매우 정연하게 잘 쓰여졌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