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휘날리며
강제규 감독, 장동건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영화 홍보 장면이 멋있어서 꼭 보고 싶었다

6.25  때 피난민들이 열차를 타기 위해 구름처럼 역에 모여드는 장면이었는데 그 인파가 어찌나 장엄한지, 헐리우드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막상 영화를 보고 나니까 생각만큼 스케일이 큰 건 아니었다

뭐, 어차피 드라마가 가장 중요한 거니까

시작 부분부터 울기 시작해서 한참을 울었다

한 번 눈물샘이 터지니까 주체하기 힘들 정도

이렇게 펑펑 운 건 "가을의 전설" 이후 오랫만

그 때는 고등학교 때라 한창 감수성이 예민했었고, 남편의 동생을 사랑하는 여자가 괴로워 하다 결국은 자살하고 마는 그 안타까운 심정이 그대로 감정이입 되서 소리내서 울 정도였다

사실 이번에는 좀 창피하기도 했다

남들 다 우는 그런 장면도 아닌데 주책스럽게 눈물이 솟으니까 화장 얼룩질까 봐 걱정됐다

나이를 먹긴 먹은 모양...

장동건이 동생 원빈을 공부시키기 위해 구두를 닦고 다니면서도 밝게 웃는 모습부터가 슬펐다

자기는 먹고 싶다는 생각조차 안 해 봤을 아이스크림을, 동생이 오자 척 하니 사 주면서 이 시렵다고 안 먹는 장면에서 그만 눈물이 나왔다

옛날 어머니들이 아들을 위해 허리가 끊어져라 일하는 모습은 워낙 많이 봐 왔고, 으례껏 부모는 자식에게 희생하는 존재라는 이기적인 생각이 있어서인지, 무심히 넘어가는데 형이 동생을 위해 자기 인생을 거는 모습은 무척이나 감동적이었다

동생은 형의 꿈이자 미래였다

그런 동생이 군대에 끌려가게 되자 형은 동생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원을 하고, 다시 그 동생을 제대시키기 위한 훈장을 받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모든 전투에 앞장선다

 "가을의 전설"에서도 브래드 피트 형제가 막내를 지키기 위해 함께 전장터로 뛰어드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무래도 한국적인 정서가 더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아들에게 거는 무한한 기대는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흔히 있어 왔다

아들은 어머니와 큰 누나, 혹은 여동생의 희망이고 전부라고 해도 좋을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같은 남자인 형이 동생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버리는 설정은 흔하지 않아서인지 더욱 가슴이 뭉클했다

6.25가 터지기 직전의 평화로운 서울 풍경이 전쟁의 끔찍함과 대비되어 비극적으로 느껴졌다

얼마 안 있으면 난리가 날텐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채, 장미빛 미래를 위해 허리가 끊어져라 일하고 있다

전쟁이 났다는 소리를 듣고 피난짐을 쌀 때 그 심정이 어땠을까

평화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게 새삼 감사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어깨와 등어리에 무거운 봇짐을 메고 끝도 없는 피난길로 나서는 장동건 일가의 모습이 너무 슬퍼 눈물이 났다

기차를 구하지도 못하고 말 못하는 어머니와, 내년이면 서울대에 갈 거라 기대되는 아직 학생인 동생과, 결혼할 여자의 어린 세 동생들을 이끌고 목적지도 없는 그 고된 길을 걸어가는 가장의 막막한 심정이 그대로 전해져 가슴이 아팠다

그럴 때 뭔가 빽이 있어 기차를 탈 수 있었더라면, 그래서 가족들을 그 막막한 피난민들 속에서 구해낼 수 있었더라면,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며 그는 몹시도 괴로웠을 것이다

가부장제에 대한 반감이 많지만, 어려울 때에 가장이라는 위치가 주는 책임감은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닥터 지바고"에서 피난민들로 가득찬 열차역이 나온다

그 때도 서로 기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아비규환을 이루는데 주인공 유리가 간신히 기차에 올라타 자기 가족들에게 무사히 객석을 만들어 주고 안도하는 장면이 생각난다

가족을 피난민들 속에서 구해 냈다고 안도해 하는 유리의 얼굴과, 기차를 구하지 못해 막막해 하는 장동건의 모습이 교차되어 가슴이 아팠다

막상 전쟁터로 나가자 장동건은 놀라운 적응력을 보인다

아마 그는 피난길에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가족들을 안전하게 지켜냈을 것이다

동생을 제대시키기 위해 훈장을 받아야 한다는 목표가 있어서인지 뛰어난 전투력을 자랑하며 전쟁터를 휘젓고 다닌다

그런데도 동생 원빈은 형을 전쟁에 미친 놈이라고 몰아세운다

원빈의 비난은 전쟁의 광기를 혐오하는 지식인의 인간 중심주의로 느껴지는 대신, 받기에 익숙한 어린애의 투정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는 형의 애틋한 심정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앞장 설 수 밖에 없는 형의 안타까운 심정을 동생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마치 자식을 위하는 부모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적으로 보일 만한 원빈의 태도들은 전쟁에 어울리지 않는 그저 한가로운 시대에나 어울리는 투정처럼 느껴진다

제일 안타까웠던 장면은 아이러니컬 하게도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했다는 뉴스를 듣고 환호하는 장면이었다

멜 깁슨이 나오는 베트남 전쟁 영화를 봤는데, 베트남으로 출격하기 전 날 가족들과 이별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갑작스런 출격 명령을 받고 급하게 집으로 돌아와 자는 아이들을 한 번씩 안아 주고 (무려 다섯 명이나 됐다) 아내와 격렬한 포옹을 한 뒤 눈물을 글썽이는 아내를 뒤로 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오는 멜 깁슨의 얼굴이 오버랩 됐다

인천으로 상륙한 미군들은 모두들 각자의 집에서 그런 안타까운 이별을 하고 배에 올라 탔을 것이다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작은 나라의 전쟁터로 끌려 가는 평범한 미 병사들은 또 얼마나 막막하고 답답한 심정이었을까?

상륙 작전이 성공했다지만, 분명히 많은 수의 병사들이 상륙 도중 죽었을 것이고, 본국에서는 아들이, 혹은 남편이, 아빠가 살아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빌고 있었을 것이다

전쟁은 전체적으로 보면 정치의 일부이고, 인간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발전의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개개인의 미시적 관점으로 보면 일어나서는 안 될 너무나 끔찍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대량 학살이 불가피한 현대에 와서는 더더욱 전쟁의 비극이 가시화 되는 것 같다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밀려오는 중공군의 소식을 듣고 후퇴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중공군 역시 대부분은 왜 참가하는지도 모른 채 그 추운 겨울에 낯선 나라로 착출되어 갔을 것이다

전쟁 당사자들이야 자신의 나라에 관한 일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정치적 이해 관계 때문에 권력자들에 의해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 가는 평범한 병사들의 비극은 영화를 보는 내 마음을 무척이나 아프게 했다

평화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사족 같았다

평론에서도 지적했지만 원빈 일병 구하기 장면은 아무래도 심한 오버다

스펙타클이 빛난다지만, 전체적인 드라마로 본다면 그 장면은 빼는 게 훨씬 완성도가 높을 뻔 했다

 형을 구하기 위해 적진으로 도망간다는 설정도 현실적이지 않다

 늙은 원빈 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도 눈에 거슬린다

 장동건은 "친구" 이후 다시 한 번 영화에서도 먹히는 배우라는 걸 입증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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