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 나의 힘
박찬옥 감독, 문성근 외 출연 / 스타맥스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오래 전부터 보고 싶은 영화였다

재미없다고 보지 말랬는데 역시나 크게 재밌는 건 아니었지만 생각할 꺼리가 많은 영화

평론을 보기 전에 내 느낀 점을 쓰려고 한다

일단 박해일이라는 배우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살인의 추억"에서도 예사롭지 않은 연기를 보여 준 그는 이 영화에서 자신의 매력을 한껏 발하는 느낌이다

모범생 스타일로 별로 멋있지도 않지만, 또 나름대로 깔끔한 외모와 지적인 분위기 탓에 일부 여자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남자

더 흥미로운 인물은 문성근이 맡은 캐릭터였다

박해일의 두 여자를 모두 뺏어 갈 정도라면 (그것도 유부남이 말이다) 정말 멋진 남자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는 너무나도 통속적인 속물로 나온다

그에게는 과연 어떤 매력이 있는 걸까?

문성근은 함부로 말하고 여자를 밝히며 아랫사람에게 잡일을 많이 시키는 뻔뻔한 남자로 나온다

교양도 없고 편집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부하 직원에게 집안일까지 시킨다

잘 생긴 것도 아니고 술을 좋아하며 여자를 밝히기까지 한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다

왜 그의 주변에는 여자가 끊이지 않는 걸까?

박해일를 짝사랑 하는 하숙집 여자가 있다

아버지와 남동생은 정신병을 앓고 있고, 박해일을 짝사랑 한다

짝사랑의 슬픔을 아주 현실적으로 그려낸 장면이 있다

어떤 얘기 끝에 수영장 가자고 툭 던지 말에 그녀는 수영복까지 새로 사고 언제 가느냐고 들떠 있다

당연히 박해일은 내가 언제? 라는 식으로 무심히 넘어가 버린다

짝사랑 하는 놈한테는 별 거 아닌 한 마디도 금과옥조 같은데 받는 놈한테는 흘러가는 말에 불과하다

불쌍한 그 여자는 박해일이 삶에 지쳐 있을 때, 혹은 질투에 미쳐 있을 때, 욕정을 푸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솔직히 섹스하는 장면 보면서 분노했다

이 나쁜 자식, 저보다 잘난 년한테 채이고 어디 와서 화풀이를 해?

그것도 제일 잔인한 형태로?

진짜 너무너무 화가 났다

그 전까지만 해도 박해일이 맡은 캐릭터에 동정심을 많이 느꼈는데 (능력이 안 되지만 착한, 그래서 질투의 감정마저도 부러움 내지는 동경으로 승화시켜 버리는) 너도 똑같이 속물적인 놈이구나 싶으니까 진짜 화가 났다

자기를 사랑하는 여자를 받아주지 못한다면 적어도 아름답게라도 봐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 그 감정을 이용해 욕정을 푸는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그 격렬한 섹스가 그렇게 추잡하고 더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사실 모든 종류의 섹스는 속물적이고 우스꽝스럽다

그래서 불 꺼 놓고 남 안 보는데서 하는 거 아닌가?

영화에서는 분위기와 조명을 이용해 아름답게 묘사하는데 이 영화, 진짜 리얼하게 가감없이 보여준다

바지를 절반만 벗어제끼고 여자의 질을 향해 열심히 피스톤 운동을 하는 사내, 그리고 아파서 비명을 지르는 여자, 숨을 헐떡이는 두 사람이 모습이 너무 사실적이라 인간도 결국 동물에 불과하구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박해일이 임신한 그녀를 받아들일까 고민하는 모습이 잠깐 비춰지자 설마 의심스런 마음이 들었다

어, 저렇게 가면 영화인데? 현실에서 저럴 수 있을까? 설마 하룻밤 잤다고 남자가 책임진다고?

그런데 역시나 산부인과 앞에서 하루 종일 기다려도 남자는 오지 않고 결국 그녀를 버리고 만다

정신병자인 아버지와 동생 때문이냐는 그녀의 힐문에 박해일, 답답해 미치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당근 아니지, 니네 가족이 문제가 아니라 너 자체가 싫다니까, 왜 그렇게 눈치를 못 채냐, 이 바보야, 라고 말하고 싶었을 거다

여자 입장에서는 섹스까지 했는데 그렇게 사랑하며 존경해 마지 않던 남자가 설마 사랑도 없이 자기 욕구를 채웠으리라곤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창녀 취급을 받았다는 걸 절대 인정하기 싫었겠지

그나마 핑계 댈 가족이라도 있어 덜 상처 받았을 거다

그 여자와 박해일의 에피소드를 보면서 소시민의 위악성에 대해 다시금 깨달은 기분이다

자기도 더 잘난 놈한테 애인을 둘 씩이나 뺏긴 주제에 자신을 짝사랑 하는 여자를 그런 식으로 다루는 걸 보면 인간은 결국 이기적익 자기 중심적인 본성을 가진 존재다, 라는 말이다

왜 박해일은 자기를 부려 먹고, 애인을 둘 씩이나 뺏어간 뻔뻔하기 그지 없는 문성근 밑으로 들어갔을까?

아예 집으로까지 들어가서 충복 노릇을 하는 걸 보면, 문성근을 도저히 넘지 못할 산으로 인정하고 질투에서 동경심으로 감정을 바꾸기로 결심한 모양이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사

"누나, 편집장님이랑 자지 말아요 나도 잘해요"

하하, 나도 잘해요라니, 정말 너무 리얼해 엄청 웃었다

배종옥 캐릭터는 도무지 호감이 안 간다

보통 영화에서 혼자 사는 여자란 자기 감정을 잘 통제하고 냉철하고 "쿨"한 분위기로 비교적 멋지게 그려지는 편인데 배종옥은 구질구질 하기 짝이 없는, 그래서 아주 현실적으로 묘사된다

하긴 문성근도 그렇고 이 영화의 모든 캐릭터는 다 현실적이고, 그래서 아부 구질구질 하다

문성근 같은 경우도 유부남인데도 불구하고 여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니, 보통 영화에서라면 깔끔하고 부유하며 멋진 남자여야 할텐데, 문성근은 너무 현실적으로 나온다

욕도 잘 하고 무엇보다 속물적이고 잘 생기지도 않는, 여자들 후리는 걸 삶의 중요한 목적으로 생각하는 대단히 평범한 중년 사내!!

배종옥네 집이 어찌나 심란하던지, 꾸질꾸질한 소파에 박해일과 둘이 누워 격렬한 섹스도 아니고 서로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진짜 연애 기분 안 나더라

영화에서 아쉬웠던 부분은 왜 여자들이 속물적인 문성근에게 빠지냐는 것이다

박해일의 첫번째 애인도 그렇고, 배종옥도 문성근과 자게 되는 부분의 묘사가 명확하지 않아 약간 이해가 안 갔다

첫번째 애인이야 순진하게 생겨서 유부남 좋아하는 순진한 처녀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배종옥은 닳고 닳아서 쉽사리 유부남의 꼬임에 넘어갈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문성근에게는 어떤 매력이 있는 걸까?

질투도 해 볼 만한 상대에게 느끼는 감정인 것 같다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상대라면 이미 질투가 아니라 동경심으로 바뀌어 버린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암시하는 것, 2편이 나온다면 아무래도 문성근의 하나 뿐인 딸은 그가 보잘 것 없이 생각하는, 이를테면 거의 따까리 수준인 박해일에게 마음을 뺏길 것 같다

박해일은 아마도 문성근에게 느끼는 질투에 대한 보상 심리로 딸의 마음을 받아 들이겠지

정말 독하고 똑똑한 놈 같으면 카타르시스를 느낄 만큼 잔인하게 딸에게 복수를 할텐데 (하숙집 처녀를 임신시켜 놓고 찬 것처럼) 소심해서 그러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 마음을 받아 들임으로써 묘한 쾌감을 얻게 될 것 같다

문성근이 한 말이 있다

난 바람 피워도 아내와 애인 둘 다에게 잘 한다, 제일 쪼다 같은 놈이 바람도 못 피우면서 아내에게도 잘 못하는 놈들이다

나는 진즉 문학적인 내 능력의 한계를 깨달았다, 그래서 그 쪽으로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내가 잘하는 것에 인생을 걸었다, 바로 여자 꼬시는 거

즉 영화에서 문성근은 현실을 너무 빨리 파악해서 고민이랄 게 없는 인물이다

바람을 피우면서도 양심의 가책 없이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유지하고 있고, 작가적 능력의 한계를 괴로워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잘 하는 것(?)에 집중함으로써 삶의 보람도 느끼고 산다

그야마로 위악적인 소시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캐릭터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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