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김영하는 요즘 잘 나가는 젊은 소설가 중 한 명인데, 이번에 동인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서 그의 수상작 "검은 꽃" 을 읽었다
생각보다 훨씬 재밌었다
독특한 제목이 돋보이는 그의 단편집 "오빠가 돌아왔다" 는 별로였는데, 이 책은 정말 재밌다
지루하지 않고 빨아 들이는 매력이 있다
직접 멕시코와 과테말라까지 가서 쓴 책이라고 하니 현장성이 더욱 돋보인다
역시 단편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다
작품이 좀 길어야 플롯도 들어가고 하고 싶은 얘기도 다 할 수 있는 것 같다

언젠가 TV에서 염정아와 옥소리가 나오는 애니깽에 관한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초반에는 재밌게 봤는데 그들이 늙은 후 김혜자 등으로 바꿔 나올 때는 좀 황당해서 거의 안 봤다
어쨌든 그 때 이 두 자매가 멕시코 에네켄 농장으로 이민을 간다
언니 염정아는 공산주의자가 되서 한국으로 돌아오고, 동생 김혜자는 아마 큰 부자가 되서 해방 조국으로 돌아올 거다
그 드라마가 생각나는 소설이다

조정래가 쓴 "아리랑" 도 비슷한 얘기다
배경은 하와이다
솔직히 "아리랑" 류면 어쩌나 걱장을 했는데, 역시 신세대 소설가는 다르다
만약 이 소설을 "아리랑" 처럼 썼다면 상도 못 받고 대중에게 외면당했을 것이다
왜냐?
시대가 바뀐 것이다
더 이상 민족주의와 선악 이분법 구도로는 작품을 끌어 갈 수가 없다
독자들은 보다 입체적이고 개인적인 소설을 원한다
이념과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시대이므로 독자의 요구도 변했다
뒤에 나오는 평론에서도 이 점을 강조한다

조정래의 "아리랑" 을 보면 인물들의 선악 구도가 너무나 명확하다
착한 놈은 계속 착하고 나쁜 놈은 끝까지 나쁘다
평면적인 캐릭터라 재미가 없다
반면 김영하 소설의 주인공은 보다 인간적이다
사실 나쁘기만 하고 착하기만 한 인간이 어딨겠는가?
인간성의 좋고 나쁘고는 있겠지만 선악을 분명히 따진다는 건 사실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소설을 읽다 보면 대부분의 캐릭터는 전형적인 성격을 띈다
즉 그들의 행동은 거의 예측 가능하다
특히 역사 소설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가끔 지루하다

주인공의 이름도 현대적이라 마음에 든다
김이정은 가수 이정이 생각나고 이연수라는 이름도 조선 시대의 촌스런 한문 이름 같지가 않다
그녀의 동생 이진우도 현대적인 이름이다
박정훈도 마찬가지
아무래도 신세대 소설가가 짓는 이름은 현대적이다

이정과 연수는 멕시코로 가는 화물선에서 만나 사랑을 나눈다
연수는 왕족인데 아버지와 달리 현실을 빨리 받아들인다
또 그녀는 자신이 욕망에 충실한다
연수나 이정 모두 외모가 괜찮은 사람들로 나온다
내 예상으로 둘은 결혼해서 행복한 삶을 살 줄 알았는데 작가의 결말은 뜻밖이었다
제일 황당한 건 이정의 최후다
이정은 주인공인 만큼 (읽다 보니 특별한 주인공도 아닌 것 같지만) 성품도 남다르고 세상을 잘 헤쳐 나갈 것 같았는데 의외로 인간성도 나쁘고 허망한 죽음을 맞는다
이정과 연수의 재회도 이뤄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주인공 이정은 갖은 고난을 겪은 후 자신의 아이를 가진 사랑하는 연수를 되찾아 와야 하는데, 왠걸 그는 멕시코 혁명군이 되어 사람들을 죽일 뿐이다
또 굳이 연수에게 매달리지도 않는다
그저 과거의 추억 쯤으로 간직할 뿐 그녀를 위해 어떤 모션도 취하지 않는다
나중에 연수의 남편 박정훈의 이발관에 찾아가 그녀와 자신의 아들을 보긴 하지만 만나지도 않고 떠나 버린다

김영하는 주인공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소설 읽기가 더욱 편했다
이정은 혁명군이 되어 과테말라의 마야 용병으로까지 건너 가지만 결국 거기서 총맞아 죽는다
농장에서 탈출해 혁명군이 될 때는 그래도 뭔가 한 가닥 할 줄 알았는데 왠걸, 그냥 허망하게 밀림에서 남의 나라 군인 손에 죽을 뿐이다
멋진 전투나 영웅적인 행동도 없었다
연수나 아들을 못 잊는 것도 아니다
작가의 눈이 매우 냉정함을 느낄 수 있다


연수 역시 마찬가지다
이정의 아기를 벤 후 권력을 누리는 통역사 권용준에게 남편을 찾아 달라고 부탁할 때만 해도 사랑을 위해 뭔가 할 여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허망하게 권용준의 첩으로 들어 앉는다
조선으로 떠나는 권용준을 배신하고 그의 돈을 훔쳐 달아날 때도 그녀가 이정을 찾아 역경을 헤쳐 나갈 걸로 기대했다
그러나 역시 중국집의 하녀 내지는 매춘부로 팔리고 만다
무려 8년을 그렇게 보내다 중국집 손님으로 온 박정훈에게 구출된다
옛날 소설 같으면 이정을 그리워 하며 정절을 지킬텐데 또 그녀는 박정훈과 쉽게 살림을 차린다
사랑에 목숨 거는 전형적인 여주인공의 역할을 거부하고 보다 현실적인 여자로 사는 것이다

그녀가 농장으로 아이를 찾으러 갔을 때 그녀의 어머니 소식은 정말 충격이었다
그녀가 권용준의 첩이 된 후 더럽다고 말 섞은 것도 거부하던 그 꼿꼿한 왕실의 여자가, 마야인 감독의 아내가 된 것이다
자살까지 생각하던 조선 왕실의 여자가, 딸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던 그 여자가 어떻게 남편을 배신하고 농장 감독과 결혼할 수 있을까?
지배자인 스페인 귀족도 아니고 자신들과 별 다를 것도 없는 마야인과 말이다
한 문장에 불과한 얘기지만 이 소설의 핵심 반전 같다
연수의 어머니도 망해 버린 나라 붙들고 앉아서 일할 생각조차 않하는 이 왕족 남편에게 질린 것이리라

그 후에도 연수의 운명은 놀랍기만 하다
그나마 제일 잘 풀렸다고 해야 하나?
착실한 이발사 박정훈과 결혼한 후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 것 같던 연수는 남편이 심장마비로 죽은 후 재산을 가지고 고리대금업과 매춘업을 한다
큰 돈을 모았지만 기부 따위는 절대 안 하고 악착같이 모아 고스란히 아들에게 물려 주고 죽는다
여주인공이라면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과 더불어 도덕심이나 애국심도 뛰어나기 마련인데, 그녀는 전형적인 설정을 거부하고 돈이 최고다는 배금주의적 자세를 갖는다
과테말라에서 총 맞아 죽는 이정의 삶 만큼이나 쇼킹했다

그녀의 아버지 이종도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일단 왕족 씩이나 된 사람인 멍청하게 멕시코 이민을 떠난 것부터가 어리석다
그래도 왕족이면 주어 들은 정보라도 있을텐데 어쩜 그렇게 순진하게 가족을 이끌고 생판 모르는 곳으로 가는 노동자들의 배를 탔을까?
그가 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행히 환경 변화에 민감한 아들 이진우 덕에 먹고 살기는 했지만 평생을 지나가 버린 것에 집착해 산다
일도 안 하면서 아들이 벌어 온 돈으로 밥과 반찬은 제일 많이 먹는다
마치 잘 먹는 게 자신의 유일한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무능한 가장들은 뻔뻔함이라도 있어야 버틸 수 있는 걸까?
이종도의 아내가 마야인에게 가 버린 후 책에 묘사된 건 없지만, 아마 폐인이 됐을 것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마누라가, 그것도 왕족의 부인이 외국인에게 재가해 버린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자존심도 없는 것 같다
조선 시대 선비라면 이런 모욕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자살로써 정신의 고매함을 지키기 마련인데, 이종도는 그마저 실천할 용기도 없이 끝까지 살아 남는다
아마도 그가 피로써 썼을 글들은 현실주의자 아들에 의해 불태워지고 만다
참으로 허망한 인생이다!!

권용준이나 이진우는 현실 순응적인 인물로 나온다
그들은 영어나 스페인어가 권력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빨리 깨닫는다
권용준이야 원래 역관 출신이니 그렇다 치지만, 이진우의 변신은 놀랍다
그는 이른바 왕족인데도 자신이 처한 외국인 노동자의 현실을 받아 들이고 적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몰락해 버린 왕족 집안의 무력한 도련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울증까지 있었는데 오히려 생판 낯선 환경이 그에게 힘을 준다
생존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라고 할까?
그는 권용준 주위를 얼씬거리며 스페인어를 주어 담고 결국 통역으로 출세한다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절대 스페인어를 배워서는 안 된다는 사람도 있는데, 어린 아이의 세상 보는 눈이 놀랍다
결국 이진우는 사업가로 성공한다
멕시코에 있었으면 나았을 것을,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에 투자했다가 카스트로 집권 후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하고 미국으로 ?겨 온다
이진우나 이연수 모두 돈에 밝고 현실 적응을 잘 하는 사람인가 보다
아버지 이종도 대신 어머니를 닮은 모양이다

멕시코 이주민들의 안타까운 최후를 보면서 차라리 미국으로 건너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도 미국은 세계 최강국이고 사회가 안정되어 그럭저럭 버티다 보면 밥은 먹고 살 수 있으니까
1세대의 희생을 바탕으로 그래도 2세대, 3세대는 중산층으로 편입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멕시코는 정국의 혼란으로 모두들 불행한 삶을 살았다
인간에게 환경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인 것 같다
이런 걸 운명이라 해야 하나?
이정이 미국으로 못 간 후 혁명군에 참가해서 승승장구 하는 걸 보고 그래, 미국 가서도 노동자로 있을 거라면 차라리 어수선한 멕시코가 기회의 땅이 될 수도 있겠다, 잘 하면 권력도 잡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역시 안정된 선진국이 나을 뻔 했다
처음 계획대로 미국에 갔다면 편안한 여생을 보냈을 것이다
이정은 담력도 세고 세상 풍파를 헤쳐 나갈 능력도 있는 남자인데 (더구나 잘 생긴 사람으로 묘사된다)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 과테말라 밀림에서 총살됐는지, 그의 삶을 생각하면 안타깝다
멕시코 이민선에서도 일본인 요리사들 시중을 들며 먹을 것을 해결하던 사람이 아닌가!!
어린 나이지만 어떻게 하면 먹고 살 수 있을지를 본능적으로 아는 똑똑한 놈이었다
그런데 상황 판단을 못하고 과테말라 용병으로 떠나다니!!
세상 일을 다 알 수는 없는 것 같다

최선길의 캐릭터는 좀 마음에 안 든다
도둑놈이던 최선길이 멕시코에 온 후 천주교도가 되면서 같은 조선인을 학대한다는 설정은 너무 뻔하다
그 상황이 되면, 즉 동료를 배신하고 그들을 감독해야 할 입장이 되면 마음의 부담감을 벗기 위해서라도 더 잔인해지는 걸까?
난 그래도 최선길이 조선인과 멕시코인 사이에서 마음의 갈등도 하고 괴로워 할 거라 기대했는데, 그는 더욱 잔인해진다
그의 농장 주인 이그나시오는 광신도다
종교란 왜 사람을 폭력적으로 만들고 그것에 명분을 부과하는가?
요즘 문제가 되는 이슬람의 테러도 그렇지만 참 안타까운 역사다
이그나시오는 박수 무당에게 마귀를 ?는다고 채찍질을 한다
농장 노동자들에게 채찍질을 하면서도 성당에 앉아 울면서 기도하는 이 모순적인 인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럴 때 보면 대체 신의 뜻이 무엇인지 헷갈리기까지 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질투하는 신, 분노하는 신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이그나시오 같은 뻔뻔한 인간의 행태를 용서해 주실까?
그는 결국 최선길과 함께 노동자들에게 잡혀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다
기가 막힌 최후다
어쩌면 예수와 같은 최후를 맞았다고 기뻐하며 죽지는 않았을까?

멕시코의 인디오들은 대부분 카톨릭으로 개종했는데, 요즘도 사순절이 되면 십자가를 끌고 가서 못박히는 행사를 거행한다고 한다
그 기사를 보면서 광신적인 행위가 거북스러웠는데 책을 읽으면서 그것이 그들의 역사임을 알았다
저자의 설명으로는 인디오들은 카톨릭을 자신들의 종교 형식으로 바꿔서 받아 들였다고 한다
즉 인육을 바치는 제사처럼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마리아 숭배에도 열광한다

조장윤이란 캐릭터도 독특하다
처음 서술로 보면 뭔가 큰 일을 할 것 같은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는데, 결국 그가 꿈꾸는 세상이란 박정희식의 독재자 정부였다
문 대신 무가 지배하는 세상, 한 사람의 초인에게 권력이 집중되서 일사분란 하게 일하는 세상 말이다
조장윤은 군인으로 배에서 이정에게 이름을 지어 준 사람이다
그는 멕시코 농장에서 조선인 노동자를 대표해 협상도 끌어낸다
계약에서 풀린 후는 조선인 협회도 세운다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문제다
자아도취에 빠진 것이다
그는 심지어 과테말라에 나라를 세울 계획까지 갖는다
그런데 웃긴 건 막상 밀림에 도착하고 보니 자기 계획이 전혀 현실성이 없다는 걸 깨닫고 자기가 데려 온 용병들을 버리고 줄행랑을 친 것이다
훗날을 기약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명분을 앞세우면서 말이다
원래 인간이란 이렇게 불완전한 존재인가?
우리가 감탄에 마지않는 영웅이란 어쩌면 환상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원하기 때문에 과장되고 부풀러진 신화 속에 쌓여 있는, 실은 인간적인 즉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사실은 별 능력도 없는 그런 인간이 영웅의 실체는 아닐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밌게 읽은 책이다
문학상 수상할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난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재밌는 건 확실하다
한 편의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져도 시청자들 많이 끌 것 같다
일단 혁명이 끼어 드니까 화면 구성이 화려할 것 같다
솔직히 부럽다
이렇게 재밌는 소설 쓰는 작가를 보면 부럽기 짝이 없다
그의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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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4-11-18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딴 작가같으면 한 다섯권 이상으로 불려서 질질 끌 얘기를 한 권에 녹여내는 작가의 역량이 참 대단하게 느껴졌어요.또 짧디짧은 문장과 건조한 문체로도 이렇게 입체적으로 얘기를 재미있게 끌고 갈 수 있구나 하면서 감탄했던 작품입니다.

marine 2004-11-19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죠 대하소설로 쓸 만도 한데 확실히 요즘은 그런 책은 안 먹히는 것 같아요 솔직히 김영하의 단편들 읽고 좀 실망스럽긴 했는데, 이 책은 정말 재밌어요

하얀달 2004-11-19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상을 참..간편하게 쓰신다는 느낌이 드네요. 참, 솔직합니다.

marine 2004-11-20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은 일기 형식으로 쓴 비공개 글을 올린 거라 내면적인 얘기들이 많습니다 좀 부끄럽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