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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2 ㅣ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진중권은 정말 글을 잘 쓴다
너무 재밌게 잘 읽고 있다
세 권 모두 소장할 가치가 충분하다
강준만 보다 훨씬 잘 쓴다
아마 그는 미학에 대해 전공 이상의 열정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를 통해 현대 미술이 추구하는 바를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
내가 르네상스나 바로크 그림에 열광하는 이유는 이해할 수 있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딱 보면 뭘 그렸는지 그 대상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반면에 현대 미술은 대체 뭘 나타냈는지 이해가 안 간다
그나마 구상화는 좀 나은데 완전히 비구상으로 그려진 것들은 저게 그림인가? 이런 생각마저 든다
솔직히 잭슨 폴록의 흩뿌리는 그림에서 무슨 감동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감동을 느끼느냐, 안 느끼느냐의 차이는 내가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차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림에 드러나는 있는 그대로의 대상만을 인식하고 있다
현대 미술이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에 대해 나는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인식의 틀이 갖춰지지 않은 것이다
화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니, 무슨 감동이 오겠는가?
사실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도 마찬가지다
각 사물들이 나타내는 알레고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화가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할 수 없다
그저 사진으로 찍은 것 같은 그 정교함에 감탄할 뿐이다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면서 현대 미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생겼다
에셔가 형식의 파괴를 추구한 반면, 마그리트는 내용의 파괴를 시도했다
대상을 고립시킨다거나, 확대해 보인다거나, 다른 대상과 섞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그렸다
사과처럼 평범한 사물도 방 안에 가득 차도록 확대시켜 놓으니까 느낌이 확 달라졌다
또 물고기 머리에 사람 다리의 인어 아가씨 역시 완전히 확 깨는 그림이었다
에셔는 뫼비우스의 띠나 악마의 고리처럼 공간을 비틀므로써 형식의 파괴를 추구했는데,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보는 마그리트의 그림에 더 끌린다
달리 역시 시계라는 사물이 주는 견고함 대신 시간이 흐른다는 유연성을 부여해 그 유명한 흐물흐물한 시계를 그렸다
어찌 보면 현대 예술가들은 과거보다 훨씬 더 상상력이 넘치는 것 같다
과거 화가들이 정형화된 틀에 맞춰 보다 정교하게 사물을 그려내려고 기술적 노력을 한 반면, 현대 화가들은 더 이상 그리는 기술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졌다
사진기나 나오고 텔레비젼이 등장해서 똑같이 그릴 필요가 없다
똑같이 그리는 것은 기계들과 화가는 게임 자체가 안 되기 때문에 인간의 예술적 존재 의의는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바로 그게 상상력이다
기계는 아무리 애를 써도 똑같이 그리는 것 밖에 못한다
반면 사람은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가지 시도를 할 수 있다
컴퓨터가 더욱 발전하면 손재주가 없는 사람도 상상력만 풍부하면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정말 그게 가능하다면 예술의 범위는 더욱 넓어질 것이고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