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그림 읽기
조이한.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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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편하게 읽은 책이다
일단 독자의 수준을 낮게 잡은 건지, 아니면 저자들이 원래 쉽게 말하는 스타일인지 (아마 후자겠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휙휙 넘기면서 읽었다
도판 상태가 아주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컬러 아닌가
사실 저자도 안타까워한 바지만 보티첼리의 그 유명한 "봄" 은 가로 2m에 세로 3m의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데 겨우 몇 cm의 사진으로 보니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겠는가?
내셔널 갤러리에서 고흐의 "해바라기" 를 봤을 때 살아 움직일 듯 한 그 붓의 터치에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른다
또 쇠라의 "아를리느의 여름" 역시 엄청난 크기로 벽 한 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책에서 작게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의 점묘법과 색의 조화가 얼마나 멋지던지 감탄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므로 모든 예술품은 직접 눈으로 감상해야 한다
옛날에 사진이 없거나 흑백 프린트 시절에는 예술품을 감상한다는 것 자체가 특권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플란다즈의 개" 에 나오는 불쌍한 네로가 루벤스의 "성모 승천" 한 번 보는 게 평생 소원이었겠지

이 책의 특징은 그림 하나하나를 자세히 가르쳐 주기 보다는 그림을 보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진중권이 쓴 듯한 현대 미술 부분은 이미 "미학 오디세이" 에서 감탄한 바지만, 조이한의 르네상스 그림 설명도 유용했다
보티첼리의 "봄" 과 "비너스의 탄생" 에 이런 뜻이 있는 줄 미처 몰랐다
도상학이 처음부터 정해진 게 아니라 여러 요소들을 고려해 후세 학자들이 해석한 결과라고 하니, 그것도 상당히 의외였다
그러니까 화가 자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로 안 그렸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비너스는 쌍둥이였다고 한다
천상의 신 비너스는 제우스가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잘라 바다로 던져서 태어났고, 자연의 신 비너스는 주피터와 주노의 딸이라고 한다
"봄" 에 나오는 비너스는 옷을 입고 있는데 지상의 신으로 에로스적인 사랑을 의미하고, "비너스의 탄생" 에 나오는 비너스는 조개에 실려 오는 폼이 딱 천상의 신 비너스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육욕을 의미하는 비너스는 당연히 옷을 입어야 하고, 정신적 사랑을 의미하는 비너스는 나체로 나와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니 마네가 매춘부 옷을 벗긴 "올랭피아" 를 그렸을 때 파리 시민들이 경악을 금치 못한 것이다

도상학적 설명을 읽다 보면 당시 화가들의 인문학적 교양이 상당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예술의 수요자가 일반 대중이 아닌 귀족이었으니 이 수준 높은 구매자를 만족시키려면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겠는가
요즘처럼 익명의 구매자를 위해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 아예 구매자 따위는 고려조차 안 하는 게 예술이라고 생각할테지만) 주문을 받은 뒤 그리는 것이므로 구매자의 요구 사항을 꼼꼼하게 만족시켜야 했다
물감값도 비싸서 울트라 마린 같은 비싼 물감은 성인 같은 특정 인물에게만 쓰라고까지 계약서에 명시했다고 한다
주문자의 수준이 아주 높을 경우 아예 구도나 등장하는 사물까지 다 지정을 했고 계약서와 그림이 다르면 돈을 지불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화가들의 그림에 대한 생각이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예술 자체를 숭배하기 보다는 일종의 직업으로서 대했을 것이다
그러니 렘브란트나 루벤스 등이 그림을 신분 상승의 도구로 생각했겠지
르네상스 그림을 볼 때는 도상학이 절대 빠질 수 없다

베르메르의 "금의 무게를 다는 여인" 도 해석을 듣고 보니 너무 의외였다
베르메르야 워낙 아름다운 그림을 많이 그려서 내용과는 상관없이 그저 감탄하면서 보는 화가인데, 막상 뜻을 알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그림 안쪽에 또다른 액자가 걸려 있는데 그 그림이 바로 백 년 전에 그려진 콜레르트의 "최후의 심판" 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비슷하긴 하다
"최후의 심판" 은 예수가 재림한 후 저울로 죄의 양을 재서 악한 자와 선한 자를 나눈다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금의 무게를 다는 여인은 곧 예수님을 상징하고 그녀는 지금 인간의 죄를 저울질 하려는 것이다
다가올 최후의 심판을 기억하라는 게 이 그림의 도상학적 해석이다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에 살았을 베르메르가 괜히 저울질 하는 여자를 그렸을 리 없고, 아마 그런 의도로 그렸을 게 분명하다
당시 화가들의 교양 수준이 얼마나 높았을지 짐작이 간다

요즘 관심이 가는 화가가 독일의 뒤러다
그는 자화상을 그리면서도 마치 예수님처럼 경건하고 신비롭게 묘사했는데 그가 그린 풍경화도 정말 멋지다
저자의 설명으로는 뒤러의 자의식을 드러내는 그림으로써, 당시 구매자인 귀족들이 원하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못 팔았을 거라고 한다
시대가 넘어가면서 화가들이 점점 주문자의 요구사항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식 세계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다
뒤러가 그린 "연못 위의 집" 은 동양화의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산뜻한 수채화 같다
그림에 상징을 집어 넣으려고 했던 당시 귀족의 입맛에 안 맞았을 게 뻔 하다
시대를 앞서가는 이런 천재 작품의 진가를 알아 볼 감식안을 갖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긴 그런 맛에 가난한 예술가를 후원하는 건지도 모른다
남들은 그 가치를 모르지만 오직 나만은 그 가치를 발견하는 기쁨으로 말이다

아비 바르부르크란 사람은 정말 대단하다
유태인이었는데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는 대신 책을 선택했다
동생에게 장자권을 팔아 버리고 그 대신 평생 자기가 원하는 책을 사달라고 한 것이다
동생이야 처음에는 왠 횡재냐 했겠지만, 설마 6만여 권의 책을 모으리라곤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당시는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해 지금보다 책값이 훨씬 비싸고 귀한 책을 구하기 힘들었을테니, 형의 책값 대느라 돈 꽤나 축냈을 것이다
진짜 부럽다
평생 일 안 해도 되고 원하는 책 마음껏 사 볼 수 있고 관심있는 분야만 연구하면 되니까
아니나 다를까 바르부르크는 도상학의 이론을 정립해 미술사에 길이 남는다
독일이 유태인을 핍박하자 영국으로 그 책들을 다 옮겨 바르부르크 연구소를 세웠다
정말 멋진 삶이 아닐 수 없다

현대 미술에 대한 이해는 비단 나만 어려운 게 아닌가 보다
진중권 역시 현대 미술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난감해 한다
관람객이 버린 쓰레기조차 혹시 예술품이 아닌가 의심했다는 에피소드는 슬프기까지 한다
그는 현대 미술을 읽으려고 하는 대신 그냥 보라고 한다
있는 그대로 느끼지, 거기서 특별한 주제나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이다
하긴 몬드리안의 추상화 등을 보면서 그냥 느껴야지, 거기서 무슨 의미를 찾겠는가?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는 순간 현대 미술은 끔찍하게 어렵고 복잡한 게 돼버린다
작품 자체는 안 어려운데 해석이 난해해서 해석 이해하느라 작품은 뒷전으로 밀리는 식이다
저자는 현대 미술이 퍼포먼스적 측면이 있다고 본다
즉 예술가가 직접 공연을 하면서 관객과 소통할 때까지는 좋은데, 일단 공연이 끝나 버린 후 재료만 전시하면 의미를 잃는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퐁피두 센터에 갔을 때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른다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도무지 감동이랄 게 없다
르네상스 그림이야 내용 몰라도 그 정교한 묘사 기술에라도 감탄을 한다지만 헌옷 몇 개 걸어 놓는 식의 미술을 어떻게 이해하라는 건지...

그래도 에셔나 마그리트 식의 그림은 흥미로웠다
다르게 보기를 가르쳐 준다고 할까?
확실히 현대는 상상력이 중요하고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어찌 보면 점점 더 인간적으로 변하는지도 모른다
예술의 평등화, 혹은 민주화라고 이해해야 할까?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내면의 이야기를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다
점점 예술가와 관객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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