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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평점 :
폴 오스터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는데, 소설인지 자서전인지 구분이 안 간다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스티븐 킹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는데, 오스터 역시 자기 얘기를 하면서도 허구적인 소설이란 생각이 든다
1인칭 시점을 즐겨 쓰는 그의 스타일 때문일까?
자신의 이름이 등장하긴 하지만, 자기 얘기가 아닌 또 하나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다
"빵 굽는 타자기"라는 제목이 참 독특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 의미를 되새겨 보니 상당히 슬프다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써야 하는 슬픈 현실을 빗대는 말이 아닐까 싶다
지금이야 미국의 대표적인 소설가가 되어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만 해도 10여 권이 넘는 인기 작가인데, 그에게도 살기 위해 글을 써야 하는 처참한 과거가 있었던 모양이다
스티븐 킹 역시 "캐리"로 뜨기 전까지 고등학교 교사와 세탁소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힘들게 생계를 유지한 전적이 있는데, 글로 생계를 유지하기까지의 과정은 참으로 험난한 것 같다
데뷔작이 바로 인정받는 운 좋은 작가들에 비하면 불행하지만, 여전히 먹고 살기 위해 잡문들을 대량 생산해 내야 하는 가엾은 작가 예비군들에 비해서는 대단한 행운인지도 모른다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서 능력은 전제 조건일 뿐이다
실력 있는 작가들이 편집자의 눈에 발탁되어 대중에게 읽혀지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
오스터나 스티븐 킹 정도면 대단히 성공한 소설가들인데, 이들에게도 무명 시절은 혹독했으니 성공은 쉽게 움켜 쥘 수 있는 만만한 것이 아닌 게 분명하다
이 책을 읽으면 오스터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전형적인 캐릭터들이 사실은 작가 자신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뉴욕 3부작"에 등장한 팬쇼의 유조선 생활은 오스터 자신의 젊은 시절이었고, 파리 체류 역시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탐정 소설을 쓰는 퀸이라는 캐릭터도 실은 오스터 자신이다
그의 소설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미친듯이 책을 읽고 현실을 떠나 고립된 삶을 즐기는 은둔자도 바로 오스터 자신의 모습이다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야구를 좋아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소설과 현실의 차이는 곧 등장한다
소설에서는 현실 감각이 부족한 주인공이 운명적인 사람을 만난 후 곧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오스터가 유명한 소설가로 성공하긴 했지만, 그건 순전히 피땀 어린 노력 탓이지, 그의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운명적인 구원자 덕은 아니다
말하자면 우리 삶에 행복한 우연이란 흔히 찾아오지 않는다는 얘기다
컬럼비아 대학을 중퇴한 오스터는 파리로 건너가 번역일을 하며 책 읽기에 몰두한다
베트남 징집을 피하기 위해 학교로 돌아온 후 졸업한 그는, 유조선에서 식당일을 하면서 돈을 모은다
하루에 두 세시간만 일을 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내야 하는 단조롭기 그지없는 생활이 그에게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이상적인 삶이었다
노동 시간을 최소화하고 생계에 지장을 안 받으면서 책 읽는 시간을 최대화 시킬 수 있는 삶!!
(배에서의 생활은 "뉴욕 3부작"에서 거의 똑같이 묘사된다)
오스터의 소설을 읽다 보면, 풍부한 고전 인용에 깜짝 놀라게 되는데 그 왕성한 독서력이 그 배 안에서 완성된 모양이다
컬럼비아 대학 시절에도 그는 미친듯이 책을 읽었다고 쓴다
스티븐 킹도 지적했지만 훌륭한 소설을 쓰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불타는 독서열인 것 같다
(킹은 트레드밀 위에서도 책을 읽는다!!)
졸업 후 좋은 번호를 추첨해 징집을 피한 오스터는 파리로 건너가 그 때부터 생계를 잇기 위한 비참한 삶을 산다
유조선에서 모은 돈이 바닥난 후 먹고 살기 위해 미친듯이 글을 써야 했다
그의 타자기는 훌륭한 작품을 쓰기 위한 창작의 도구가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잡문을 대량 생산해 내야 하는 "빵 굽는 타자기"로 전락했다
결혼 후 아이가 생기면서 그는 더욱 비참해진다
자기 혼자 먹고 사는 것도 힘든데, 무려 세 명의 입을 책임지게 됐으니 그 무력함과 막막함이 얼마나 컸을까!!
그런데 참 이상한 게 있다
오스터는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아버지가 죽은 후 많은 유산을 상속해 글쓰는 일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왜 그의 부모는 그를 돌봐 주지 않았을까?
독립하면 부모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는 그들의 사고방식 때문일까?
결국 오스터에게 많은 재산이 상속된 걸 보면, 달리 유산을 나눠 가질 사람도 없고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 꽤 부자였던 모양인데 왜 아들이 세일즈맨으로까지 전락해 이혼하도록 방치해 둔 걸까?
부유한 아버지를 두고도 내일 먹을 것을 걱정할 정도의 절대 가난을 겪어야 하는 그 시스템이 신기하다
글쓰기에 지친 오스터는 최후의 수단으로 야구 게임을 만들어 판다
그가 얼마나 야구를 좋아하는지 잘 드러나는 일화다
그런데 이 "액션 베이스볼"은 한 마디로 시대 착오적인 게임이다
보드 게임이 새롭게 유행하고 있긴 하지만, 컴퓨터 게임에 익숙한 어린이들에게 카드 게임을 판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는 카드 그림까지 직접 그리는 성의를 보이며 장난감 박람회에서 바이어들을 설득하지만 모욕만 듣는다
바이어들 앞에서 열심히 카드를 늘어 놓고 게임을 하지만, 몇 분 하지도 않고 나가라는 매몰찬 말을 들을 때 그 패배감과 수치심이라니!!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를 것이다
그의 첫 탐정 소설 "스퀴즈 플레이" 역시 편집자들로부터 수모를 선사한 애물단지였다
요즘 세상에 누가 탐정 소설을 읽느냐는 식이다
어쨌든 그는 성공했다
이혼 후 새로 결혼도 하고 쓰는 책마다 비상한 관심을 이끌어 내며 이 먼 한국땅에도 수많은 매니아들을 만들어 냈다
그는 스스로 현실 감각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것을 능력으로 채울 수 있는 운 좋은 사람임이 틀림없다
전업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먹고 살기 위해 억지로 글을 써야 하는 끔찍한 삶이 싫어 아마추어로 남기로 한 소심한 나에게, 소설가들의 치열한 삶은 늘 흥분을 불러 일으킨다
한 번에 이룬 것이 아니라 고통의 삶을 견뎌 낸 뒤 마침내 성취한 것들은, 객관적인 평가를 떠나서 훨씬 더 위대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천재는 평범한 사람들의 질투를 받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