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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
J. D. 샐린저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호밀밭의 파수꾼"은 "위대한 게츠비"처럼 고전의 위치를 확립했으면서도, 트렌드 소설처럼 인식된다
그래서 가끔 편집을 예쁘게 해서 출판되기도 한다
고전이지만 지루하지 않고 현대적 감각을 지닌 재밌는 소설일 거라 기대했는데, 상당히 의외의 책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별다른 감동을 받지 못했다
어쩌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단 읽기는 쉽다
300페이지짜리 책인데, 세 시간 만에 다 읽었다
1인칭 독백 시점으로, 심리 묘사도 별로 없고 사흘 동안 일어난 일들을 그저 담담히 서술할 뿐이다
특별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다
퇴학 결정이 내려진 후 집에 통보가 오는 수요일 전까지, 집에 들어 가지 않고 며칠간 밖에서 지내는 얘기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었을 때 기분이 난다
특정 사건이 없이도 하룻동안 있었던 일들을 담담히 서술해 가는 그런 종류의 소설이다
이 작품이 인정받는 이유가 혹시 그런 묘사력에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주인공 홀든은 벌써 네 번째 고등학교에서 성적 불량으로 자퇴하는, 그렇고 그런 놈이다
이 책이 발표된 게 1951년인데, 50년대 미국 고등학교는 성적이 나쁘면 자퇴를 시킨 모양이다
머리가 아주 나쁜 건 아닌데 (그의 형제들은 비교적 똑똑하다고 묘사된다), 공부에 큰 의욕을 안 보여 늘 낙제를 한다
그렇다고 깡패들과 어울리는 불량 학생도 아니다
불량 학생이 되기에는 몸집이 너무 왜소하다
확실히 우리 고등학생들과는 다른 점이 많이 나오는데, 일단 담배 권하는 사회라는 게 놀랍다
술은 스물 한 살이 되기 전까지 절대 안 되는데, 대신 겨우 열 여섯 먹은 주인공에게 담배는 허용된다
허용 정도가 아니라, 기차에서 만난 친구 어머니에게 담배를 권할 정도다
"위대한 게츠비"에서도 데이지가 손님들에게 담배를 권하는 장면이 나온다
일단 우리 상식으로 보면 어른 앞에서는 담배를 안 피우는 법이고, 더구나 여자들이 길거리에서 혹은 남자 앞에서 담배 피우는 걸 아주 불쾌하게 생각하는데, 우리 정서와 상당히 다른 모양이다
마약 보다는 낫다고 생각되서 그런가?
변태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특히 동성연애자가 변태로 등장하는데, 아마도 1950년이라는 시대적 배경 때문에 그럴 것이다
지금이야 다양한 성적 취향으로 인정받는 추세지만 (요즘은 동성애를 공적인 자리에서 비난하지 못한다), 당시만 해도 변태적인 성향으로 받아 들이는 분위기였나 보다
참 깨는 이야기인데, 홀든이 퇴학 후 엔톨리니 선생님을 찾아 간다
그 선생님 댁에서 좋은 이야기를 듣고 잠자리에 드는데, 놀랍게도 선생님이 홀든의 머리를 은근히 쓰다듬는다
홀든은 그가 변태성욕자임을 깨닫고 밖으로 뛰쳐 나간다
혹시 남선생과 여제자 사이면 몰라도, 남선생과 남제자 사이에 이런 에피소드를 집어 넣다니, 더구나 엔톨리니 선생님은 홀든의 방황을 잡아 주는 사람으로 나오는데!!
불경하기 이를 데 없는 설정이다^^
엔톨리니 선생님의 충고가 기억에 남는다
여러 학교를 돌아다니며 자기 삶에 열정을 갖지 못하는 홀든에게 그는 이런 충고를 한다
너는 바닥이 없는 추락을 계속하고 있다, 인생의 어떤 시기에는 원하는 것을 주지 못하는 환경에 처하기도 하는데, 너는 니가 처한 환경이 줄 수 없는 것만 찾고 있다, 너는 실제로 그것을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니 환경이 절대 주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미리 체념해 버린다...
또 교육이란 자기 머리에 어떤 사상을 수용할 수 있는지 일일이 시험해 보는 시간을 줄여 주고, 자기 역량을 정확히 측정해 주는 과정이다, 자기 역량을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은 지식의 습득이라는 표면적인 기능에 대한, 제대로 된 반론인지도 모른다
지식의 습득은 가장 기초적이고 단순한 기능에 불과하다
교육이 흔히 생각하듯 지식의 습득에 불과하다면, 학원 다니면서 검정고시 치는 게 훨씬 이익일 것이다
단순히 학력을 쌓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역량이 어느 정도이고 나에게 맞는 것은 무엇인지 찾는 과정이며 교육이 그 과정을 단축시킬 수 있다는 선생의 정의가 가슴에 와닿는다
이렇게 따지면 성적 지상주의에 물든 교사들이나, 대학 안 갈 건데 학교 다닐 필요 있냐는 학생들이 학교의 기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네 번이나 학교를 전전하는 홀든에게 너는 지금 바닥이 없는 추락을 계속 하고 있다고 지적한 선생의 말도 무척 인상적이다
바닥이 없는 추락처럼 무서운 게 또 있을까?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다고 자포자기한 사람에게 여전히 지금보다 더욱 악화될 수 있다는 충고는 무척이나 겁나는 말일 것이다
그러므로 늦었다고 자기 인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제일 빠를 때라는 얘기는, 지금이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더 나빠질 수 있다는 경고인지도 모르겠다
홀든이 이 선생님으로 인해 구원받나 했는데, 변태 성욕자로 판명되면서 그의 방황은 계속된다
그는 어지러운 도시를 떠나 광활한 서부로 가서 평화롭게 살고자 한다
사실 그는 변호사의 아들로 무척 유복한 편이다
또 그의 형제들이 똑똑한 걸로 봐서 그도 머리가 아주 나쁜 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처한 환경에 만족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걸 보면, 아직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그는 서부로 간다 해도 여전히 방황할 게 뻔하다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를 구원해 준 것은 놀랍게도 열 살 짜리 여동생 피비다
홀든은 특별히 이 동생을 사랑하는데, 부모가 무서워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오빠를 위해 크리스마스 용돈을 모두 건네 준다
서부로 떠나기 전, 피비에게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편지를 보내는데 뜻밖에도 오빠를 따라 가겠다고 옷을 챙겨들고 나타난다
인생에 대한 겉멋이 잔뜩 든 열 여섯 짜리 홀든의 눈에도 열 살 먹은 여동생의 가출은 어이없게 보였을 것이다
그는 한사코 떠나겠다는 어린 동생을 달래 회전 목마를 타러 간다
피비가 회전 목마 위에서 손 흔드는 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그는 무한한 행복감을 느낀다
어쩌면 행복이란, 혹은 삶의 의미란 거창한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자잘한 일상인지도 모른다
홀든은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를 피하지도 않고, 파란 외투를 입고 해맑게 웃으며 회전 목마 위에 앉아 있는 여동생을 행복하게 바라 본다
결국 홀든은 이 날 맞은 비로 폐렴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물론 도덕 교과서처럼 홀든이 갑자기 철이 들어 다시 학교로 가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다짐한 건 아니다
다만 서부로 떠나겠다는 식의 현실도피적인 유치한 생각은 접고, 좀 더 성숙한 태도를 보이긴 한다
정신과 의사가 열심히 공부하겠냐고 자꾸 다그치자, 열심히 공부할 생각이긴 하지만 나중에 무엇을 할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조소하기도 한다
사실 어른들의 이런 다짐들은 별 의미없는 소리이기 일쑤다
당위가 현실이 되진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계발서나 공부 잘 하는 법, 돈 잘 버는 법 등도 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다)
속어들을 써 가며 평이하게 쓴 책이지만 미국 교과서로 인용되는 고전이라고 한다
빠르게 전개되는 표현력은 높이 살 만 하다
혹 묘사력을 기르고 싶은 사람이라면 유심히 볼 만한 책이다
열 여섯 소년이 겪는 방황을 과장하지 않고 산뜻하고 담백한 문체로 가볍게 그리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 시절에 제대로 된 방황을 했는지 궁금하다
성인이 되기까지 나름대로의 고통과 방황이 있었을텐데, 나는 그 시기를 어떻게 넘겼는지 새삼 돌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