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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초상화 또는 인간의 빛과 그늘
고종희 지음 / 한길아트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오랫만에 읽는 르네상스 그림 이야기다
한동안 서양화에 빠져 르네상스 시대와 근대 그림들만 열심히 탐독했는데, 몇 권 읽다보니 중복되는 얘기가 너무 많아 잠시 밀쳐 뒀는데, 마침 도서관에 주문한 책이 도착해 열심히 읽었다
피사 대학에서 르네상스 그림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저자의 약력이 말해 주듯, 꽤 수준있고 좋은 설명들과 엄선한 그림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현학적이지 않아 더욱 좋다
조토 이후 갑자기 뛰어난 솜씨를 보인데는, "명화의 기법"에서 호크니가 지적했듯 광학의 발견이 한 몫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거장들의 솜씨는 놀랍기 그지없다
이 책은 르네상스 시대의 초상화만 다뤘는데, 앞뒤 표지에 모자이크 식으로 배치된 수많은 초상화들을 보면서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그렸다는데 놀라는 게 아니라, 인물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느낌이라 감동적이다
그 순간의 인상과 느낌을 포착해 수백년 후의 독자들에게도 그림 속의 주인공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느끼게 해 준다
특히 독일의 위대한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초상화는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그가 직접 그린 세 점의 초상화 중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도를 도입했는데, 정말 성자처럼 보인다
또 그의 후원자였던 막시말리안 1세의 초상은 푸른 배경과 어울려,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라파엘로가 그린 "교황 율리우스 2세"라든가, "교황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 등을 보면, 고집스럽고 권위적이며 탐욕스럽기까지 한 역대 교황들의 이미지가 잘 포착된다
사진처럼 정교하다고 하지만, 사진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르네상스인들에게 사진과 대가의 초상화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으면, 역시 초상화 쪽을 택했을 것 같다
라파엘로는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 보다 후대에 훨씬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고 한다
무릎까지 보여주는 도상이라든가, 대각선 방향으로 앉아 시선을 아래로 두는 방식 등, 기존 초상화 형식을 탈피해 후학들에게 라파엘로 양식을 모방하게끔 했다
그는 홀로 작업한 미켈란젤로와는 달리, 중소 기업 수준의 공방을 거느리고 많은 여자들과 사랑을 나눴다는데, 붉은 색의 강렬한 색감이나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본떴음에도 신비한 분위기 보다는 인물의 사실적 분위기를 강조한 "마그달레나 스트로치" 등을 보면 과연 세속적인 영광을 누리고자 한 적극적인 성격이었을 것 같다
흔히 화가라고 하면 고흐처럼 예술혼이라는 광기와 싸우면서 세상과 대립하는 외로운 존재라 인식되기 쉬운데, 르네상스 화가들을 보면 그림이 출세의 방법이라는 느낌이 든다
(사실 화가도 직업인 이상, 세속적 성공을 지향하는 걸 탓하는 사람이 이상하기도 하다)
루벤스가 17세기에 유럽 왕실을 돌아다니며 외교관 역할을 한 것처럼, 르네상스 화가들도 교황과 제후들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해 갔다
특히 티치아노 같은 경우는 그의 초상화 모델이 되기 위해 서로 경쟁할 정도였다고 한다
교황 파울루스 3세 같은 경우는 그를 로마로 부르기 위해, 티니아노의 아들에게 성직을 수여한다고 꼬실 정도였으니 가히 그 명성을 알 만 하다
(티치아노는 아들의 성직 수여가 차일피일 미뤄지자, 교황의 초상화를 스케치만 하고 베네치아로 돌아가 버린다 감히 교황의 초상화를 그리다 말다니, 대단하다!!)
뒤러나 라파엘로 등도 화가로서의 명성을 이용해 작위까지 수여받았을 정도로 교황과 제후들의 총애가 대단했다
오늘날 르네상스 시대의 명작들을 보면서 그 위대함에 감탄하지만, 실은 대중에게 권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됐다는 속사정을 듣고 보면 왠지 모를 허탈감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작 경위나 화가의 돈벌이 수단이었다는 외적인 환경을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림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고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이야 말로, 아무 소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돈을 쏟아 부을 수 있는 부르주아들의 경제적 여유를 피력하기 좋은 장르라고 한 부어스틴의 정의를 다시금 확인한다
베네치아나 피렌체, 플로방스 등의 산업 발전이 없었다면 르네상스의 화려한 예술도 부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 예술 후원을 당연시 하는 그 전통이 부럽다
돈만 많으면 대접받는 게 아니라, 예술을 이해하고 후원할 수 있는 심미안까지 갖춰야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셈이다
다 빈치는 초상화를 겨우 다섯 점 밖에 그리지 않았는데 (그는 할 일이 너무 많아 그림에만 몰두할 수 없었다) 그 명성에 걸맞게 신비롭고 긴 여운이 남는다
"모나리자"야 워낙 유명하니까 달리 말할 필요도 없지만, 비교적 덜 알려진 "지네브라 데 벤치"라든가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 등의 매력도 상당하다
이 두 여인의 초상을 한 번 보면, 쉽게 그 형상이 잊혀지지 않는다
"모나리자"의 매력이 보일듯 말듯 한 신비로운 미소에 있듯, 다른 두 그림도 독자에게 묘한 인상을 준다
입술을 앙 다문 지네브라 데 벤치나, 담비를 안고 있는 우아한 체칠리아 갈레라니의 인상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특히 체칠리아는 스포르차 궁의 가장 매력적인 여인이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 미모를 짐작할 만 하다
다 빈치 특유의 신비로운 분위기가 세 초상화에 모두 잘 드러난다
명작에 관한 책은 언제나 마음이 설렌다
인쇄된 그림으로 봐도 가슴이 설레는데, 실제로 보게 되면 얼마나 흥분할지 모르겠다
(내가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고흐의 "해바라기"를 직접 본 이후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그림에 대한 지식을 좀 더 쌓고 미술관에서의 관람에 도전해 보고 싶다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것은 정말로 인간의 기본 욕구인 모양이다
이렇게 많은 그림책들이 나와 눈을 즐겁게 해 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