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방대수 옮김 / 책만드는집 / 2001년 8월
평점 :
품절


아주 어렸을 때 엄마, 아빠와 함께 비디오로 "위대한 게츠비"를 본 기억이 난다

전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고, 자기 집 수영장 에어 매트 위에 엎드려 쉬고 있을 때 한 남자의 총을 맞고 그대로 죽어 버린 가엾은 개츠비 역의 로버트 레드포드만 생생히 기억난다

그 장면이 어찌나 인상적이었는지, 그 후 나는 레드포드의 팬이 되어 그가 나오는 영화는 모조리 섭렵하곤 했다

오래 전부터 숙제처럼 미뤄 두던 "위대한 게츠비"를 이제서야 비로소 읽게 됐다

늘 그렇지만 영화는 소설과 참 다르다

 

한 여자에게 일생을 걸어 성공한 뒤 다시 그녀에게 나타났으나, 그녀가 낸 교통사고에 휘말려 희생자의 남편에게 살해당하는 내용이라 알고 있었는데 소설은 독특하게도 제 3의 인물에 의해 서술된다

개츠비가 평생 사랑했던 여인, 데이지의 사촌인 닉이 화자이다

단순한 서술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주인공이고 게츠비와 데이지 이야기는 그저 한 사건에 불과한 느낌까지 준다

어쩌면 피츠제럴드가 말하고 싶었던 건 단순한 사랑 얘기가 아니라, 서부의 시골 청년이 동부의 뉴욕으로 건너와 성공했으나, 치정 사건에 휘말려 허망하게 죽고 만 부질없는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1920년대 미국의 서부는 시골이고 동부는 출세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야망이 숨쉬는 곳이었나 보다

화자인 닉 역시 증권맨으로 성공하고자 뉴욕에 건너 오지만, 게츠비 사건을 계기로 동부를 떠난다

그는 아마도 출세와 성공의 덧없음을 봤을 것이다

 

데이지란 이름은 흔한 것 같으면서도 산뜻하고 귀여운 느낌을 주는데, 게츠비가 사랑한 여인은 그 이름에 잘 어울린다

어떤 평론에서 본 것처럼 그녀는 물질주의에 경도되어 사랑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고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해 일말의 책임감도 없는 부박한 영혼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저 비난만 하기에는 뭔가 허전하다

그저 일신의 안위만을 위해 복잡한 것을 꺼리는 태도는 우리 대부분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데이지는 부잣집 딸인데다, 사교계에서도 촉망받는 여성이었다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개츠비는 부유하고 아름다우며 세상 근심이라고는 모를 것 같은 이 아가씨에게 넋이 나간다

아마도 데이지는 게츠비에게 이루고 싶은 꿈이고 목표였을 것이다

게츠비는 데이지를 통해 자기가 얻고 싶은 구체적인 미래를 실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돈 때문에 데이지를 사랑한 것은 절대 아니다

데이지가 그의 곁을 떠난 후 5년 동안 돈을 모아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난 후 사랑을 고백했듯, 게츠비는 기본적으로 신실하고 순수한 청년이다

게츠비에게 있어 데이지란, 평생 이루고 싶은 소망과 목표의 결정체였고 하나의 이상형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돈이라고 가볍게 치부할 수 없다

만약 그가 데이지를 동경했던 것이 단지 돈 뿐이었다면, 부자가 된 후에 다시 데이지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돈만 많으면 다른 여자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법이니까

 

이 소설을 피츠제럴드의 자전적 이야기라고도 하는데, 그 역시 부유한 판사의 딸이었던 젤다를 얻기 위해 많은 애를 쓴다

사교계의 여왕이었던 젤다는 가난한 청년 피츠제럴드에게 별 관심이 없고, 그는 젤다를 얻기 위해 열심히 글을 써서 마침내 사회적 명사가 된 후 그녀와 결혼한다

이 두 부부는 사교계의 유명한 커플이었다고 한다

연예인과 비슷할 정도로 그들의 동정은 뉴스의 대상이 됐다

비록 결말은 불행하지만 말이다

 

데이지는 그저 게츠비를 사랑할 뿐이다

게츠비가 그녀를 우상으로 섬기는 것과는 다르게, 가벼운 연애 감정을 대한 것 뿐이다

사실 우리 주변의 사랑이란 데이지가 한 때 게츠비에게 끌렸던 것처럼, 호감을 느끼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수준이다

게츠비처럼 자기 삶 전체를 바치는 그런 사랑이 오히려 드물고 특이하다

문제는 게츠비의 이 열정과 지고지순함을 데이지가 알아 줘야 하는데, 이 데이지란 여자는 목숨을 건 사랑의 의미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아주 단순한 여자라는 사실이다

게츠비가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났을 때, 바람 피우는 남편에게 진절머리가 난 그녀는 또다시 가벼운 마음으로 그와 어울리고 자신이 낸 사고를 게츠비가 덮어 썼을 때도 그에게 일절 말 한 마디 없다

오히려 그녀는 복잡한 사건을 피하기 위해 남편과 여행을 떠나 버린다

게츠비가 희생자의 남편에게 억울하게 살해당했을 때 조차 그녀는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않는다

아마도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될까 두려웠을 것이다

도대체 게츠비는 겨우 이런 평범하고 소심하며 도덕성이 결여된 한심한 여자를 우상으로 섬겼단 말인가!!

그의 열정과 순수함이 가엾다

결국 그녀가 저지른 죄값을 대신 치른 게츠비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아무 의미도 보람도 없는 개죽음에 불과했다...

 

데이지의 남편이란 작자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그녀의 남편 톰은 데이지 차에 치어 죽은 머틀의 정부였다

뻔뻔하게도 톰은 머틀이 죽은 후, 남자 관계가 있다고 의심하던 그녀의 남편 윌슨에게 게츠비를 들먹거린다

데이지가 개츠비의 차를 타고 있었는데, 물론 톰은 운전자를 게츠비로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남편에게라도 고백할 용기가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윌슨에게 차의 주인이 게츠비라고 알려 주고, 사실은 그가 머틀의 정부였다고 거짓말까지 한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머틀과 자신의 관계가 탄로날까 봐 조마조마 하던 톰은, 이 기회에 게츠비에게 뒤집어 씌우고 자신은 쏙 빠져 나온 것이다

정부와의 관계에 진실한 사랑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우습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죽은 머틀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자숙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게 아닐까?

한 때 사랑을 나누던 여인이 차에 치여 죽었는데, 자기가 빠져 나올 궁리만 하다니, 그 아내에 그 남편이라 할 만 하다

 

이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던 닉은, 진실을 알리지도 못한 채 조던에게 이별을 고하고 뉴욕을 떠난다

조던 베이커는 골프 선수에다 사교계를 주름잡는 멋진 뉴욕 여성인데, 데이지의 친구이기도 하다

그는 뉴욕에 머물면서 조던을 사모하기도 했으나, 진실함이 결여된 화려한 겉모습은 부질없는 짓이라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닉은 조던의 모습에서 데이지를 발견했을 것이다

데이지나 조던은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편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는 그저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런데도 개츠비의 사랑과 헌신이 너무나 위대해, 평범한 우리들은 부끄럽고 초라해진다

데이지가 그 사랑을 받아 들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의미만이라도 깨달았다면, 가엾은 개츠비의 죽음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텐데...

 

게츠비의 장례식은 부와 명성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일부러 신문의 부고란에 개제하지도 않았지만, 그의 대저택에서 놀고 마시던 사교계 인사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진실한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하고 오직 데이지에 걸맞는 남자가 되기 위해 애쓴 그의 삶은 이렇게 덧없다

그의 아버지가 닉에게 보여 준 젊은 시절 게츠비의 낙서는 내 가슴을 무척 아프게 한다

가진 것은 없으나 꿈과 야망을 간직한 이 신실한 청년은 새벽 5시에 기상해 잠들 때까지 빡빡한 시간표 속에서 자신을 단련한다

미래에 대한 확고한 비전을 가지고 앞을 향해 달리던 게츠비는, 데이지라는 잘못된 목표를 세우는 바람에 허망하게 죽고 만다

인생이란 이렇게 덧없는 것인가...

 

게츠비나 데이지의 심리 묘사가 뛰어날 거라 생각했는데, 화자가 닉이다 보니 그저 관찰자의 입장에서 짤막하게 서술될 뿐이다

오히려 닉이 느끼는 삶에 대한 통찰이 주를 이룬다

게츠비를 만나고 그의 죽음을 통해 인생을 다르게 본 닉의 성장기 같기도 하다

독특한 서술 구조가 이 소설의 매력인 것 같다

다시 한 번 로버트 레드포드의 멋진 연기로 게츠비를 만나 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