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결혼 시키기
앤 패디먼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 전부터 읽고 싶던 책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도서관에는 없어서 광주까지 가서 어렵게 빌렸던지라 더욱 열심히 읽었는데, 기대했던 것만큼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다른 독자들도 지적했듯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책과 작가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하기 때문에 쉽게 몰입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그나마 토머스 하디나 에드워드 기번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라면 좀 알겠는데, 미국이나 영국에서 유명한 현대 작가들은 들어 본 적도 없는지라 쉽게 공감이 안 갔다

또 저자의 서술 태도 역시 쉽고 매끄럽지만은 않았다

모르긴 해도 역자 역시 번역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책에 등장하는 소설과 작가와 단어들의 뉘앙스를 설명하기 위해 역자는 주석에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 볼만한 재밌는 에세이다

제일 부러운 것은 저자 앤 패디먼의 가족 환경이다

출판사에서 교정일을 보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앤은 어머니와 오빠를 포함한 네 가족이 모두 활자 중독 수준이었는데, 자신과 똑같은 남자와 결혼해 두 아이들까지 같은 증세를 보인다

이 얼마나 대단한 행복인지!!

서문에서도 밝히지만 이 책은 그저 앤의 개인적인 일상사를 이야기 함에도 불구하고, 전부가 책에 대한 이야기다

책이 곧 삶이기 때문이다

남편 조지와 침대에서 서로 책을 낭독해 주다가 잠이 든다는 부분에서는 두 손 다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취미를 공유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연애의 방법임이 틀림없다

 

책을 사랑하는 습성은 부모에게 물려받기 쉬운데, 앤이 그랬듯 나 역시 아빠에게서 전해 받았다

활자 중독증이라는 특성 때문에 아빠와 유달리 친한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앤의 가족과는 다르게 내 동생들은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만 아빠의 가장 중요한 특성을 물려받은 셈이다)

그래서 우리 부녀간의 대화는 거의 대부분이 책에 관한 내용이다

거기까지는 앤과 비슷한데, 결혼 부분에 이르면 그녀를 부러워 하지 않을 수 없다

내 남자 친구는 책에 거의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가 읽는 책은 기껏해야 세금 적게 내는 방법 같은 실용서다) 함께 캠핑을 가서 텐트 안에서 책을 읽는 연애 따위는 기대할 수가 없다

물론 결혼을 하게 되면 내 책만 소장하면 되니까 공간적인 면에서는 이득이긴 하다

 

책을 어떻게 소장할 것인가는 책 애호가들에게 공통된 골칫거리인 모양이다

"책은 나름의 운명을 가진다"의 저자 역시 같은 고민을 토로했는데, 앤 역시 남편 책까지 합쳐져 아파트가 고서점으로 변할 것 같다는 걱정을 한다

특히 앤은 90이 넘은 아버지의 책들까지 물려 받아, 다시 아들딸에게 전해 줄 계획이라 소장할 책들이 더욱 많다

책 소장 문제는 우리 집도 심각하다

책을 몽땅 쌓아 놓고도 살기에 충분할 만큼 넓은 집에 살면 문제가 없으련만, 경제적 능력 때문에 집의 크기는 늘 한정되어 책이 주거 공간을 침입하고 있다

지금 우리 집은 더 이상 책을 쌓을 공간이 없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계속 책을 산다) 내가 독립해서 나오지 않는 이상 내 책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다

 

이 책에서 새롭게 발견한 독서법이 바로 "현장 독서"다

책에 나온 바로 그 장소에서 책을 읽는 독서법인데, 이를테면 "로마 제국 흥망사"를 로마에서 읽는 식이다

앤과 그녀의 남편은 "콜로라도 강과 그 협곡 탐험"을 콜로라도 강 옆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면서 읽었다

당연히 책에 등장하는 급류의 두려움을 온 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인쇄된 그림으로만 보는 명화들을 직접 미술관에 가서 볼 생각은 했지만, 책에 나오는 장소에서 책 읽을 생각은 미처 못했는데, 역시 앤은 대단하다!!

 

앤이 나와 비슷한 습관이 하나 있는데, 카탈로그를 열심히 읽는 것이다

내가 활자 중독임을 카탈로그를 읽을 때 느끼는데, 앤 역시 아주 꼼꼼하게 많은 시간을 투자해 읽는다

덕분에 그녀의 집에는 온갖 종류의 카탈로그가 배달이 되서, 그녀가 일이 많을 때는 남편이 우편함에서 미리 절반은 버려 버린다

앤과 나의 공통점은 카탈로그를 열심히 읽지만, 절대 물건을 사지는 않는다

우리가 카탈로그를 읽는 까닭은 활자를 읽기 위함이지, 물건을 사기 위해서는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책을 소장하는데 별 의의를 안 두기 때문에 저자의 싸인을 받는다거나, 누군가의 헌사가 쓰여진 책에 대한 미련이 별로 없는데, 앤을 보면서 소장의 가치에 대해 새롭게 느꼈다

싸인회가 생기지 전에 열혈 독자들은 책을 산 후 저자에게 싸인해 달라고 보낸다

물론 베스트셀러 작가의 경우 수 십만권의 책에 일일히 싸인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책이 주인에게 돌아갈 확률은 아주 낮다

자신의 글을 남겨 선물한 책을 어느 헌책방에서 발견하게 된 기분은 어떨까?

적어도 누군가 글을 써서 선물한 책은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간직해야 될 것 같다

또한 서점에 진열된 책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앤은 말한다

워낙 책이 많아 나중에 고서점을 열까 하는 소망도 갖지만, 집 없는 책은 그저 팔아야 할 물건일 뿐이라는 서점 직원의 충고를 앤은 기꺼이 받아 들인다

"집 없는 책"이란 말은 우리가 책을 읽고 내 것으로 소유할 때만이 의미있는 한 권의 책이 된다는 것을 잘 말해 준다

 

맞춤법에 집착하는 앤의 가족은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아 반가웠다

솔직히 나는 앤처럼 한 권의 책에서 수백 개의 오자를 발견할 만큼 대단한 실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맞춤법에 맞게 글을 쓰려고 꽤 애를 쓴다

특히 광고 등에서 잘못된 철자를 발견하면 꼭 지적하고 넘어간다

(옛날에 만나던 남자 친구의 편지를 엄마가 보더니만, 맞춤법도 제대로 못 맞추는 남자랑은 만나지 말라는 엄마 말이 생각난다 엄마는 국어 선생님이시다)

레스토랑에 식사하러 가서 메뉴판을 보면서 잘못된 철자를 찾아 내는 앤 가족의 모습에 정이 간다

 

역자는 후기에서, 한 때 독서가 취미라고 하면 당연한 것을 취미라 말한다고 비난받던 시절이 그리울 정도로 요즘은 책 읽는 게 특별한 일이 되버렸다고 한탄한다

이제 독서도 동호회를 만들 정도로 특별한 취미가 됐다

취미로서의 독서는 당연히 해야 할 교양으로서의 독서와는 다른 의미를 갖는 게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책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앤의 에세이는 더욱 빛이 난다

나도 내 책에 애정을 느끼면서 수집하는데 열을 올릴 날이 왔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