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표정훈 지음 / 궁리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내가 읽고 싶던 딱 그 책이다

그렇지만 100% 만족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책의 수준을 결정짓는 조건 중 자료 수집 능력과 서술 능력을 들었는데, 내용은 아주 마음에 들지만 저자의 서술 스타일이 나랑은 좀 안 맞는 것 같다

어떤 책들은 술술 읽히는데, 또 어떤 책들은 내용과는 상관없이 잘 안 읽힌다

자꾸 건너 뛰는 부분이 생겨 자 들고 한 글자, 한 글자 읽으려고 노력한 책이다

 

이 책은 나처럼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 읽기 에세이라 하겠다

북 패티시즘이라는 용어까지 나오는데 솔직히 난 아직 이 수준은 아니다

독서광이 되면 책을 읽는 행위를 뛰어 넘어 책 자체에 집착을 보이게 된다

물건으로서의 책 그 자체까지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구하기 힘든 책일수록 반드시 손에 넣으려는 집착을 보인다

독서광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책을 소장할 공간을 확보하는 일이다

저자 역시 큰 방을 아예 서재로 꾸며 버리고 발코니도 공사를 해서 서재로 쓰고 있다

이건 우리집에서도 흔히 보는 일이다

아빠가 워낙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책 때문에 주거 공간이 줄어들 지경이다

책을 소장하고도 여유 공간이 많은 넓은 집에서 살면 좋으련만, 그 정도로 부유하지는 않으니 불편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 아빠 연구실로 분산이 되있어 다행이지만, 내 책까지 더해져 집이 창고 수준이 되가고 있다

 

책을 어떻게 보관해야 할까?

아빠 책들 때문에 나는 책을 소장하는데 좀 부정적인 편이다

일본의 유명한 저술가인 다치바나 다카시가 쓴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를 보면 서재에서 원하는 책을 즉시 찾아 줄 비서를 고용하고, 책을 소장하기 위해 건물을 지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돈 주고 산 책을 쉽게 버릴 수도 없고, 계속 쌓아 놓을 수도 없어 지금까지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편인데, 도서관의 문제점은 신간이 늦게 나온다는 점이다

신문에서 괜찮은 책 서평을 읽으면 당장 그 책을 읽고 싶은데, 도서관에 입점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지라 돈을 벌면서 부터는 바로 사 버린다

아직까지 내 책이 주거 공간을 침해할 정도는 아니지만, 아빠랑 같이 살려면 나도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겠다

 

나는 가끔 왜 책을 읽는가에 대해 고민하곤 한다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 사는데 별 도움도 안 되는 책을 읽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가끔 회의가 든다

특히 세이노란 사람이 "직업에 우선 충실하고 교양 쌓는 건 돈 번 다음에 해라, 박찬호가 야구 연습 안 하고 교양 도서만 읽는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겠는가?" 라는 식으로 쓴 글을 읽으면서 고민에 빠지게 됐다

(물론 그도 책 열심히 읽으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이 때 책은 역사책 같은 게 아니라 경영서나 부동산 같은, 사는 데 도움이 되는 책들이다)

단순히 지적인 즐거움을 위해 시간을 내서 책을 읽는다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특히 이런 의문은 고대 이집트에 관한 책이나 알파벳의 역사 같은 현실에 별 쓸모가 없는 책을 읽을 때 더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나의 고민에 해답을 준다

책을 읽으면서 연관성을 기르라고 한다

이를테면 중국 문화에 대해 알고 싶으면 중국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섭렵한다

이 과정에서 중국에 대한 배경 지식이 쌓이고, 중국에 관한 신문 기사나 뉴스를 접할 때 보다 체계적인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또 나중에 중국에 관한 사업을 하게 된다면 과거에 읽은 책들을 통해 중국에 대한 기본 지식을 쌓을 경우 훨씬 잘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사실 이건 좀 단순한 예에 불과하고,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세상을 더 넓게 보기 위해서라고 하겠다

또 책은 책 자체의 지식을 머리에 집어 넣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를 보다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읽는다고 할 수 있다

모르면 모를수록 교양이 생기는 것 중에 여성지와 스포츠 신문, 유럽의 왕실 암투, 드라마 등이 있다고 하는데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다

 

요켠대 책이란 지식을 쌓기 위해서 읽는다기 보다는 (이것은 책의 하위 목적에 불과하다) 타인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히며, 근본적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방향을 잡기 위해 읽는 것이다

저자는 논술 고사에 대해서도 비판을 한다

영상 매체에 길들여진 요즘 학생들에게 고전의 지문을 주고 거기에 관한 내용을 쓰라는 것은 수영도 못하는 사람을 바다에 던져 놓고 헤엄쳐 나오라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가까스로 헤엄쳐 나온 후 과연 그 학생은 물 근처에 다시 가려고 할까?

책을 읽는 행위는 세상을 보는 기본적인 틀을 잡는 것인데, 시험을 위해서라는 목적이 생겨 버리면 과연 의미있는 독서가 될 것인가를 걱정한다

그러므로 대학들은 학생에게 무조건적인 고전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고전의 의미를 해석하는, 접근하기 쉬운 텍스트를 먼저 내 놓아야 한다고 일침을 가한다

 

소제목의 아래에 책에 관한 좋은 글귀들이 많이 실려 있다

"천국은 거대한 도서관일지도 모른다"

"돈이 생기면 책을 사고, 그래도 남으면 음식과 옷을 사겠다"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책일수록 그 책은 아무도 안 읽었을 가능성이 크다" 등등 인류 문화를 대표하는 위인들의 입에서는 책에 관한 주옥같은 명언들이 쏟아져 나온다

(천국이 도서관일거라 상상하는 가슈통 바슬라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책을 사랑한 사람이 아닐까?)

 

이 책에서 새로운 개념은 북큐레이터다

큐레이터란 미술관에나 필요한 건 줄 알았는데, 미국은 도서관에 북 큐레이터가 근무한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도서관 사서인 셈인데, 단순히 우리나라처럼 대출 서비스를 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니라 박사 학위까지 소유한 전문가들이라고 한다

인문학 전공, 역사학 전공, 문학 전공 하는 식으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도서관에 어떤 책을 소장할 것인가를 결정한다고 한다

어떤 주제에 관한 논문을 쓸 때 인터넷 검색을 하는 것 보다, 도서관 북 큐레이터에게 문의하는 게 훨씬 빠르다고 한다

저자는 사서들의 질을 높히기 위해 복수 전공을 의무화 하여 도서관학 외에 전문 분야를 두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하지만, 현실적으로 사서의 대우가 형편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어려울 거라는 말도 빼먹지 않는다

빌 게이츠는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것은 공공 도서관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고향이자 마이크로 소프트 회사가 있는 시애틀의 도서관에 2천만 달러를 기부했다고 한다

강철왕 카네기는 미국 전역에 수천개의 도서관을 설립하고, 그 운영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가히 세계 최고의 부자들다운 배포 큰 멋진 기부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도 기부 문화가 정착되면 도서관에 기부하는 것이야 말로 거의 영원히 자신의 이름을 길이 남길 수 있는 최고의 유망한 분야일 거라고 저자는 돈많은 사람들을 설득한다

(카네기나 빌 게이츠 만큼은 못 벌어도 작은 돈이나마 기부하게 될 날이 왔음 좋겠다)

 

요즘처럼 실용서가 난무하는 시대에 책이 주는 진정한 의미가 과연 지식인가, 하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만드는 책이다

어쩌면 책은 우리의 삶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전자북이 보급되면 종이책은 사라질 거라 섣부른 진단을 하기도 하지만, 책이 곧 삶을 의미하는 지성인들이 버티는 한 생각보다 종이책의 생명력은 길 것이다

어쩌면 인류의 운명과 그 궤를 같이 하여 끝까지 따라갈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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