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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평전
정규웅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가끔 TV에서 나혜석의 일생을 조명할 때가 있다
아마 그녀가 갖는 다양한 의미들 때문일 것이다
한 마디로 얘깃거리가 많다고 해야 하나?
항상 그렇지만 대부분의 책이나 프로그램에서 나혜석에 관한 이야기는 그림 자체 보다는 그녀 삶의 비극성에 초점을 맞춘다
조선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라는 화려한 타이틀과, 시립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죽은 말년이 극명한 대비를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후 춘원 이광수를 비롯, 조선 유학생들 사이에서 많은 흠모를 받았다고 하길래 그녀가 아주 미인일 거라고 상상했는데 의외로 사진을 보니 평범하다
요즘 기준으로 보자면 촌스러운 (좀 경망스런 표현이긴 하지만) 20세기 초의 평범한 여성이다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최승희의 요염하고 매혹적인 흑백 사진과 비교된다
그녀가 여러 남성들에게 흠모의 대상이 됐던 것은 외모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동경 유학생이라는 게 더 크게 작용했을 것 같다
어쨌든 젊은 시절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구한말 여자가 학교에 다니는 것만 해도 대단한데, 서양 그림을 그리고, 거기다 일본으로 유학까지 떠났으니 말이다
일본 유학은 남자들도 쉬운 일이 아닌데 당시로서는 최고의 엘리트였던 셈이다
아버지가 큰 부자였는데 특별히 개화 사상을 가져서 그런 건 아니라고 한다
그녀의 둘째 오빠가 깨인 사람이라 여동생들의 유학을 강력하게 주장해서 이뤄진 것이다
어찌 됐든 4남매가 모두 일본으로 유학을 갔으니, 대단한 집안이 아닐 수 없다
역시 이야기의 핵심은 최린과의 스캔들에 있다
남편 김우영이 일본의 배려로 세계 여행을 떠나게 되서 파리에 머무는 중 18살이나 많은 최린과 바람이 난다
당시 남편은 베를린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중이었고, 나혜석은 파리에서 그림을 공부했다
파리에 조선 여자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화제가 될텐데, 세력가인 최린과 바람이 났으니 파리의 조선 사회가 그 문제로 시끌벅적했다고 한다
그런데 웃긴 건 남편이 그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처음에는 관대하게 넘어가 두 부부는 파리에서 넷째를 임신하기까지 한다
왜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 때 일이 문제가 되어 이혼까지 갔을까?
이 책은 소설 형식인데 여기 나오는 얘기들은 대부분 나혜석이 신문에 발표한 것들을 기초로 한다
그녀의 얘기를 들어 보면 순진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유부녀가 잠시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났어도 오히려 그것을 계기로 남편에게 더 잘 하면 부부간의 사랑은 두터워질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주장하나
말하자면 바람 피운 게 결혼 생활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식이다
바람핀 남자들의 뻔뻔한 변명으로, 21세기에도 통용되지 않을 이 말이 1920년대에 조선 여자로부터 나왔다는 게 참 놀랍다
그녀가 예술가이기 때문일까?
작가의 추론으로는 그녀가 남편에게 직접 그 얘기를 했을 거라고 한다
참,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유럽에서는 임신까지 하고 무사히 귀국했으나 결국 이혼까지 간데는 나혜석이 다시 최린에게 사귀자고 보낸 편지에 책임이 있다
남편이 부인의 떠들석한 스캔들을 눈감아 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이유로 부유한 최린에게 다시 사귀자고 편지를 띄운다
최린이 자신과 가족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줄 거라 기대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는지, 좀 이해가 안 간다
그녀는 남편과 이혼할 생각도 없었고, 남편이 변호사로 개업 후 일이 안 풀려 시댁이 어려움에 처하자 이런 편지를 썼다고 한다
물론 최린이 세력가이긴 하지만 지고지순한 사랑에 빠진 것도 아니고, 잠깐 외국에서 바람핀 유부녀의 생계를 돌봐 준다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겨우 4개월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최린이라는 놈도 나쁜 놈이다
나혜석이 그런 철없는 편지를 보내 왔으면 점잖게 거절했으면 될 일을, 친구를 시켜 김우영에게 아내 단속 잘 하라고 훈계를 한다
열받은 김우영은 결국 나혜석에게 이혼을 강요하고 바로 새장가를 든다
웃긴 건 아직 이혼이 성립하지 않았는데도, 버젓이 새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는 것이다
김우영은 이미 나혜석과 결혼할 때 두 번째였는데, 그 후로도 두 번이나 결혼을 더 해서 총 4회의 결혼 전력을 갖는다
나혜석과의 결혼 당시 사진을 보면 평범하게 생긴 나혜석과는 달리 점잖고 부드러운 멋쟁이 신사답다
시어머니를 모시지 않고, 자신의 예술 활동을 후원해 주며, 죽은 첫사랑의 (최승구) 무덤에 비석을 세워 달라는 걸 결혼 조건으로 내세운 나혜석을 아내로 맞아 들인 점이나 (그는 아내의 예술 활동에 후원을 아끼지 않는다) 네 번째 결혼한 여자가 독립운동가인 양한나 (해방 후 부산에 경찰서를 창립하고, YWCA를 세우는 등 사회 활동이 활발했다) 등인 걸 보면 그도 퍽 열린 사고방식을 가진 것 같다
그렇지만 네 번이나 결혼을 하고 (첫부인과는 사별) 나혜석과의 이혼 과정에서 단 한 푼의 재산도 주지 않은 채 쫒아낸 뒤 아이들과의 접근도 막은 걸 보면, 역시 시대적인 한계성을 갖는 인물이라 하겠다
나혜석은 이혼을 하긴 했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이혼고백장을 잡지에 (삼천리) 실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요즘 같으면 여성지에 이혼 후 심경 고백 등을 기고했다고 할까?
지금도 이혼한 여자가 억울하다고 잡지에 글 쓰면 일단 삐딱한 시선으로 보기 마련인데, 1920년대 상황이 오죽 했으랴 싶다
나혜석을 대담하게도 자신의 불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왜 남자는 혼외정사를 가져도 되는데 여자는 안 되냐고 반문한다
또 비록 불륜을 저지르긴 했으나 재산은 둘이 이룬 것이므로 절반을 내 놓라고 한다
최린에게도 유부녀의 정조를 유린했으니 위자료를 내 놓으라고 소송을 건다
사회적 명망이 손상되는 걸 우려한 최린은 재판으로 가기 전에 합의금을 지불하고 끝낸다
시대를 완전히 앞서 간 여인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재능이 뛰어나는 수 밖에 없다
적당히 훌륭해서도 안 되고, 탁월할 정도로 뛰어나야 비로소 세상의 편견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나혜석의 예술적 재능은 세상의 편견과 질시를 이겨낼 만큼 탁월하지는 않았다
김우영과 이혼 후 조선미전과 일본 제전 등에 입선하던 촉망받는 화가의 그림은 형편없는 평가를 받아 생계마저 위협하게 된다
여학교 교사 자리 등이 났는데도 이상하게 나혜석은 방랑벽이 있어 정착을 못한다
최린에게 받은 돈을 가지고 파리로 떠나려고 하지만, 건강이 악화되고 좀 더 많은 돈을 모으고자 그린 그림들이 혹평을 받으면서 나혜석은 급속히 몰락해 간다
오빠 집에 의탁하기도 하고 절을 떠돌기도 하는 등 정착을 못하다가 결국 그녀는 시립병원에서 불행한 인생을 마감한다
다른 건 몰라도 저자의 말대로 그녀가 취한 일련의 행동들이 사회적으로 지지를 받았더라면 그녀의 예술성이 그토록 참혹하게 짖밟히지는 않았을 것 같다
요즘 같으면 시대를 선도하는 페미니즘 화가라고도 불릴 만 한데, 나혜석이 살았던 시대는 불행히도 1920-30년대다
시대를 초월하는 위대한 예술가가 아닌 이상, 어느 정도는 살고 있는 시대와 사회에서 제시하는 기준을 받아 들여야 하는 법인데, 나혜석이 그 점을 가볍게 생각한 것 같다
어쨌든 조선 최로의 여류 서양화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슬픈 삶을 산 나혜석이 그나마 요즘 와서 그 일생을 조명받고 있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의 예술 보다는 불행한 일생에 초점을 맞추기는 하지만 말이다
책 표지에는 전혜린 보다 먼저 나혜석이 있었다고 하던데, 전혜린 보다 훨씬 더 비극적인 삶을 산 것은 그녀가 한 세대 앞에 살았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