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문자, 알파벳
존 맨 지음, 남경태 옮김 / 예지(Wisdom)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어렵다

갱지 같은 가벼운 종이를 사용해서 400페이지나 되지만 무척 가벼운 게 마음에 들어 집어 들었는데, 생각보다 어렵다

일단 그림이 한 장도 없기 때문에 알파벳의 발전 역사를 글을 읽으면서 추론할 수 밖에 없다

알파벳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대단히 궁금한 사람이거나, 유럽 역사에 정통한 분이 아니라면 과히 일독을 권하지는 않겠다

번역은 "종횡무진 서양사 & 동양사"를 쓴 남경태 씨가 맡았는데, 꼼꼼한 각주가 돋보인다

그렇지만 저자가 워낙 복잡한 이야기를 어렵게 써서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어제 읽은 이집트 책에서 보듯, 알파벳의 기원은 수메르 문자나 상형 문자에서 비롯됐다

그 문자들이 알파벳으로 변형됐다기 보다는, 말을 글로 남긴다는 혁명적인 발상을 전수받은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겠다

저자는 알파벳이 언제 최초로 등장해서 오늘날의 위치에 이르렀는지를 방대한 역사적 자료를 거론하며 설명한다

그런데 오늘날 유럽 국가들의 대부분이 자신들의 언어를 알파벳을 이용해 표기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거의 모든 유럽 국가의 역사들이 들먹여진다

유럽 역사에 어느 정도 식견이 있지 않다면 무슨 얘기인지 조차 알기 어려울 정도로 난해하다

 

그나마 이 책에서 반가웠던 것은 한글에 대한 설명이 따로 한 장으로 독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제일 관심있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알파벳처럼 수천년의 역사를 가지로 기존의 것을 변형시켜 문자를 만들어 온 것은 이해가 가는데, 도대체 한글이란 문자는 어느 날 갑자기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 것도 참조하지 않고 문자를 만든다는 발상 자체가 여간 신비로운 게 아니다

(물론 옛 가림토 문자나 위구르 문자 등을 참조했다는 건 알지만 결정적인 근거는 될 수 없다고 본다)

저자가 이 부분에 대해 실증적인 논증을 해주길 바랬는데, 실망스럽게도 자세한 논증은 없다

다만 한글이 얼마나 우수한 글자인지에 관해 감탄할 뿐이다

아마도 저자는 한글에 대해서 구체적인 지식이 없는 것 같다

전공하지 않는 학자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래도 한글이 세계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최고의 문자이고,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인정받는다는 걸 알게 되서 뿌듯하다

(활자를 좋아하는 나는 세종대왕에게 늘 감사한다 그 분이 한글을 발명하지 않았더라면, 그 어려운 한자로 책을 읽어야 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기독교도로서 받아들이기 난처한 부분이 이 책에서도 나온다

나는 기독교도이지만 성경을 있는 그대로 (즉 쓰여진 그대로)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문학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21세기의 보편적인 이념를 믿는 나로서는 괴롭지 않을 수가 없다

세상이 7일만에 창조됐고, 곧 말세가 닥칠 거라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들은 오히려 해결하기 쉽다

워낙 분명하게 과학적으로 논증된 문제들이기 때문에 재론의 여지가 없는 셈이다

그러나 모세의 이집트 탈출이라든가, 가나안 입성 등의 구체적인 역사적 기록으로 들어가면 괴로워진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출애굽" 사건을 상당히 부정하는 편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모세가 실존 인물인지조차 의심스럽다는 입장이고, 현존했다면 "출애굽"은 성경에 기록한 것처럼 엄청난 대사건이 아니라 이집트 역사에는 기록할 가치조차 없는 노예들의 작은 반란에 지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역사학자나 고고학자들은 구약 성경을 유태 민족의 신화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다른 여러 나라의 정황들이나 고고학적 발굴 결과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를 우려해서 중세 시대에는 성경을 읽는 것 자체가 금지였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스라엘에 알파벳이 전해진 과정을 기술한 부분은 나를 무척 곤혹스럽게 했다

(내 믿음이 부족한 건 아닐까, 이런 생각도 했다!!)

 

그 외에도 이탈리아에 먼저 살았던 에트루리아인들의 문자라든가, 크레타 섬의 선형 B 문자, 중국의 한자까지 다양한 지역들의 문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저자의 결론은 알파벳이란 여러 문화의 복합적인 발명품이고, 또 글을 표기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체계이기 때문에 미국의 영향력은 차치하고서라도 결국 이 문자가 세상을 지배하리라는 것이다

특히 인터넷의 발달로 고대 로마인들조차 알 수 있는 키보드를, 중국인들도 익히는 걸 보면 고유 문자 체계는 알파벳과 협력해야만 존속될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이 과장은 아닌 것 같다

역자의 서문에서도 밝혔지만 영어 공용화 논란은 단순히 민족주의적 관점에서만 볼 일은 아닌 듯 싶다

이제 한글도 알파벳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시점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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