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벌이의 함정 - 중산층 가정의 위기와 그 대책
엘리자베스 워런, 아멜리아 워런 티아기 지음, 주익종 옮김 / 필맥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 읽는 책들은 유별나게 나의 감성을 깨우는 것 같다

어제도 이 책을 읽은 후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세상 살기 정말 만만치 않아...

 

제목부터가 도발적이다

"맞벌이의 함정"이라...

왜 둘이 버는데 계속 빚을 지고, 사는 건 더욱 척박해지는 것일까?

정말 우리들은 신용카드가 주는 과소비에 취해 있는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더욱 불행하게도) 저자들은 우리 사회가 "악덕 채무자 신화"에 속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우리가 지난 세대보다 조금 더 많이 쓰고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아주 조금일 뿐이다

두 사람이 함께 버는 소득에 비하면 소비가 크게 증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과소비 부분은 가정 경제가 어려워지면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실직, 질병, 이혼 등으로 한 사람의 소득이 사라질 때 절대 줄일 수 없는 고정 비용의 증가 때문에 많은 미국의 중산층 가정들이 파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고정 비용을 차지하는 가장 큰 부분은 역시 집값이다

땅덩어리 넓은 미국도 우리처럼 집값을 지불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우리나라가 강남에 입성하기 위해 허리가 휘도록 대출금을 갚아가는 반면, 미국은 시내를 떠나 교외의 주택지구로 나가기 위해 애를 쓴다

도심은 슬램화 되어 범죄가 들끓고, 무엇보다 가난하고 위험한 유색 인종들이 많아 공립학교 교육이 형편없기 때문에 부유하고 안전한 백인들이 사는 교외로 나가 자녀들을 좋은 학교로 보내기 위해 미국 중산층들은 자신들의 소득 대부분을 집값에 쏟아 붓는다

더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한 부모들의 노력은 비단 우리 사회만의 문제는 아닌 모양이다

"강남 엄마"의 반대말이 "그냥 엄마"라고 하더니만, 미국 엄마들도 교육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대학을 나와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21% 정도 됐는데, 요즘은 97% 이상이 대학과 성공이 정비례 관계라고 믿는다

주립 대학은 받을 수 있는 학생 수가 한정되어 있고, 사립 대학은 등록금이 워낙 비싸기 때문에 미국 중산층들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좋은 학교에서 공부시키길 원한다

 

미국 공립 교육이 사립에 비해 얼마나 형편없는가는 여러 연구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특히 도심의 학교들은 총기 난사 등으로 대표될 정도로 자녀들에게 위험하기까지 하다

당연히 부모들은 교외의 안전한 주택 지구로 옮겨 자녀들이 좋은 학군의 학교로 다닐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교외 지역의 주택들은 한정되어 있고, 수요는 늘어나기 때문에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건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 여기서 맞벌이들이 함정에 빠지게 된다

혼자 벌 때는 비싼 교외 주택을 갖는 걸 상상도 못 하다가, 한 사람이 더 벌게 되자 그 소득을 집값에 쏟아 부을 수 있게 된다

입찰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 집만 맞벌이를 하는 게 아니라 거의 모든 집이 둘 다 벌기 때문에 다들 입찰 경쟁에 뛰어들 수 있다

당연히 집값은 계속 오를 수 밖에 없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붉은 여왕의 세계가 나온다

이 곳은 워낙 빨리 돌기 때문에 부지런히 뛰어도 여전히 제자리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뛰지 않으면 그나마 제자리에도 못 있고 뒤처지게 된다

맞벌이 중산층들이 이 붉은 여왕의 세계에 빠져 있는 셈이다

 

저자들이 내 놓은 해법은 학군제를 폐기하고 원하는 학교에 보낼 수 있게 하라는 것이다

공교육의 질을 높히고 프리 스쿨을 공교육화 시키라고도 한다

조기 교육 열풍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게 아닌 모양이다

미국도 교육 개념이 바뀌어 7세부터 시작하는 공교육은 너무 늦기 때문에 다들 프리 스쿨에 미리 보낸다고 한다

그런데 이 유치원 개념의 프리 스쿨에 엄청난 사교육비가 쏟아지고 있다

또 대학 등록금도 동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학은 방만한 경영을 지양하고 스포츠 팀 운영처럼 돈이 많이 드는 일은 과감하게 포기하라고 요구한다

해마다 등록금 인상을 놓고 진통을 앓는 것 역시 한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닌 셈이다

기부금 입학은 사립 대학 운영에 필수라는 말이 실감난다

대학 총장의 능력은 얼마나 많은 기부금을 모아 오느냐로 결정된다는 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제일 우스운 건 이 모든 문제들의 현실적인 해결책이 자녀를 안 갖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난 세대까지만 해도 자녀는 집안 경제의 노동력이 되고, 부모의 노후를 책임지는 보험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요즘은 자녀가 없으면 안전한 노후를 보낼 확률이 늘어나고, 자녀를 키우는 가정은 무자녀 가정보다 파산할 확률이 세 배나 커진다

자녀가 주는 이득을 예전에는 개인이 취했으나, 이제는 세금을 내고 노인 인구를 부양하며 나라를 지키는 등의 이득을 사회가 갖게 된다고 분석한다

자녀는 이제 품질 보증서가 없는 비싼 소비재가 되어 부모를 파산으로 이끄는 중요한 요인이 되버렸다

자녀 양육의 책임을 계속 개인에게만 돌리면 현명한 선택을 하려는 개인들은 요즘처럼 출산률 저하로 대응하는 수 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출산률 저하는 여성들의 스트라이크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제는 중산층의 strike로 그 범위가 넓어진 셈이다

사회가 이런 식으로 자녀를 안 낳는 가정에게 상을 주고 (경제적 이득), 낳는 가정에게 벌을 준다면 (파산과 같은 경제적 불이익) 출산율은 계속해서 저하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맞벌이를 하기 전 아내의 역할은 가정 경제의 안정망이었다

남편이 실직하면 곧 아내가 돈벌이에 나설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우리나라에서도 이 말이 통용될지는 의문이지만) 그런대로 가정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는데, 요즘처럼 둘 다 버는 시대에 한 명이 실직하게 되면 두 사람의 소득에 맞춰 고정 비용을 지출하던 가정은 파산의 위협에 처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또 아내는 가족이 아프면 간호사의 역할을 하게 되지만, 둘 다 직장에 나가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아프면 돌보는 사람을 돈으로 살 수 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이것 역시 가정 경제에 치명타를 안기게 된다

그러므로 맞벌이 가정이 안전한 경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고정 비용의 지출을 줄이는 게 최선이라고 진단한다

고정 비용이란 일시적인 사치나 과소비가 아니라 소득이 줄어들어도 절대 줄일 수 없는 모기지 대출금 같은 것을 말한다

두 사람의 소득을 기준으로 경제 계획을 세우면 안 되고, 한 사람의 소득은 안전망으로 남겨 두는 게 최선이라고 한다

또 국가에서 제공하는 의료 보험이나 실험 보험 등 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장애 보험이나 간호 보험 등 가능하면 보장을 많이 받을 수 있는 보험에 미리미리 가입하라고 충고한다

(간호 보험은 새로운 개념이라 신기했다 연로한 부모가 아플 때 당신이 직장을 팽개치고 간호하러 갈 수 없다면 당장 간호 보험에 가입하라고 한다)

36개월 자동차 할부보다 60개월 장기 할부가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빨리 간파하라고 한다

고정 비용이 많을수록 가정 경제는 안전망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해결책은 중산층들이 이익 집단으로서 단결하는 것이라고 한다

은행들은 이자율의 규제를 없애기 위해 정치인들에게 끊임없이 정치 자금을 헌납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광고를 내보낸다

이제 중산층들도 단결해서 대학 등록금 인상을 막고, 파산 신고를 보다 쉽게 할 수 있게끔 법을 고치라고 정치인들을 압박하라고 한다

은행에게는 채무자에 불과하지만, 정치인에게는 한 표를 가진 유권자라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한 해결책이 전부 현실적이거나 바람직한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제기한 문제들은 분명히 중요하고 간과할 수 없는 본질적인 것들이다

특히 개인이 과소비를 하기 때문에 그들은 빚에 허덕이고 있다는 식의 표면적이고 쉬운 도덕주의적 해결책을 지양한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오히려 소비를 줄이면 내수가 침체된다는 건 기본적인 경제 상식이라고 한다)

하버드 대학에서 파산법을 강의하는 법대 교수인 저자와 그녀의 딸이 함께 쓴 이 책은 쉽지만 날카로운 문제 제기로 뉴스위크지에 의해 10대 경제서로 선정됐다

우리 나라 현실에도 아주 적합한 지적들이 많기 때문에 읽어 보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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