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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 - 100년 전 그들은 세계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이승원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기대했던 것보다는 임팩트가 너무 약하다.
제목이나 주제는 흥미로웠는데 막상 열어보니 별 내용이 없다.
이 주제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는데 원래 구한말에서 일제 시대로 이어지는 조선 근대화 과정의 외국 기행문이라는 게 단지 기행문에 불과한, 사적인 내용이라서 그런건가 밋밋하고 시시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저자의 전문성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소재 자체가 워낙 단순하다고 해야 하나?
차라리 외국인이 조선의 풍습에 대해 놀라워 하고 신기해 하는 기록들이 더 흥미롭다.
서구식으로 세계화 된 요즘 사람들은, 100여 년 전의 조상들의 모습을 서구인들을 통해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이미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고 난 후라면 조선인의 외국 기행문은 오늘날의 기행문이나 별반 다를 게 없어진다.
조선 보빙사 일행이 고종의 국서를 갖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에서 조선식으로 엎드려 절하는 모습 같은 데서 우리는 흥미를 느끼게 된다.
이미 서양의 악수 예법을 알고 있고 기계문명의 힘을 찬탄하는 수준이 되면 오늘날 사람들의 가치관과 생각체계랑 비슷하게 되버린 것이니 흥미로울 게 뭐가 있겠는가.
시대를 달리하는, 조선 유학자의 모습으로 바라 본 서양 문명의 충격, 그들이 서구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그 과정이 궁금한 것이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구한말에도 벌써 유길준이나 윤치호처럼 미국으로 유학했던 사람들이 있었을 정도로 일단 개항이 되고 나서는 서구 문화를 상당 부분 많이 받아들였고 비록 지식인층에 국한된 얘기일지라도 하여튼 지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서구 문명을 무조건 배척하고 두려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따라하고 싶은 모델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카메라에 사진이 찍히면 애들 눈을 빼먹는다는 루머 같은 건 지식의 혜택을 거의 못받았던 하층민 계층에서나 유행했었던 것 같고 적어도 조선의 지식인 계층은 서구 문명을 빠른 속도로 받아들였고 고리타분한 유학자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도 않았던 것 같다.
더군다나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나서는 이미 서구화를 완벽하게 이뤄낸 일본의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서 식민주의적인 세계관까지 갖추게 된다.
개항 이전에 일본의 통신사로 간 사람들이나, 필리핀 등지의 원주민을 보고서 야만인이라고 했던 기록들에서 조선인들 역시 자신들의 문화가 우월하다는 차별적인 시선을 가지고 남을 바라봤다는 예리한 지적을 한다.
심지어 히틀러나 비스마르크 등을 찬양했던 당시 지식인들과, 베를린 마라톤에서 우승 후 히틀러와 악수하고 독일의 전체주의적인 모습을 긍정적인 쪽으로 느낀 손기정에 대한 글까지 쓴 걸 보면 우리 사회도 이제 민족주의라는 자아비판을 할 수 있는 성숙한 경지에 오르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전혀 다른 사고방식과 놀라운 문명의 이기를 만난 구한말 조선인들의 충격은, 드라마 제중원에서 보여 주는 딱 그 시기까지인 것 같다.
좀 더 아래 계층 사람들을 조명하면 또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제일 인상깊었던 구절은, 만주를 회복해야 할 우리의 고토라 여기는 민족주의에 대한 일침이었다.
일본의 만주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덩달아 조선인들도 만주로 많이 건너갔다.
때마침 광개토대왕비가 발견되면서 옛 고구려땅 만주는 우리가 되찾아야 될 우리의 영토다, 라는 분위기가 조선 사회에 팽배한다.
아들 장수왕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의 발로라는 본질적인 측면은 무시한 채 만주 땅을 호령하던 우리 선조들! 언젠가는 다시 찾아야 할 우리의 땅! 이런 식의 정복주의적 욕구야 말로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야망과 일치한다는 저자의 지적이 날카롭다.
만주에 이미 살고 있는 선주민들의 존재는 싸그리 무시한 채 꾸역꾸역 넘어가서 땅을 차지하는 조선의 이민 물결이 실은 일본의 만주 진출을 배경으로 한다고 지적한다.
중국인은 불결하고 더럽다는 인식도 결국 서구인 혹은 일본인의 시각을 동일시 하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청에 대한 속박에서 벗어나면서 더이상 그들이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알고 대신 일본인의 지배를 받으면서 중국인에 대한 비하의식이 자리잡은 건 아닌가 모르겠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중국인에 대한 우월감이 존재한다.
2천 여년 동안 중국의 문화권에서 성장해 온 역사가 민망할 정도로 말이다.
이게 다 해방 이후 경제성장 덕분일 것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근대화에 실패한 청 제국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일단 잘 살고 봐야 한다는 것도 진리 같다.
식민지 현실에 신음하는 조선 지식인들이 비스마르크나 히틀러 같은 강력한 지도자에 목말랐던 점도 일견 이해는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