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위의 딸 Mr. Know 세계문학 32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중학교 때인가? 
소년소녀 주니어 세계명작전집에 있는 이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굉장히 이상한 소설이라고 생각했고 전혀 감동을 받지 못했으며 제목이 대체 뭘 의미하는지도 몰랐다.
딱 하나 기억나는 것은, 포로를 심문했는데 이미 그 전에 잡혀서 혀가 잘렸던 터에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던 장면이다.
그 때는 그 장면이 꽤나 공포스러워 혀를 자르다니, 하면서 소스라치게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하여튼 제대로 읽지 못해 늘 미진한 기분이었는데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예쁜 디자인과 가지고 다니기 쉬운 핸디형 사이즈로 출간되어 벼르고 있다가 읽게 됐다. 
이 책 역시 옆 도서관에서 상호대차 서비스를 이용해 이미 품절된 책이지만 빌릴 수 있었다. 
번역자가 얼마 전 재밌게 읽은 <러시아정교>의 저자 석영중씨라는 점이 더 믿음이 갔다.
처음에는 발음하기 힘든 인물들의 이름 때문에 입에 익숙치가 않아 속도가 안 났는데 금방 소설에 빠져 들어 초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영화로 만들어져도 성공할 것 같은, 굉장히 재밌는 이야기다.
늘 놀라는 바지만 우리나라로 치면 순조 시대 사람인데 대체 어쩜 이렇게 현대적인 구성과 문체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춘향전 같은 우리 옛 소설과는 굉장히 다른 느낌이다. 
김만중이 쓴 구운몽이나 사씨남정기 등을 보면 인물의 심리나 사건의 묘사 등이 뛰어나긴 하지만 어쨌든 고전 소설의 기본틀, 이를테면 권선징악적 구조나 상투적인 문체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유럽 소설들을 읽으면 우리 옛 소설들에 비해 굉장히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받는다.
심리 묘사라든가 사건의 전개, 플롯 같은 면에서 말이다. 

푸슈킨의 아름다운 아내 나탈리야 곤차로바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다.
과연 그녀를 위해 결투를 벌이다 죽을 만 하군, 고개를 끄덕일 만큼 굉장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뒷쪽에 실린 해설을 보니 나탈리아는 미모 외에는 별로 건질 게 없는, 낭비벽도 심하고 허영심이 많은, 거기다가 지참금마저 한 푼도 없는 빈털털이 아가씨였다고 한다.
나탈리아의 장모 역시 푸슈킨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지참금을 한 푼도 줄 수 없는 상황이라 달리 대안이 없어 시집을 보내고 사위와 갈등이 심각했다고 한다.
오늘날 러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문호로 추앙받고 있는 푸슈킨의 비사들이 흥미롭다.
하여튼 이 소설은 굉장히 재밌는 이야기체 소설이다.
마치 재밌는 헐리우드 영화의 시나리오를 보는 기분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졌을 것 같아 찾아 봐야겠다. 

뾰뜨르 안드레이치 그라뇨프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지에서 주정뱅이 프랑스 가정교사에게 프랑스어를 배우다가 먼 변방의 요새로 초급장교가 되어 떠난다.
그를 따라간 충실한 하인의 이름은 사벨리치.
어린 시절부터 그를 돌봐온 노인인데 이 사람은 뾰뜨르를 지키고 시중드는 것을 소명으로 생각한다.
황제가 지배하던 시절과 현대대중사회의 괴리감이 이런 데서 온다.
우리가 인권이나 자유, 시민의 권리, 애국심, 정의 등을 논할 때 그 당시 제정 러시아 사람들은 황제에 대한 충성, 주인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 신앙심 등을 이야기했다.
시대적 배경의 한계란 바로 이런 점을 말하는 것 같다.
뾰뜨르에 대한 사벨리치의 복종과 절대적 헌신은 지극히 자발적이고, 복종이 곧 그 노인의 양심이자 가치관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개인에게도 이런 종류의 복종을 바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무형의 가치, 이를테면 인권, 자유, 평등 이런 것들에 목숨을 바친다.
하여튼 이 노인네 캐릭터는 극의 긴장감을 완화시키면서 잔재미를 준다.
특히 주인을 아버님이라 부르는 장면은, 노예제도가 얼마나 강력하게 한 개인을 휘감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뾰뜨르는 벨로고르스끄 요새에 파견되어 그 곳 사령관인 미로노프 대위의 딸, 마리야 이바노브나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을 방해하는 인물은 그녀에게 대쉬했다가 차인 같은 장교, 쉬바브린.
뾰뜨르가 아버지에게 결혼을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으나 허락은 커녕 오히려 다른 부대로 떠나게 되었을 판에,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다.
뿌가쵸프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켜 요새로 쳐들어 온 것이다.
이 사람은 실존 인물인 것 같다.
까자끄인의 반란을 주도한 인물인데 러시아 역사를 잘 몰라 그냥 짐작만 하고 넘어갔다.
나중에 역사책에서 보면 무척 반가울 것 같다.
레핀의 그림으로 다소 야만적이고 호전적으로 표현된 이 까자끄인들을 만났던 기억이 난다.
하여튼 뾰뜨르는 요새로 발령받아 오던 중,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었는데 어떤 안내자의 도움으로 헤쳐 나간 후 고마움의 표시로 털외투를 선물한 적이 있고 바로 그 인물이 후에 반란을 일으킨 뿌가쵸프였다.
뿌가쵸프는 요새를 점령한 직후 장교인 뾰뜨르를 교수형에 처하려고 했으나 눈밝은 하인 사벨리치가 뿌가쵸프를 알아채고 옛 인연을 기억해내 극적으로 살아난다.
흥미진진한 플롯이 아닐 수 없다.
러시아의 귀족이자 군인이며 또 기독교도인 뾰뜨르는 아무리 목숨을 구해 줬어도 반란자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명예를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변절자 쉬바브린과는 다르게 뾰뜨르는 여제 폐하에 대한 충성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는 남자로 나온다.
마치 사벨리치가 그 주인인 뾰뜨르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처럼 말이다.
통 큰 뿌가쵸프는 죽이려면 단칼에, 살리려면 확실하게, 라는 평소 신조대로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뾰뜨르를 구해 주고 심지어 쉬바브린에게 납치된 마리야 이바노브나까지 그의 품으로 돌려 준다.
이런 부분들은 어쩐지 아기자기한하며 민속적인 느낌을 주고 그래서 소설이 무겁지 않고 흉악한 반란군 우두머리 뿌가쵸프에게도 동정심이 느껴진다.
또 한 가지 특이할 점은, 예카테리나 여제에 대한 러시아 귀족들이 절대적 복종이다.
비록 서구 역시 최근까지도 여성차별이 있어 왔고 여성은 집에만 있는 종속적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여자 군주들이 (그것도 매우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걸 보면, 유교 사회의 남녀차별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해서 러시아 귀족들이 러시아인 황제를 암살하고 그의 배우자인 독일인 황후를 여제로 옹립하게 됐는지 그 과정이 무척 궁금하다.
조선 사회에라면 정말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인데 말이다.
당나라의 측천무후만큼이나 대단한 철의 여인이 아니었을까? 

뾰뜨르는 군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마리야를 자신의 영지로 피난시키고 다시 여제의 군대로 돌아가 싸운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반란이 진압된 후 뿌가쵸프와 한통속이었다는 쉬바브린의 증언에 따라 그는 스파이로 오인되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다.
뿌가쵸프에 의해 요새 사령관인 미노로프 대위 부부가 살해당하고 그들의 딸인 마리야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뿌가쵸프와 협상을 벌였던 사정은, 여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밝히지 못한다.
마리야는 직접 여제에게 탄원하기 위해 황궁으로 올라가고 우연히 만난 귀부인이 그녀의 진정서를 보게 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귀부인이 바로 여제였다.
물론 여제는 단번에 사건을 해결해 준다.
이 결말은 우연성에 기댄 고전적 요소가 아닌가 싶다.
마지막에 너무 싱겁게 일이 해결되어 (절대자의 등장) 좀 시시했지만 하여튼 그 과정까지 어찌나 흥미롭게 읽었던지 지하철에서 조금씩 읽는데 마치 일일연속극의 다음 편을 기다리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러시아인들은 아마도 중간 이름이 있는 것 같은데 이 책에서는 중간 이름까지 꼬박꼬박 언급해서 읽기가 어려웠다.  
이를테면 이반 꾸즈미치 미노로프 대위는 그냥 이반이 아니라 이반 꾸즈미치, 이렇게 불리고 주인공 역시 뾰뜨르 안드레이치 그리뇨프도 뾰뜨르 대신, 꼬박꼬박 뾰뜨르 안드레이치, 라고 불린다.
귀족만 그런건가 싶기도 한데 러시아 풍속이나 역사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 

너무 흥미롭게 읽은 책이고 <미스터 노> 시리즈가 무척 마음에 든다.
다른 소설도 이 시리즈로 읽어 볼 생각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넷 2009-11-06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에 미스터 노 시리즈 책들 중 일부를 반값(?)에 팔던데, 품절이 왜 이렇게 많이 뜨는지 모르겠어요.ㅡ.ㅡ;;;

marine 2009-11-06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품절이 많아서 저는 도서관에서 빌려 봐요. 상호대차 서비스, 정말 좋더라구요. 경기도내 도서관끼리 택배료도 안 받고 진짜 좋은 써비스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