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 최순우의 한국미 산책, 개정판
최순우 지음 / 학고재 / 2008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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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오래된 책으로 알고 있는데 중앙박물관에 갔다가 뮤지엄샵에서 새로 나온 개정판을 발견하고 도서관에 신간 신청을 했었다.
옛날 책에는 사진이 모두 흑백인데 개정판은 올컬러라 보는 완전히 다른 책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신청을 해 놓고도 어찌나 인기가 많은지 1년이 다 되도록 빌리지를 못해 이 책에 대한 기대가 날로 커져 가던 차에 드디어 대출을 하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첫 장을 넘겼다.
책의 도판은 정말 화려하고 편집이 굉장히 잘 된 책이며 5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무척 가벼운 편이다.
개정판은 대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오래된 책도 다시 편집을 해서 새로 출간하면 이렇게 달라 보일 수 있다는 걸 새삼 느낀 책이다. 
그러나 전반적인 느낌은 너무 기대를 많이 해서인지 아주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워낙 유명한 분이시니 문화재에 대한 식견이 쥐뿔도 없는 내가 감히 이러네 저러네 평을 할 처지는 못 되지만서도, 독자의 입장에서 느낀 점을 말하자면 우리 것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 일견 국수주의적인 느낌이 난다.
문장이 너무 화려해 끝없는 찬사를 늘어 놓다 보면, 나중에는 문화재 자체의 아름다움 보다는, 말을 위한 말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너무 현학적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어설픈 미학 에세이나 여행기 보다는 월등한 수필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모든 민족 문화는 그 민족의 성장 환경과 맞물려 오랜 전통을 갖고 가꿔져 왔기 때문에 우월의 차이를 논한다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문화든 그것을 직접 겪어 온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고 그저 겉만 보는 외국인의 눈에는 그 깊은 속내까지 알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문화재는 한국인이 가장 잘 느끼고 감탄할 수 있기 때문에 외국인의 평가에 연연할 필요도 없고 특별히 남의 문화와 비교할 것은 더더욱 없으며 그저 행복한 마음으로 즐기면 되지 않을까?
각 문화의 특징을 비교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꼭 한 걸음 더 나아가 중국 문화의 숨막히는 권위주의라느니, 일본 문화는 한국의 아류라느니 이런 식의 기술은 정말 오버 같다.
내가 이원복씨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겸손하면서도 부드러운 문장의 힘을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타 문화에 대해서도 똑같은 애정을 갖고 절대 우월을 논하지 않기 때문이다.
뭐랄까 그 정신과 스타일이 내 마음에 꼭 든다고 할까?
그래서인지 전반부에 한국 문화에 대한 일반적인 에세이는 사실 썩 마음에 들지 않았고 오히려 뒷쪽에 각 문화재에 대한 설명들이 훨씬 와 닿았다.
이 분의 장점은 어려운 설명 보다는 그 문화재가 갖는 매력을 쉬운 언어로 일상화 시켜 묘사하듯 풀어 쓰기 때문에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는 점이다.
어떤 글에서는 6.25 사변 이야기도 나오고, 심지어 지게에 땔감 이고 가는 소년들의 애잔함도 등장해 시대가 정말 옛날이구나 실감을 한다.
아마 전쟁의 상흔과 식민지 치하의 아픔을 떨쳐 내기 위해 민족의 자부심을 한껏 높혔어야 하던 시대정신이 글에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국력이 신장하고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이 확실하다면 배포크게 남의 문화에 대해서도 그 위대함을 침이 마르게 칭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도 등장하지만, 한국 자기의 우수함에 감탄하고 솔직하게 평할 수 있는 일본인의 모습이 오히려 성숙해 보인다. 

건축물은 직접 가 보지 않으면 그 맛을 제대로 알기 힘든 것 같다.
책에 소개된 건축물 중 직접 가서 그 아름다움에 경탄했던 불국사나 창덕궁의 부용정을 제외하고는 솔직히 통도사나 무량수전 같은 곳은 사진만 봐 가지고는 저자가 기술하는 매력이 뭔지 잘 모르겠다.
불국사는 너무 유명해 오히려 찬사가 전형적이고 뻔하다고 생각했는데 몇 년 전 친구들과 답사 여행을 다녀온 후 신라인의 불국토라는 말을 실감했었다.
창덕궁 역시 그냥 옛 궁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시간을 내서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찬찬히 관람하니, 조선 궁궐 건축의 미학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목공예도 마찬가지다.
솔직히 다른 건 몰라도 이 목공예품은 너무 투박하고 소박하다고만 생각했었다. 
말하자면 그냥 옛날 고리타분한 가구라고만 여겼었다. 
그런데 중앙박물관에 재현해 놓은 선비들의 사랑방을 보니 그렇게 정갈하고 아름다울 수 없는 것이다.
또 수집해 놓은 목공예품, 이를테면 사방탁자나 문갑, 서안, 장농 이런 옛 가구들이 나무결 특유의 깊은 맛을 내면서 요즘의 화려한 가구들과는 전혀 다른 청아함과 세련미를 선사했다.
대체 왜 우리 목공예가 사라졌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고 좀 더 사람들이 전통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다면 얼마든지 현대식 가구들과 경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당장 나전칠기만 해도 얼마나 화려한가.
자개로 장식된 장농이나 옻칠한 탁자들은 문외한인 내가 봐도 예쁘다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러고 보면 조선 시대의 문화가 선비들에 의해 이끌어졌기 때문에 화려하고 자극적인 아름다움 보다는 사랑방 풍경에서 보여지는 점잖고 정갈한, 담백한 담채 같은 문화가 주를 이뤘던 것 같다.
귀족문화라고 일컫어지는 고려 시대나 불교문화가 성행하던 통일 신라 시대, 자유로운 연애가 성행했다는 그 이전의 고대 문화는 지금의 한국 문화와는 또다른 모습이지 않았을까? 

이 선비 문화의 또다른 정점이 바로 문인화가 아닐까 싶다.
회화는 다른 문화재 보다 더 쉽게 즐길 수 있어서 좋다.
따지고 보면 조선 시대 선비들은 글씨도 잘 쓰고 학문의 경지도 높고 시도 잘 지으며 심지어 그림마저 잘 그렸다.
전문 화가가 아닌데도 취미삼아 먹으로 이만큼 훌륭한 그림을 그려내는 걸 보면 당시 선비들의 교양이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이간다.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탓에 조선 시대는 그저 당파 싸움이나 일삼고 명분론에 집착한 위선적인 계층으로 비판받고 있으나 격조높은 선비 문화는 적어도 문화 면에서는 높이 평가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아무리 선비들이 그림을 잘 그려도 역시 전문 화가와는 그 내용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취미로 그리는 사람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의 차이라고 할까?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을 보면 아, 정말 이 사람들은 직업적인 화가구나 실감이 난다.
김홍도 그림의 위대함이야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새삼 말할 것도 없지만 신윤복 그림의 미학은 이번에 새롭게 발견했다.
아름다운 여인들을 주로 그렸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막상 그림을 직접 대하니 색을 어쩜 그렇게 적재적소에 잘 썼는지 감탄했다.
수묵화다 보니 색감 면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 한계가 제한되기 마련인데 신윤복의 그림은 색이 포인트가 된다.
이를테면 여인의 풍성한 치마에만 파란색을 칠해서 전체적으로 화사한 색감을 살리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는 내용도 보면 볼수록 파격적이다.
문인화가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못 그릴 내용들이다.
이렇게 세련되고 개성있는 그림을 많이 남긴 화가에 대한 기록이 그저 아버지 이름 하나 뿐이라니, 저자의 한탄대로 당시 예술가에 대한 처우가 얼마나 각박했는지 짐작이 간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에는 표정이 살아 있다.
작정하고 그린 신선도 같은 경우는 캐리커쳐처름 특징을 잡아낸 풍속화와는 다른, 정밀하고 엄숙한 필선이 느껴진다.
연한 푸른색으로 물들인 냇가 풍경은 또 얼마나 상큼하고 발랄한지!
각 장르마다 다른 스타일의 그림을 자유자재로 그린 김홍도의 필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정조 임금이 군수 자리를 내줄 만 했겠다 싶다. 

겸재 정선은 선비화가로서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그 분의 산수화를 보면 힘이 넘치고 이게 바로 중국의 관념산수화와는 전혀 다른 진경산수화구나 싶다.
다른 문인화처럼 취미삼아 그렸다기 보다는, 전문성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그렸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는 매화도를 잘 그린 조자룡이다.
이 분은 여항문인이었고 김정희 문하에서 배웠는데 문기가 부족하다고 하여 선생으로부터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매화꽃 핀 봄날의 화려한 정취는 내 마음을 흔들고, 특히 중앙박물관에 가서 본 매화병풍도는 그 웅장한 기세와 화사한 색감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다.
또 비슷한 시대를 산 전기의 매화 그림도 마음에 든다.
이 책에는 안 나오지만 전문 화가들에 필적하는 이가 표암 강세황이 아닐까 싶다.
선비들이 교양삼아 붓을 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본격적인 화가의 force 가 느껴진다.
화론도 많이 쓰셨다고 하는데 이 분의 그림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다. 

500 페이지가 넘는 꽤 두꺼운 책이지만 사진도 훌륭하고 글솜씨도 유려하여 술술 잘 넘어간다.
워낙 쉽게 쓰셔서 지하철에서 야금야금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서양화에 빠져서 여러 권을 탐독하다 보니 맨날 소개되는 그림이 그게 그거인 것 같아 한동안 지루한 느낌을 받았는데 요즘은 우리 옛 그림과 도자기의 매력을 발견하고 정말 즐겁게 책을 읽고 있다. 
어쩌면 이런 즐거움은 직접 박물관에 가서 진품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고야나 루벤스 같은 (아,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뛴다!)  대화가들의 위대한 명작들을 아무 때나 가서 볼 수 있는 파리나 런던, 뉴욕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웠는데 이제 나도 누구 부럽지 않을 즐거움이 생겼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더 열심히 가서 더 많이 느끼고 싶고 이런 문화야 말로 절대 질리지 않을 최고의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인간은 선천적인 컬렉터란 말이 생각난다.
이렇게 눈이 호사하다 보면 다음 단계로 수집의 욕구가 생길 것 같기도 하다.
아, 정말 돈 많이 벌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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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0-07-18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처음에 일본과 중국의 비교하는 기술은 좀 그랬습니다;;; 집에 이전판이 있는데, 새로 개정판으로 살까 고민중이였는데요...

어느새 30%할인이 되네요;;;

marine 2010-07-18 23:27   좋아요 0 | URL
개정판은 도판이 참 좋아요.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지 않을까요?

김ㅇㅇ 2011-11-22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ㅎㅎ

눈보리 2011-11-22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g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