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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거장전 - 렘브란트를 만나다
(주)기홍앤컴퍼니 엮음 / 컬처북스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서울에 시험 보러 온 W와 만나서 전시회장에 갔다.
피곤할 것 같아서 예술의 전당까지 가자고 할 줄은 몰랐는데 먼저 보고 싶다고 제안을 하길래 깜짝 놀랬다.
마지막으로 함께 전시회장에 간 게 올 1월 초 <러시아 미술 거장전> 이었을 것이다.
작년 여름 한가람 미술관을 찾았을 때 <오르세전>을 봤었는데 정말 줄만 세 시간은 섰던 것 같다.
안에 들어가서도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그 더운 여름에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나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번에는 푸슈킨 미술관에서 공수해 온 작품들인데 오르세 미술관에 비해 유명세가 떨어져서인지는 몰라도 그 때처럼 붐비지 않았고 내가 입장할 때만 해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에서는 사람이 많아 쾌적하게 관람하기는 어려웠다.
또 작품 앞에 장애물을 설치해 놔 가까이서 보기 어려웠다는 점이 불만스럽다.
유럽 미술관에 갔을 때는 유리 액자 하나 없이 바로 코 앞에서 생생하게 붓의 터치와 색감을 즐길 수 있었는데 국내에 전시되는 걸작품들은 꼭 앞에 장애물을 설치해 상당히 먼 거리에서 작품을 봐야 한다.
차라리 도록에서 클로즈업 해서 보는 게 훨씬 더 감동적이다.
혹시라도 훼손될까 봐 미술관측에서 전시 조건에 요구하는 걸까? 아니면 우리나라에서 자체적으로 설치하는 걸까?
SBS 아나운서의 오디어 가이드는 영 별로였다.
뭘 알고 읽는지 써준대로 읽는지 도무지 감흥이 없고 그냥 대본 읽듯이 전혀 맛이 안 났다.
적어도 미술에 대한 이해가 없는 건 분명한 듯 하다.
차라리 목소리가 좀 안 좋더라도 관련 분야의 사람을 나래이터로 썼으면 훨씬 생생하게 다가왔을 것 같다.
도슨트 설명을 꼭 듣고 싶었는데 혼잡해서인지 일요일은 쉬는지라 못 들은 게 아쉽다.
도록까지 살 생각은 없었는데 전시회장을 나오면서 워낙 감동적이라 재음미 하고 싶은 욕심에 대도록을 구매했다.
전시회장에 가기 전에 예습하는 기분으로 도록을 미리 주문한 적은 있어도 전시 후에 산 건 처음인 듯 하다.
22000원으로 다소 비싼 느낌도 들지만, 시원한 판형에 클로즈업 해서 색감과 붓터치, 인물의 선 등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질 좋은 도판이라 잘 샀다는 생각이 든다.
전시를 먼저 본 다음에 도록으로 다시 읽으면서 감상하니까 생생하게 감동이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역시 데이비드 핀의 충고처럼 어설픈 솜씨로 사진을 찍을 게 아니라 (촬영도 금지되긴 했지만) 차라리 도록을 사서 감동을 간직하는 게 훨씬 좋은 방법 같다.
인상깊은 그림들이 많았는데 우선 소 피터 브뤼헬의 사계 연작이 너무 좋았다.
굉장히 개성적이고 색감도 화려하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해 한참동안 눈길을 끌었다.
유명세란 괜히 생기는 게 아닌가 보다.
이 사람은 요즘 시대에 태어났어도 캐릭터 화가나 무대 미술 같은 분야에서 크게 성공했을 것 같다.
그만큼 현대적이고 세련된 감각이 느껴진다.
이 사람 그림은 엽서로도 샀다.
루이 16세의 전속 화가였던 여류 화가 르브룅의 초상화도 정말 멋있었다.
러시아의 젊은 공작을 그린 그림인데 얼마나 깊이있고 세련되고 우아한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여성 화가에 대한 편견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렘브란트도 그렇지만 훌륭한 초상화가들의 인물화는 사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품과 내면의 개성이 생생히 느껴진다.
저런 초상화라면 나 역시 사진 대신 그림을 택하겠다.
영국의 두 귀족 부인을 그린 반다이크의 초상화도 정말 멋있었다.
두 여인을 그린 초상화라 사이즈도 크고 주변 배경까지 정말 아름답고 환상적이었다.
적어도 초상화에서는 반다이크는 가히 최고의 경지에 이른 것 같다.
렘브란트에 대해서도 그 명성은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에칭 판화를 보면서 정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판화 하면 정교함을 따라오기 힘든 화가가 뒤러라고 생각했는데, 뒤러와는 또다른 내면의 깊이와, 빛과 그림자의 대조를 명확히 보여주는 렘브란트의 또다른 매력을 발견했다.
가벼운 스케치 같은 것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하나의 완성작이라 할 만한, 유화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작품들이 많았다.
그가 그린 자화상이나 초상화는 또 얼마나 깊이가 있던지!
루벤스에 비해 너무 관조적이고 사색적이라 생각했는데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렘브란트의 천재성과 매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의 풍경화는 덜 알려진 화가들이라 그런지 왠지 비슷비슷 하고 키치적인 냄새가 나서 전시회장에서 볼 때는 별로였다.
그러나 도록으로 다시 하나하나 뜯어 보니 역시 굉장한 수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기를 표현한 그 섬세한 색감, 정말 하늘을 감싸는 공기의 부피가 느껴지는 기분이 들 정도다.
나뭇잎이나 바위, 나무 등치 등도 뜯어 보면 볼수록 감탄이 절로 나온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회화가 얼마나 발전했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정물화는 사실 가장 흥미없는 장르이기도 한데 이번에 새롭게 관심이 생겼다.
특히 유리병의 투명함을 어찌나 생생하게 표현했는지 인간이 가진 놀라운 묘사 능력에 감탄할 뿐이다.
장미꽃잎을 한 겹 한 겹 그 질감이 그대로 전해지듯 섬세하게 그려냈다.
어쩌면 정물화야 말로 화가의 섬세한 묘사력을 가장 잘 표현하는 장르인지도 모르겠다.
로마 유적의 폐허를 그린 그림도 사이즈가 크고 묘한 분위기를 풍겨서 인상적이었다.
나는 특히 카날레토의 베네치아 풍경화를 좋아하는데 비슷한 그림들이 몇 점 있어서 행복하게 감상했다.
정말 수평선 위의 파아란 대기 표현은 아무리 감탄을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섬세하고 아름답다.
훌륭한 그림들이 너무 많아 익히 알고 있던 역사화나 신화화가 오히려 전형적이고 지루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전시회의 표지 그림으로 이용된 부셰의 <헤라클레스와 옴팔레>는 정말 선정적이다.
헤라클레스가 옴팔레의 젖가슴을 움켜 쥔 모습이 너무 사실적이라 순간 당혹스럽기도 했다.
신화를 주제로 하지 않았다면 선정성 논란에 휩싸일 만한 그림이다.
모든 그림 하나하나가 전부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었다.
사람이 너무 많고 멀찌감치 떨어져 봐야 하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덜 알려진 명화들을 소개해 준 것에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번 러시아 거장전에서도 느낀 바지만 러시아 미술과 미술관의 컬렉션이 갖는 의의를 새롭게 확인했다.
교류가 왕성해지면 더욱 많은 명작들이 소개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