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능으로 가는 길
강석경 지음, 강운구 사진 / 창비 / 2000년 12월
평점 :
오랜만에 참 좋은 책을 만났다.
역시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아마추어들과는 다름을 확실히 보여준다.
강석경의 소설을 언제 읽었던가?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숲 속의 방> 이라는 중편 소설을 읽은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나 워낙 인상깊게 읽었던 터라 작가의 이름은 확실히 각인이 되었다.
양띠 아내를 기념하기 위해 딸들의 이름을 혜양, 소양, 미양으로 지었다는 책 속의 에피소드가 지금도 정겹게 기억하고 있다.
강석경의 글이 아니었다면 손에 안 댔을 책이다.
그렇고 그런 감상 나부랭이나 지껄이는 기행문 내지는 답사기, 정말 지겹다.
특히 손미나의 스페인 여행기처럼 블로그에나 올릴 글을 단지 아나운서라는 유명세 때문에 버젓이 내놓고 베스트셀러까지 되는, 개나 소나 다 내는 그런 여행기는 안 읽고 싶었다.
공지영 소설도 재밌게 읽었는데 뜻밖에도 그의 <수도원 기행>은 별 감흥이 없어 감명을 주는 기행문 쓰기가 꽤 어려운 일임을 느끼는 바다.
강석경의 이 책은, 깊이가 있고 문장의 수려함과 애틋한 감성이 잘 녹아 있다.
사실 나는 제목이 <능으로 가는 길>이길래 조선왕릉 답사기인 줄 알았다.
유명한 작가라면 당연히 서울에 살 것 같고 그래서 당연히 서울 인근의 조선왕릉이라고 생각했다.
뜻밖에도 그녀는 경주에 뿌리를 내렸는데 그 곳의 고분들을 둘로 보고 쓴 글이다.
사진도 참 아름답다.
어쩌면 이렇게 햇빛 찬란한 능 주변을 잘도 잡아 냈는지.
글 뿐 아니라 사진 때문에라도 소장하고 싶은 책 중 하나다.
강석경의 단아한 기행문과 잘 어울리는 사진이다.
한 사진작가가 박물관 관람에 대해 쓴 책이 있는데 거기서 이런 말이 나온다.
박물관 가면 사진 찍으려고 애쓰지 말아라, 차라리 그 시간에 더 많이 감상해라.
어설프게 찍어 봤자 나중에 보면 별 감동도 없다, 오히려 박물관을 나오기 전에 도록을 구입하거나 엽서를 사는 게 훨씬 더 기억을 붙잡는데 도움이 된다...
정말 그 말에 100% 동의한다.
어두운 구석에서 몰래 사진 찍어 봤자 나중에 보면 어설퍼서 그 때 감동을 집어 내기는 불가능하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어쩔 수 없는 차이인가...
만약 내가 얼마 전 경주에 다녀오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공감하면서 읽지는 않았을 것 같다.
문화재 답사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가이드와 함께 경주를 돌아다녔는데 대충 봤던 것도 설명을 듣고 보니 모든 게 새로웠고 특히 말로만 듣던 불국사는 실제로 가서 보니 흔히 보던 절과는 매우 다른, 세련되고 화려하며 또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저자의 글에도 불국사의 아름다움이 소상히 기록됐다.
유리벽으로 가려 놓은 석굴암은 사실 잘 보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넓은 터에 자리잡은 불국사가 정말 신라인들이 꿈꾸던 서방정토처럼 느껴졌고 관광하러 온 외국인들에게도 괜히 자랑하고 싶어질 정도로 마음에 꼭 들었다.
능도 그렇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덤과는 다르게 규모부터 엄청나게 크고 양식도 달라 한참을 흥미롭게 들여다 봤다.
십이지신상이나 서역인의 모습을 한 무인석, 사자상 등이 무척 흥미로웠다.
첨성대도 직접 가서 눈으로 보니 사진으로 볼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인지 경주는 높은 빌딩이 없고 전체적으로 평화롭고 편안한 분위기라 신라 시대의 문화재를 즐기기에는 최적의 도시 같다.
저자의 아름다운 문장으로 경주를 다시 만나니 더욱 반가웠다.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느낀 것은 역시 우리의 전통 문화야 말로 우리의 힘이고 아름다움의 근원이라는 사실이다.
만약 서구 문화의 유적지에 관한 책이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감동받으면서 읽을 수 있었을까?
아무리 세계화 시대가 됐다고 하지만 한국의 아름다움은 한국인이 가장 정확히 느끼다는 생각이 든다.
보편화 되지 못한 문화일수록 더욱 그렇다.
르네상스 시대의 숨막히는 그림들을 보면서 가슴이 울컥해질 때도 많지만, 경주의 능을 보면서 느끼는 애틋한 감정과는 다른 것 같다.
내가 자란 문화권, 나에게 형성된 미의식은 한국이라는 문화권에서 형성된 것임을 절절히 느낀다.
그래서 여전히 세계화 시대에도 우리의 문화는 보존되고 또 재해석 되야 마땅하다.
나이가 먹는 걸까?
정말 요즘에는 우리 문화에 무한한 관심이 생기고 또 그것들이 그렇게 아름답고 애절할 수가 없다.
아마 외국인들은 박물관이나 능에 가서 이런 애틋한 감정을 느끼기 힘들 것이다.
마치 내가 유럽에 가서 그들의 건축물을 보면서 와, 멋지다 하고 끝인 것처러 말이다.
국수주의자가 되는 건 아닌데, 또 민족주의는 정말 싫은데 적어도 미의식에 있어서는 전통의 아름다움을 꼭 지키고 싶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솔제니친의 가슴 사무친 말이 이 책에도 등장한다.
모든 신념과 이데올로기가 배제된 채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상의 것, 아름다움이, 예술이 구원이 될 수 있음을 저자는 능을 보면서 토로한다.
인용된 문장들도 어쩜 그렇게 빼어난지, 몇 번을 옮겨 적었다.
언제쯤 나도 이런 그럴듯한 기행문을, 감상문을 써 볼 수 있을까?
문장의 훈련이 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일 듯 하다.
정말 오랜만에 가슴 깊이 알싸해진 감동을 받으면서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