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와 공식이 없는 수학카페 - '수학사랑' 박영훈 선생의 수학사 특강
박영훈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250페이지가 채 안 되는 비교적 얇은 두께의 책이다.
안에 실린 삽화도 신선하고 책 내용도 어렵지 않다.
수학이 주는 의미에 대해 비교적 쉽게 잘 풀어 쓴 것 같다.
무엇보다 그리스에서 비례를 중시하는 수학과 예술이 번성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그러나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저자의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단편적인 시각이 아쉽다.
수학의 원조는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이기 때문에 사실 서양은 동양의 학문적 성과 때문에 발전한 것이므로 동양이 더 우월하다는 식의 초보적인 논리를 편다.
또 기독교가 과학을 억압해서, 종교개혁 전까지는 과학이 발달할 수 없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편견일 뿐, 얼마 전에 읽은 <사회 법 체계로 본 근대 과학사 강의> 에서는 신학이 이성의 힘을 강조함으로써 과학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심지어 그 책에서는 중국이 사회를 지배하는 종교가 없었기 때문에 근대 과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고까지 말한다.
책을 쓸 때는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안전하다.
재밌게 책을 읽다가도 가끔 초보적인 저자의 감정적 주장을 접할 때면 솔직히 약간 짜증스러웠다.
뭐랄까, 주변 사람들에게 하는 말로는 괜찮지만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독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좀 더 공부를 하고 말하라고 하고 싶다.

또 로마 문화를 그리스 문화에 비해 단지 실용성만 강조한 것이므로 문화로써의 가치가 전혀 없다고 주장한 것도 매우 극단적으로 들렸다.
콜로세움은 그저 검투사들이 사자와 기독교인들을 죽이는 장소에 불과하므로 비례의 미를 자랑하는 파르테논 신전에 비해 형편없다는 식의 감정적 논리는 상당히 위험해 보인다.
그리스 문화의 위대함과 로마 문명의 위대함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신의 세계가 퇴보하고 오직 전쟁을 통한 영토 확보에만 주력해 이룩한 문화적 유산이 없다는 식의 발언은 매우 단편적이고 편견에 차 있다.
역시 앞에서 언급한 <근대 과학사 강의>를 펴 보면, 로마법이 법 정신의 얼마나 큰 진보인지 자세하게 나와 있고, 오늘날 서구의 보편평등한 법 정신이 로바법에서 나왔음을 분명히 밝힌다.

그런 점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수학적 얘기는 괜찮았다.
사실 수학은 지겹고 어려운 학문이라고만 알고 있어서, 대학교 때 교양으로 미적분학을 들은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수학책은 펼쳐 본 적이 없다.
대체 어디다 써먹는 건지 알 수가 없어 한 때는 이 어려운 학문을 꼭 모든 고등학생들이 배워야 할까 회의적일 때도 있었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수학은 과학을 설명하는 기본 언어라는 걸 알게 됐고 수학이야 말로 과학과 더불어 모든 인류에게 보편타당한 위대한 학문임을 인정했지만, 그 가치를 아는 것과 즐기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이 책을 읽어도 솔직히 수학의 기본 개념에 대해서는 아직도 감이 안 잡힌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기호화 공식은 최소화시키고 그리스 수학이 발전한 역사에 대해 주로 서술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인문학 서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수학이 사물을 추상화 시킨 이성의 학문이라는 건 분명히 알겠다.
그리스들이 추구하는 것은 조화와 비례로 대표되는 균형미였다.
그것은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수 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리스의 건축과 조각품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 같다.

이 책에서 제일 독특했던 관점은 그리스인들의 신에 대한 관념이었다.
저자는 그리스어로 신이 주어가 아니고 술어임을 강조한다.
신이 어찌어찌 했다가 아니라, 어떠어떠한 상황이 바로 신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신은 인간의 모든 추상적 감정과 속성들을 의인화 시킨다.
전쟁은 아레스가 되고 사랑은 아프로디테로 표기된다.
그러므로 그리스인들은 기독교의 신처럼 믿는다는 개념이 없었고 신들을 일상의 생활로 이해했다.
그래서 기독교처럼 유일신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적 속성을 가진 여러 신들을 믿었다기 보다는, 인간사의 많은 추상적 개념을 신으로 의인화시켰다는 게 정확할 것 같다.
그러므로 신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운명, 되어지는 힘, 거부할 수 없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리스인들은 대체 왜 아무런 잘못도 없는 영웅이 신의 장난에 의해 비참하게 죽는 비극을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 갔는데 이제서야 좀 알 것 같다.
비극이야 말로 어쩌면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세상의 우연을 표현한 가장 좋은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인들이 세상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고 문제 제기를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학문이 세상 모든 것을 죄다 관찰하고 연구하는 게 아니라, 학자가 의문을 갖고 문제를 제기할 때 비로소 선택적으로 관찰하게 됨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일단 세상의 근원에 대해 궁금해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를 해결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문제 제기를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 그리스에서 세상은 원자로 이뤄졌다는 대담한 발상까지 나왔는지, 또 수 천년 전의 그리스 문화가 아직도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지 비로소 알 것 같다.
이집트나 바빌로니아의 수학은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기술에 불과했다.
그것은 세심한 관찰에 의한 직관적 이해였다.
반면 그리스의 수학은 근본적인 것, 원리적인 것을 찾는 연역적 추론이다.
변치 않는 어떤 것, 즉 공리를 이용해 명제를 증명하는 것, 수학이 비로소 현상의 집합을 뛰어넘어 사물의 속성으로 추상화 되는 순간이었다.

재밌게 읽은 책이고 수학에 대한 관심이 많이 증가했지만 여전히 수학은 나에게는 어려운 학문 같다.
나는 오히려 과학 쪽이 훨씬 재밌고 그 중에서도 생물학, 더 세분해서는 의학이 가장 재밌다.
그런 걸 보면 직업을 잘 선택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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