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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의 역사 - 한 권으로 읽는 서양 의학의 역사 ㅣ 메디컬 사이언스 5
재컬린 더핀 지음, 신좌섭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6월
평점 :
맥닐의 <전염병의 역사>가 사회문화사적으로 질병의 역사를 돌아봤다면 이 책은 의학에 국한시켜 의사 입장에서 의료의 발전 과정을 회고하고 있다.
저자는 의사 출신으로 의학사를 가르치는 다소 독특한 사람이다.
우리나라에도 의학사가 교양과목으로 개설된 대학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크게 중요성을 안 갖는 걸로 알고 있다.
저자의 중간자적인 입장 때문인지 의학사의 발전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다.
예병일씨 책이 거의 찬사 위주로 된 점과 비교된다.
저자의 이런 회의의식에 어느 정도는 동의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의학책을 보면 치료법이 거의 대부분 self-limited 혹은 bed rest, fluid therapy, conservative treatment 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감기처럼 바이러스 질환이 특별한 약이 없음은 물론이고, 중요한 질병들도 그 질병에 대한 지식과는 별개로 획기적인 치료법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항생제가 개발되지 않았다면 아직도 민간요법이나 기철학, 종교 등과 같은 전통의학과 대등한 입장에서 싸우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항생제의 개발은 감염을 어느 정도 컨트롤 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얼마나 획기적인 개발인지!
저자는 우리가 천연두나 소아마비, 결핵 등을 박멸할 수 있게 된 것이 보건 위생의 향상과 더 큰 관련이 있음을 지적한다.
집단적으로 발병하는 것이니 당연히 영양 상태가 개선되고 환경이 정화되면서 면역력도 커지고 환자 수도 줄어들었을 것이다.
인문학자가 아니고 의사이다 보니 당연히 의학의 역할을 깡그리 부정하지는 않지만 확실히 치료보다, 적어도 치료만큼 예방이나 보건학이 중요함은 분명하다.
외과학의 눈부신 발달도 특기할 만 하다.
마취가스가 개발된 게 겨우 19세기 후반이라고 하니, 대체 그 전에는 어떻게 수술을 했을까?
고통을 참으면서 유방절제술을 당하는 여성의 그림이 18세기 백과사전에 실려 있다.
유방은 밖으로 튀어나온 조직이라 체강을 건들 필요가 없으므로 비교적 오래 전부터 실시되었다고 한다.
수액의 발전이야 말로 의학의 가장 큰 성과가 아닌가 싶다.
여전히 수혈 부작용이 논란의 대상이 되지만, 출혈로부터 생명을 구하는 가장 첫 걸음이 바로 수혈이 아닌가!
인간의 피를 관을 통해 공급해 주면 된다는 발상이 현실로 실현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실패와 희생자들이 나왔을까?
ABO나 Rh 부적합증 같은 게 나오지도 않고 항응고요법이나 보관 기술 등도 없었을테니 굉장한 모험이었을 것이다.
의학의 발전 역사를 살펴보면 경험을 근거로 수많은 실패를 겪고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희생자들이 나온다는 걸 알게 된다.
의학자들의 노력 뿐 아니라 뒤에 숨겨진 환자들의 희생도 함께 기억해야 할 것 같다.
한국만 의사들이 파업하는 줄 알았더니, 유럽과 구미 대륙에서도 긴 파업의 역사가 있다.
의료 기술이 발달하면서 의료비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국가는 의료비 관리를 의사들에 대한 수입 제한으로 대체하려고 한다.
의사들의 말마따나 그렇게 국민건강을 중요시 한다면 보험 재정만 관리할 게 아니라, 연구 분야에 좀 더 투자해야 할 것 아닌가?
전문가들에 대한 권위가 점점 떨어지는 추세니 의사 집단도 예외는 될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환자들의 기대치는 의료 발전보다 몇 배는 앞서가는 기분이 든다.
전인적인 치료라는 관점에서, 환자들은 자기 말에 좀 더 귀기울여 주길 원하고 의사들은 과학자적 입장, 혹은 가부장적 태도를 고수하며 객관적인 징후 찾기 더 정확히는 검사 결과에 매달린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기, 음양오행설, 체액설 이런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생각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으나, 심리적인 지지 측면에서 현대의학이 좀 더 귀를 기울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대체의학이나 민간의학, 종교 등이 파고드는 부위도 바로 이 심적 측면일 것이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양질의 의료를 받기 위해 사회가 취해야 할 정책은, 과연 의사들의 수입 규제 이것 뿐일까?
모든 직업이나 집단은 (특히 이른바 전문가라면) 자기 이익을 뺏기지 않기 위해 투쟁할 것이고 대의명분, 사회적 정의라는 막연한 측면에서 한 집단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의료비 상승의 가장 큰 원인이 과연 의사들의 높은 수입 때문인지, 의사들의 수입을 국가가 규제하고 보험료를 더 많이 걷고 병원 이용을 제한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인지, 혹은 바람직한 방법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다.
어쨌든 저자의 한탄처럼 아무리 아프리카에서 설사 같은 가벼운 질환으로 수많은 아이들이 죽어 나가도 잘 사는 부자 나라의 90 노인 생명을 단 하루라도 연장시키는데,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투자할 것이다.
내 생명과 남의 생명은 천 명, 만 명이라 해도 비교할 수가 없을테니까.
여러가지로 생각할 꺼리가 많았던 책이다.
600페이지로 분량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쉽게 읽힌다.
저자가 캐나다 사람이다 보니 캐나다 얘기가 많이 나온다.
얼마 전에 조선 의학의 역사에 대해 쓴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를 본 적이 있는데, 현대의학의 정립은 어쩔 수 없이 서구의 것임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앞의 책이 거의 일화 수준에 그쳤다면 <의학의 역사>는 현대의학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한국의 의학도 현대의학 발전에 이바지 할 날이 오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