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그 거대한 행보 - 레이 황의 거시중국사
레이 황 지음, 홍광훈. 홍순도 옮김 / 경당 / 2002년 10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정말 재밌게 읽은 책이다.
이렇게 좋은 책을 만나면 갑자기 인생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살아 볼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쉽게도 연체가 되는 바람에 끝까지 못 읽고 반납하게 됐다.
저자의 이력이 매우 특이하다.
장제스의 군관학교 출신으로 버마 전선까지 나가서 싸웠고 예편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접시닦이 등을 전전하다가 40이 넘은 나이에 대학에 진학해 역사학을 전공한 후 뉴욕주립대 교수로 퇴직했다.
퇴직 후 활발하게 중국 역사 서적을 편찬하고 있다고 한다.
40이면 자기 분야에서 업적을 이룰 나이인데 그 때서야 전직 군인이 전혀 새로운 분야로 뛰어 들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는 게 과연 쉬운 일일까?
이 놀라운 만학도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다.

보통 한 나라의 역사를 개괄하는 이런 종류의 통사는 지나친 압축과 생략으로 맥이 빠지기 쉽다.
그런데 저자는 거시사라는 단어에 걸맞게 전체적인 역사를 조망하는 방법을 택해 600페이지 분량의 저술이 하나의 주제로 수렵되는 효과를 거둔다.
궁극적인 주제는 중국의 자본주의 이행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서문에 실린 비판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저자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중국 역사를 조망했다.
영국이 도시국가로 변형되는 과정이 수백년 걸렸듯 비록 중국은 수천년의 시간이 필요했으나 이제는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전제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완벽하게 이행했고 그 체질개선의 과정을 흥미로운 필체로 기술한다.
특히 송나라의 상업주의가 자본주의로의 변화를 가져올만큼 활발하지 않았다는 지적은 매우 날카롭다.
사실 이 주장은 한국 학자의 책에서도 읽은 바 있다.
왜 왕안석의 그 놀라운 개혁들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과정에서 오히려 국가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는지 책에서 잘 분석한다.
화폐만 유통하고 돈만 빌려 주면 끝이 아니라, 금융업이나 대부업, 관련 법규 등등 제반 시설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21세기에나 볼 듯한 여러 상업 육성 정책을 폈으니 실패나 혼란은 예정된 수순이었을 것이다.
저자의 지적대로 왕안석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개 현령으로 있을 때 성공을 거둔 것은 통제할 수 있는 작은 범위였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 전역으로 확대시키기에는 정치적 상황이 따라주지 않았다.

복잡한 중국 역사도 자주 접하다 보니 각각의 독립된 대상으로 인지가 된다.
송나라의 경우 그림을 잘 그렸다는 휘종이나 왕안석를 등용한 신종,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세울 때 인용된 철종 등이 하나의 인물로 다가온다.
삼국지에서 봤던 후한의 황제들도 누가 누군지 좀 알 것 같다.
당나라의 태종이나 현종, 측천무후 등도 어느 시대를 살았는지 대강 윤곽이 잡힌다.
이래서 독서는 즐거운 일이다.
인식의 지평을 넓혀 주니까.

책을 더욱 빛나게 해 주는 것은 역자의 꼼꼼한 각주다.
대강 뜻만 설명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관련 지식을 성실하게 설명해 준다.
번역도 퍽 매끄럽다.
특히 저자가 미국에서 활동하다 보니 중국 역사를 설명하는데 서양의 경우를 예로 들어 비교하기 때문에 훨씬 이해도 빠르고 재밌었다.
이를테면 측천무후를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와 비교하는 식이다.
구체적인 비교는 아니지만, 예시를 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이런 비교사적 작업은 저자처럼 양쪽 문화권에서 충분히 오래 산 학자들이 하면 좋을 것 같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결국 결과론에 기대어 해석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서양은 산업화와 근대화에 성공했고 중국은 실패했다.
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이 책의 한계다.
어떤 역사서도 인과론을 설명할 때 결과에 맞춰 과거를 해석한다는 한계를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수 천년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중국이, 근대화에 실패하는 바람에 과거의 영광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함이 안타깝다.
언젠가는 그 위대한 민족의 저력을 발휘할 날이 오리라 믿는다.
그러고 보면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혁명은 중국을 얼마나 낙후시켰던가!
레이 황의 다른 저서도 읽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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