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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의 55일 - [초특가판]
스카이시네마 / 2007년 1월
평점 :
초등학교 다닐 때 주말의 명화 시간에 엄마 아빠랑 같이 봤던 영화다.
너무너무 재밌고 긴장감 넘치게 봤던 기억이 생생한데 DVD로 다시 보게 됐다.
역시 나이가 좀 들어서 그런지, 생각만큼 스펙타클 하지는 않았다.
특시 얼마 전 사망한 찰스 해스턴은 너무 와일드 하게 생겨서, 그닥 호감이 안 간다.
오히려 같이 출연한 여배우 에바 가드너의 우아함이 한껏 빛났다.
영국 공사 역할을 맡은 데이빗 니븐도 성격파 배우로써 상당히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서태후나 기타 중국 장관들은 영어를 써서 그런지 실제 중국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일제 시대 영화를 만들면서 한국어 쓰는 일본인으로 분장하는 것도 저렇게 어색하게 보이지 않을까 싶다.
남작 부인과 중국 장군 사이의 로맨스는 과거형으로 잠깐 언급하고 끝나서 아쉽다.
뭔가 발전시켜 볼만한 스토리가 있었을텐데 말이다.
허망하게도 과일과 마취약을 구하러 간 남작 부인이 총에 맞아 죽었는데 찰스 해스턴의 반응이 너무 태평해, 좀 깨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정성스런 간호를 받은 병사가 분노한 것처럼, 실상 두 사람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부하의 혼혈아 딸인 테레사와 소령의 따뜻한 관계가 더 돋보인다.
자신을 미국으로 데려다 달라는 테레사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하고 떠나는 행렬에서 돌아와 그녀를 말에 태우고 돌아가는 모습은 영화의 압권이었다.
어차피 혼혈아는 중국에서도 소외를 받을 것이니, 차라리 미국으로 가는 게 더 많은 기회를 줄 것이라 생각된다.
일본이 열강 속에 끼여 의화단과 같이 싸웠다는 점은, 새삼 일본의 당시 국력이 어땠는지를 상기시켜 준다.
대체 일본의 근대화는 어떻게 이루어진 걸까?
그렇게도 짧은 시간 동안에 그렇게도 엄청나게 말이다.
제일 감동스런 부분은, 북경을 사수하며 고군분투 하던 연합군에게, 각 나라의 지원군이 도착했을 때의 모습이다.
아무리 국가나 민족을 초월하는 세계 시민주의가 발달한다 해도 여전히 한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가장 큰 테두리는 국가임을 새삼 느꼈다.
나도 모르는 애국심이 불끈 솟는 기분이었다.
다른 나라는 죄다 지원군을 보냈는데 우리나라만 국력이 약해서 군사를 못 보낸다면 얼마나 비통하고 안타까울 것인가!
어쩌면 식민 치하 조선인들이 느꼈을 비분강개와 자괴감도 이런 비슷한 느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각 대사관의 국기를 게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의화단 운동은, 청나라 입장에서 보면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자는 운동이니, 옛날처럼 맘 편하게 연합군을 응원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서태후를 비롯한 궁중 실력자들에게는 분노가 치밀었다.
특히 그 긴 손톱 보호대를 보면 짜증이 확 치밀었다.
대외적으로 무력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대내적으로는 자국민을 억압하고 온갖 권위를 갖는 무능력하지만 잔인한 독재자들!
대체 <연인 서태후> 라는 어처구니 없는 책은 왜 나온 걸까?
구한말의 고종 역시 그렇지만, 외세가 잘못해서 나라를 뺏긴 게 아니라, 위정자가 정치를 잘못했기 때문에 나라를 뺏긴 거란 사실을 명확히 했으면 좋겠다.
서태후는 너무나 뻔뻔한 할망구로 나와, 보면서 자꾸 화가 났다.
의외로 영화는 싱거웠다.
긴박한 대립 장면도 별로 없고 극적인 순간도 거의 없고 그냥 밋밋하게 그려진다.
그 점이 오히려 요즘 영화와 다르게 담백하고 소박한 맛이 있다.
오버하지 않아서 편한 점이 있다.
어린 시절 추억을 생각하며 재밌게 본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