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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책 - 죽기 전까지 손에서 놓지 않은 책들에 대한 기록 ㅣ 지식여행자 2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언숙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썩 재밌지는 않았다.
리뷰가 좋아서 나름 기대한 책이었는데 만족도 면에서는 다소 실망한 것도 사실이다.
서평집은 그 책을 내가 직접 읽지 않은 이상 대체적으로 별 재미가 없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는 좀 예외였는데, 그것은 그 사람의 문장력이 워낙 좋아 책 내용과는 상관없이 그 사람의 글 자체가 하나의 완벽한 수필로써 작용했기 때문에 인상깊게 봤던 기억이 난다.
하여튼 대체적으로 서평집은 재미가 없다.
장정일의 독서일기처럼 단순한 서평 외에 뭔가 이 사람의 내면을 읽을 수 있는 꺼리가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전체적으로 실망스럽다.
책 내용 자체가 수준이 떨어진다거나 하는 건 물론 아니다.
기대치에 못 미쳤다는 얘기다.
분량이 하도 많아 (500 페이지가 넘으니까) 나중에는 대충 휙휙 넘어갔다.
옛날에는 본전 생각 때문에 아무리 지겨워도 나중에 욕이라도 할 욕심으로 끝까지 기를 쓰고 읽었는데 요즘에는 그 강박관념으로부터 좀 자유로워져서 아니다 싶은 책은 과감하게 던지기도 한다.
재밌는 사실은, 이 책에서 저자 역시 그 얘기를 했다는 점이다.
하루에 평균 일곱 권을 읽어도 결국 읽을 수 있는 책의 한계가 분명해지고 더군다나 나이가 들면서 시력이 예전 같지 않아지자, 저자는 더 이상 재미없는 책마저 끝까지 읽어내는 사치를 부릴 수 없게 됐음을 인정한다.
결국 우리는 한정된 시간과 재화를 가진 유한한 존재이니까.
난소암으로 사망했다는 가슴 아픈 얘기는 이미 알고 있었다.
결혼 얘기가 안 나오는 것으로 봐서, 또 하루에 일곱 권의 책을 읽을 정도라면, 당연히 결혼 생활은 안 했을 것 같다.
몇 살에 죽었는지 궁금하다.
현대인은 모두 "cancer phobia" 를 가지고 있다던데 정말 암이 무섭긴 무섭다.
내가 아는 친구 한 명도 20대의 마지막을 넘기지 못하고 대장암으로 죽었다.
죽음이란 참 가까운 곳에 있는 무서운 존재다.
특이하게도 저자는 부모의 직업 덕분에 (외교관 같은 거였을까?) 체코의 프라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소비에트 연방 학교를 다녔다고 하고, 러시아로 수업을 듣는다.
러시아어라니, 참 생소하기도 하다.
일본과 러시아의 교류는 그래도 꽤 있는 모양인지 (북방 영토 문제도 있고) 일소 도서관도 있다고 한다.
하여튼 저자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러시아 학교에 편입되어 중학교 3학년 때 일본으로 돌아온다.
러시아어를 익히게 된 방법은, 역시나 책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러시아 문학 전집을 읽으면서부터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일본 역시 다이제스트가 유행이고, 교과서에서도 축약본이나 내용을 쉽게 바꿔서 싣는다.
어린이 수준에 맞춘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당시 체코에서는 문학 작품의 원문을 그대로 실을 뿐더러, 교과서에서 소설의 일부를 배우는 게 아니라, 그 소설 자체를 읽는 게 수업이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홍정욱이 쓴 "7막 7장" 에서도 미국 고등학교 수업이 신약성서나 그리스 로마 신화, 혹은 고전을 직접 텍스트로 쓴다는 얘기를 읽은 것 같다.
하여튼 이 방법이 문학의 숨결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음은 너무 당연하다.
어쩌면 우리는 아이들의 학습 능력이나 감수성을 너무 낮게 평가하는지도 모른다.
다이제스트는 확실히 원전의 맛을 떨어뜨린다.
성에 눈을 뜰 사춘기 무렵, 저자와 친구들은 포르노 구하기가 쉽지 않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고전 소설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게 된다.
이를테면 "채털리 부인의 사랑" 같은 것을 읽고 성에 대해 눈뜨는 식으로 말이다.
이 얼마나 건전한 성교육인지!
하여튼 저자는 책을 통해 러시아어에 입문했고, 다시 일본에 돌아왔을 때도 책을 통해 어설픈 일본어를 극복한다.
이렇게 이중국어자가 된 것이다.
소설만 읽을 수 있어도 무리없이 외국어를 소화할 수 있다는 말에 동감한다.
그 정도 수준이 된다면 충분히 외국에서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단 재미있는 소설을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