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 Art Travel 1
이주헌 지음 / 학고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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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씨  책이라 기대를 많이 했는데, 생각보다 손이 잘 안 가서 이제서야 읽게 됐다.
뭐랄까, 처음에는 너무 신선하고 흥미진진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점점 약발이 떨어지는 느낌이랄까?
그런 실망감이 싫어 최근에 나오는 책들은 선뜻 손이 안 갔다.
비단 소설가 같은 작가 뿐 아니라, 이런 필자들도 기력이 소진됐다거나, 재탕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좋아하는 작가에게 실망하는 게 싫어서 일부러 기피할 때가 있다.
그래도 러시아 미술은 워낙 생소한 분야기 때문에 호기심이 생겨 결국은 읽게 됐다.
서문을 보면, 푸슈킨 미술관이나 에르미타슈 미술관의 작품은 주로 서유럽 그림들이라 가능하면 소개를 자제하고, 러시아 미술만을 전시하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이나 러시아 미술관 쪽을 주로 소개한다고 했다.
사실 내가 관심있는 분야는 러시아 화가들이 그린 그림보다는, 에르미타슈에 소장된 세계적인 걸작을 원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선뜻 흥미가 안 당겨서 집중도가 떨어졌다.
특히 이콘화 같은 경우는, 러시아인의 신앙심과 민족성이 그대로 녹아있는 그림이라고 하는데, 이런 중세 스타일의 평면적인 그림은 워낙 관심이 없기 때문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마 일랴 레핀의 그림을 보면서부터일 거다) 러시아 그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유럽 회화들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어쩐지 민중주의 같은 느낌의 강렬하고 투박한 그림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차르의 압제가 워낙 심하고, 넓은 영토를 전제적으로 다스릴 수 밖에 없었던 나라의 특수 상황 때문이었을까?
그림을 보면서, 공산주의 혁명이 러시아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느끼는 기분이었다.
힘겹게 썰매를 끌고 있는 (마치 개처럼!) 어린 소년들이라던가, 무거운 배를 끌고 가는 어부들의 초라한 모습, 또 성자의 유골함을 들고 가는 행렬에 어떻게든 끼어 보려고 애를 쓰는 불구 등의 모습에서 가슴 한쪽이 시리는 느낌을 받았다.
처절하고 서글프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자들의 비루한 삶...
이런 농노들의 삶을 좌시할 수 없었던 인텔리겐차들이 브나로드 운동이나 황제 암살, 폭탄 테러 등을 일으켰을 것이다.
일종의 편견일 수도 있겠으나 이상하게도 러시아나 스페인 역사는, 영국이나 독일, 프랑스 같은 서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서글프고 고단한 느낌을 준다.

제일 관심있게 본 화가는 일랴 레핀이었다.
사실 이 사람 이름은 이 책에서 처음 봤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초상화 그림 중 하나가, 한스 홀바인이 그린 에라스무스 초상이다.
단지 인물을 모사한데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의 인격이나 성격, 개성 같은 내면의 품성을 드러내주는 초상화는 관람자에게 묘한 흥분을 준다.
이것이 사진과 다른, 회화가 갖는 매력일 것이다.
일랴 레핀이 그린, 니콜라이 2세의 초상화를 보면, 한스 홀바인의 그 정교한 붓터치와는 또다르게 쓱쓱 그린 느낌인데, 인물이 갖는 성격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바로 옆에 니콜라이 2세의 실제 사진도 실렸는데 흑백이라 그런지 몰라도 초상화보다 훨씬 덜 매력적이었다.
그림 속의 니콜라이 2세는 퍽 말랐고, 피의 일요일을 부른 전제 군주라기 보다는,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청년으로 보인다.
전제 군주라면, 헨리 8세처럼 딱 벌어진 체격을 갖거나 혹은 벨라스케스가 그린 펠리페 4세처럼 매우 오만해 보이는 (한 마디로 재수없는) 인상이 대부분인데, 일랴 레핀의 그림 속에 있는 니콜라이 4세는 그런 전형적인 군주상에서 매우 벗어나 보였다.
이렇게 말하면 좀 우습겠지만, 이런 남자라면 연애해 보고 싶을 것 같다.
이런 유약해 보이는 군주가 대체 어떻게 그 많은 농노들을 죽였는지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소비에트 혁명에 의해 쫓겨난 후 사살됐으니 죄값에 적당한 최후라 하겠다.
일랴 레핀이 그린 말년의 톨스토이도 그가 가진 평등한 공동체라는 사상을 실천하는 위대한 성인으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난다.
러시아는 특히 초상화가 발달했다고 하는데, 러시아 최고의 문호라는 푸슈킨도 퍽 매력적이었다.
언젠가 다른 책에서 화학의 아버지라는 라부아지에의 초상화를 보고 감동받은 적이 있었다.
유명인을 그림으로 만나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다.

러시아의 풍경화는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아마 워낙 거대한 자연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하면 소나무듯이, 러시아 하면 곧게 뻗은 자작나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 자작나무는 서양 소설에서 자주 봤던 나무다.
사실 직접 본 적이 없어 어떻게 생긴지는 모르겠으나, 소설에서 묘사되는 풍경으로 볼 때 느끼는 이미지는 있다.
눈 덮힌 설원이라던가, 자작나무 숲, 혹은 온통 파랗게 물든 여름의 초원 등을 보면, 오히려 러시아야 말로 영국이나 이탈리아 보다 훨씬 더 풍경화가 발달할 수 있는 고장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흐가 프로방스가 아닌 러시아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러시아의 현대 미술은 솔직히 별다른 감흥이 없다.
아직까지 나에게 추상 미술은 특별한 감동을 주지 못한다.
몬드리안의 사각형 그림이라던가 칸딘스키의 비구상 그림들은 그냥 그저 그렇다.
다만 샤갈의 유명한 그림, <마을 위에서> 라는 그림은 퍽 신비롭고 눈길을 끌었다.
이래서 유명한 그림은 다른가 보다.
누가 봐도 감동을 주니 말이다.
1차 세계대전과 공산주의 혁명을 거치면서 유대인들을 몽땅 한 마을로 몰아 넣었는데 역시 유대인이었던 샤갈은 그런 외부 상황에 구속되지 않고, 사랑하는 아내와 마을 위를 날아가는 환상적인 그림을 그렸다.
어쩌면 끔찍한 전쟁 풍경이나 마음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보다 더 관객의 마음을 시리게 하는 승화된 그림일지도 모른다.
고통 속에서 꿈꾸는 희망은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기회가 된다면 러시아 미술관을 방문해 보고 싶다.
에르미타슈 미술관과 푸슈킨 미술관, 또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등을 꼭 가 보고 싶다.
예전에는 러시아 미술에 관심이 없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호기심이 생겼다.
이래서 독서는 인식의 지평을 넓혀 준다고 했던가...
문득 드는 생각이 우리나라 미술도 외국 작가들에 의해 많이 소개되서 외국인들에게 한국이라는 나라의 매력을 느끼게 하면 좋을 것 같다.
단지 풍경이나 문화재 소개에 그치지 않고 (특히 무슨 겨울연가 여행이니 하는 이런 유치하고 한시적인 이벤트성 홍보 말고) 한국의 미술을 소개하는 기회를 많이 만들면 좋겠다.
분명히 서양 미술과는 또다른 매력을 느끼게 할 것이다.
나 역시 리움 미술관을 둘러 본 후, 우리 전통 산수화와 풍속도 등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고 보면 미술은 민족이나 국가의 위상을 높힐 뿐 아니라, 그 문화권의 특성과 정신을 대표할 수 있는 훌륭한 아이콘인 것 같다.
제발 월드컵에서 몇 등 했다 같은 이벤트성 문구로 한국의 위상을 평가하지 말고, 미술 같은 쪽에 좀 더 관심을 가져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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