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오해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사회평론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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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했던 내용과는 퍽 달랐다.
제목이 주는 뉘앙스로 봤을 때, 인간이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는,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자는 그런 류의 주장인 줄 알았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의해 지구 중심주의에서 벗어났듯, 진화론에 의해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게 됐다는, 그런 류의 과학 에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나는 굴드의 책을 처음 접했는데, 확실히 이 사람은 스스로 고백했듯, 사회주의적인 신념이 있는 것 같다.
리처드 도킨스나 칼 세이건 등과는 굉장히 다른 느낌이었다.
뭐랄까, 사회에 보다 관심이 많고 과학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순수한 믿음 같은 게 있다고 해야 할까?
과학이 실재적인 팩트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충분히 찾아질 수 있다는 기본적인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문화와 계급에 의해 영향을 받고 발전 방향 역시 그 과학이 속한 사회와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부분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 식의 고백은 자칫하면, 과학 역시 상대적이며 가변적이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굴드는 퍽 신중하게 진술을 한다.
나 역시 과학은 절대적인 진리를 찾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우주의 실체를 밝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생학이나 골상학 같은 황당무계한 이론들도 과학이라는 이름하에 맹위를 떨쳤다는 걸 사실을 접하고 보면, 굴드의 말마따나 오히려 우리가 절대적인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자만이 훨씬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별히 더 관심을 쏟는 분야가 정해져 있고 과학자 역시 편견을 갖는 제한된 능력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오히려 자신이 편견을 가질 수 있음을 끊임없이 인정함으로써 자료의 선정과 계측에 보다 신중할 수 있다는 굴드의 지적도 일리가 있다.
과학이라는 절대적 진리를 찾아가는 과학자는, 질투와 시기심과 명예욕과 편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겠는가?
하여튼 과학과 과학자를 구분하는, 어찌 보면 인간의 한계를 실토하는 그런 솔직한 자세가 신선하게 와 닿는다.
그러나 이 말은, 황우석 같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과학은 국경이 없어도 과학자는 조국이 있다는 식의 민족주의적인 말로 오인해서는 안 된다.

책의 주제는 범주화와 서열화로 압축될 수 있다.
솔직히 나는 책을 읽으면서 너무나 어이없는 이론들이 사회를 지배했다는 사실에 더 놀랬다.
흑인이 가장 열등한 인종이고, 코카서스 인종이 가장 우수하며, 그러한 서열화는 두개골 용량이나 길이 측정 등으로 지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열등할수록 원숭이를 닮았기 때문에 침팬지의 두상과 아프리카인의 두상이 비슷하다는 식으로 기술됐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인터넷 상에서 논쟁을 벌였던 사람이 생각난다.
그 사람 말이, 흑인이 미학적으로 못생기고 열등한 것은 사실 아니냐는 것이다.
이 개명천지한 21세기에도 이런 주장이 서스럼 없이 통용되는 걸 보면, 제국주의가 판을 치던 19세기에 흑인을 백인과 똑같이 보는 게 오히려 더 이상했을 것 같다.
범주화는 많은 오류를 낳는다.
이를테면 나는 여자고, 유색인종이고, 전라도 사람이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이 사회에서 나를 규정하는 척도가 된다
내가 실제로 그 범주의 일반적인 경향을 따르는지 안 따르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간주되느냐 아니냐가 문제기 때문이다.
물론 여자는 생물학적으로 남자와 완전히 똑같고 다만 관습과 교육에 의해 여자로 키워진다는 식의,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굴드의 말마따나, 같은 조상의 후손들이고 우리들의 유전학적 차이는 구분하기 매우 힘들 정도로 미세하다고 생각한다.
진화론이야 말로 인간이라는 종이, 동질한 집단임을 보증해 주는 가장 훌륭한 학설이 아닌가 싶다.
인류가 멸망하고 오직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원시 부족만 살아 남는다 해도, 그들은 인류의 유전적 다양성의 대부분을 충분히 후손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문화적 진보와 생물학적 진보가 다르다는 굴드의 지적은 매우 통찰력 있다.
생물학적 진화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겨우 5천 여년 가지고는 어떤 변화도 관찰될 수 없다고 한다.
반면, 문화적 진화는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에 의해 진행된다.
사람들은 자기가 습득한 지식과 행동양식을 후손에게 학습을 통해 전수시키고, 모방과 반복을 통해 우리는 문화를 건설해 나간다.
우리가 흔히 유전적 특징이라고 주장하는 인종별 혹은 집단별 특징은, 생물학적 진화가 아닌 이러한 문화적 진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구분이야말로, 인류의 기원과 특성을 밝히는 생물학이 함부로 기득권자들에게 이용되는 위험을 막을 방패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도킨스의 밈이라는 개념도 문화적 진화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생물학자들은 문화권에서 보이는 인간의 특성이 유전자에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윌슨 등이 이러한 사회생물학을 지지한다고 한다.
이를테면 공격성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굴드는 오히려, 행동의 유연성을 인간의 본성으로 지적한다.
어떤 상황에서는 공격적이 되고, 어떤 상황에서는 평화적으로 행동하는 것, 즉 환경에 적절하게 대응하도록 행동을 바꿀 수 있는 것이 바로 지능의 가장 큰 특징인 유연성이라는 것이다.
사회생물학자들의 주장은 가끔 모든 것이 유전자에 내제되어 있다는 말인가, 하는 허무주의와 변화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얘기인가, 하는 절망감을 느끼게 할 때가 있는데, 적용의 범위와 한계가 학자들에 따라 차이가 많은 모양이다.
제일 의아했던 것이 나는 아이를 굳이 원하지 않는데 이런 것은 인간의 본성에 위배되느냐는 문제였다.
굴드는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동성애자의 성향이 인간의 풀 속에서 계속 유지되는 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가 낳은 아이들을 돌봄으로써 그 집단의 생존률을 높히는 역할을 한다.
그들의 손에 자란 아이들은 동성애자의 유전 코드를 복사함으로써 동성애 성향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
나는 동성애자는 아니지만, 자손의 번식에 대해서는 특별한 욕구가 없는데, 이것이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설명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굴드는 재치있는 문장을 잘 구사한다.
기본적으로 문장력이 괜찮은 편이며, 무엇보다 위트가 있어서 좋다.
번역본으로 읽어야 한다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톡톡 튀는 문장들이 많아서 읽는 내내 무척 즐거웠다.
기본적으로 유명한 학자가 되려면 문장력도 훌륭해야 하는 것 같다.
세이건이 수사적인 문장을 많이 구사하는 데 비해, 굴드는 재치있는 문장이 많다.
도킨스는 비꼬는 식으로, 정면 공격을 잘한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수사를 늘어 놓는 창조론자들이나 유사과학자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정면으로 공격하기 때문에 읽을 때 시원한 느낌이 든다.
이렇게 즐거운 책을 쓸 수 있는 과학자가 겨우 60의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떴다는 게 너무 안타깝다.
세이건도 그렇지만, 60이라는 나이는 21세기에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젊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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