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를 쏘다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실천문학사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좋아하는 작가의 산문집은 마치 디저트 같다
본식 말고 추가로 얻어 먹는, 달콤한 아이스크림 같은 것!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보다는 감동이 덜하지만, 요즘 읽은 산문집 중에서는 최고였다
이 책에서도 소설을 쓰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미학적 열정" 을 꼽기도 했는데, 나 역시, 에세이나 소설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저자의 문장력이나 문체 등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 미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문열씨 같은 경우는 어떤 수필을 읽든 상당히 만족스럽다
정말 기본은 한다는 생각이 든다
고종석씨 같은 경우도 내용과는 상관없이 문장력이 좋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독자를 만족시킬 줄 안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대부분의 수필들은 한숨 나올 때가 많다
좋은 작가가 반드시 훌륭한 수필가는 아니라는 걸 새삼 확인하곤 한다
특히 제일 짜증날 때가, 마치 독자에게 뭔가 교훈을 주려고 선생님인 양 할 때다
조지 오웰의 경우, 소설도 재밌게 읽었지만 (동물농장, 정말 재밌게 읽은 소설이다) 에세이 쓰는 솜씨도 남다르다
조지 오웰에게서 제국주의자 냄새가 난다는데 대체 어떤 부분을 읽고 느끼는 건지 궁금해질 정도다
민감한 정도는 모두 다르겠지만...

그는 하층민 삶에 대해 관심이 참 많다
나는 고통에 취약해서인지, 인간의 기본적인 삶을 흔들리게 만드는 끔찍한 삶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피하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내가 다다를 수도 없는 저 높은 곳에 사는 부유층들의 삶에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서는 도저히 만나보지 못할 것 같은 어마어마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치 내 이웃이라도 되는 양 시시콜콜하게 써대는 재벌 2세 나오는 드라마를 보면 짜증이 난다
공감하지 못한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나는 기본적으로 하층민의 끔찍한 삶은 외면하는 쪽인데 (그래서 이걸 다루는 글은 읽기가 싫다, 고통스럽다고 해야 할까?) 오웰은 한 술 더 떠 직접 체험하기까지 한다
그의 글을 읽으면, 역시 영국이 한 발 앞서 간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 요즘 우리가 시민의 기본적인 삶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걸 20세기 초에 주장했다는 점이다
식민지의 피지배인들에게까지 기본적인 삶의 조건을 내세우지는 못했을지 몰라도 하여튼 자국민들의 삶에 대해서는, 우리가 기본이라고 느끼는 것들, 그러니까 밥 먹고 잠자는 곳 해결되는 그런 수준을 넘어 문화적인 욕구까지 충족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모습을 종종 발견한다
사회의 경제력이나 시민 의식이 어느 정도 진행하지 않으면 나오기 힘든 주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에서도 제일 공감했던 것이, 접시닦이는 불필요한 직업이라는 점이다
다소 역설적으로 들리기도 할 것 같은데 오웰의 주장을 들어보면 나름 일리가 있다
일류 호텔에 들어가 최상의 써비스를 받으며 최고의 음식을 즐긴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건 교묘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왜냐면 겉보기에 그럴 듯해 보일 뿐 실상 그 음식이 만들어지는 주방을 들여다 보면 끔찍할 정도로 형편없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손님은, 단지 근사한 곳에서 최고의 음식을 즐긴다는 기분을 내기 위해 엄청난 돈을 지불하고 있을 뿐, 실상 그가 받는 서비스는 싸구려 식당에 비해 큰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최상의 맛, 혹은 최상의 써비스를 위해 (즉 사치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일류 호텔 같은 공간은 실상 실체가 없는 곳이다
오히려 그 밑에 무수한 일용직들을 양산할 뿐이다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최저 임금 밖에 못 받는 하층민 계급을 말이다

오웰의 글을 읽으면서 문화적 욕구에 대해 많이 생각해 봤다
나라가 잘 살수록 상대적 빈곤이 문제라고 하던데 어떤 사람들은 먹고 살 만 하니까 배부른 투정한다고 일축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보릿고개를 생각해 보라고 한다
그런데 이건 아주 핀트가 안 맞는 말인 것이, 이미 사회는 절대 빈곤의 단계를 넘어섰기 때문에 비교 기준 자체가 변해 버렸다
자동차 없이 걸어다녔던 조선 시대를 생각해 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말이다
오웰은 구빈원 이야기를 자주 한다
어떻게 보면 할 일 없이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구빈원 같은 제도 때문에 일 안 하고 게으른 홈리스들이 놀고 먹는 것 같지만, 오웰은 그들에게 단지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의 의식주 해결해 주는 것 가지고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들도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고정적인 일자리가 필요하고, 죽지 않을 정도의 식량과 최소한의 주거지를 확보할 수 있는 임금 이외에도, 이른바 문화적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잉여 자본이 제공되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은 실업자에게도 기본적인 문화 생활은 할 수 있도록 국민들이 세금을 모아 먹여 살리는 사회 복지 국가론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옛날에는 그 효율성에 다소 반신반의 하긴 했지만 궁극적으로 봤을 때 (즉 사회의 발전 내지는 개인의 존엄성 존중이 확대되는 측면에서 봤을 때) 사회 복지 제도의 확대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아닌가 싶다

나치 장교를 구타하는 유대인의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누가 복수의 범위를 정해 줄 수 있는가?
오웰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복수는 대부분의 경우는 정당화 될 수 없는지 모른다
무슨 얘기인고 하니, 나치가 득세할 때는 나치 장교가 군중에게 얻어 맞을 때 시원함을 느끼고 누구나 그것이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치가 몰락한 후 나치 장교를 군중들이 집단 구타할 경우, 그 때는 불편한 감정이 든다 (아닌 사람들도 많겠지만)
이미 나치는 권력을 상실해 버렸고 그는 일개 나약한 개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소수로 전락해 버린 악인에 대한 강자의 복수가 과연 얼마나 정의로울 수 있을까?
전범 재판 같은 것이 부당하다고 얘기하는 건 아니다
뭐라고 딱히 꼬집어 설명할 수는 없으나, 하여튼 법정에서가 아니라 대중들이 한 개인에게 집단으로 복수하는 것은, 아무리 그가 과거에 끔찍한 악인이었다 할지라도 정의롭지 못하게 느껴진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사형제도였다
살인에 대한 정당한 사회적 복수가 바로 사형제도라고 하는데 이것의 범죄 예방 효과는 차치하고서라도, 과연 그것이 정의로운지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그를 감옥에 평생 가두어 두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복수가 불가능할까?
내 가족을 죽인 살인자라면 나는 용서할 수 있을까?
물론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용서할 수 없다고 해서 내가 그의 가족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이미 나는 또다른 악을 행한 것이 되고, 또 그가 사형당한다고 해서 내 원한이 풀리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무기징역 대신 사형만이 완벽한 사회적 복수일까?
아마도 오웰 역시 사형제도를 반대했을 것 같다

전체주의를 끔찍할 정도로 혐오한다는 점에서 오웰과 나는 비슷하다
내가 이 작가를 좋아하는 것도 나와 성향이 비슷해서인 것 같다
파시즘 내지는 전체주의가 나는 너무너무너무 싫다
"너무" 라는 단어를 대체 얼마나 붙여야 싫은 정도가 제대로 표현될까?
집단주의나 민족주의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싫다
개인의 자유와 행동의 폭이 최대한 존중되는 그런 개방된 사회가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회다
그래서인지 요즘의 민족주의 열풍이 부담스럽고 오웰의 말마따나 스포츠에 덧씌워진 민족주의적 냄새 때문에 축구경기에 크게 흥분하지도 않는 것 같다
오웰의 말에 따르면 스포츠 관람은 집단 증오심을 드러내는 행위라고 한다
창조적인 행위로 잉여 에너지를 발산할 수 없는 하층민 노동자들이 더욱 거칠게 축구 경기 관람에 몰두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고 한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여러가지 공감하는 부분들이 많았고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보다는 재미가 다소 떨어지긴 하다
트웨인에 대한 평가가 너무 재밌어 문득 "톰 소여의 모험" 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 도 같이 읽고 싶어졌다
서평가가 형편없는 책에도 찬사 일색을 늘어 놓을 수 밖에 없는 이유라든가, 시민의 자유는 법 보다 여론에 달렸다는 주장 등도 인상깊었다
전문 서평가보다 차라리 아마추어 서평가 (알라딘의 리뷰어들처럼) 들이 차라리 책의 재미를 주는데 더 낫다는 그의 탄식에 동의하는 바다
다음에는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어 볼 생각이다
47세에 결핵으로 죽었다는 것이 안타까운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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