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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임지현.이성시 엮음, 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 역사포럼 기획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평점 :
민족주의나 극우주의를 싫어하거나 혹은 국가 권력을 최소화시키자는 보편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입맛에 맞을 만한 책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매우 편협한 이념이라고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저자들의 주장과 대체적으로 생각이 비슷했다
민족을 넘어서 보다 보편적인 세계주의를 주장하는 게 요즘의 대세인 것 같지만, 아직도 네이버 댓글 같은 익명의 공간에는 민족주의를 넘어 극우적인 발언들이 판을 친다
이 책에 대한 반론의 글을 보면, 여전히 우리를 지지하는 것은 국민국가인데, 정말 국사의 해체를 주장할 거라면 차라리 민중을 볼모로 잡고 있는 그 국가 자체를 없애는 게 낫겠다고 비아냥 거린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단계가 있지 않겠나
나 역시 저자들이 지나치게 자극적인 발언으로 (국사를 없애야 한다는 식) 오히려 대중의 반감을 사고 있음에 동의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보다 느슨해진 국가 연합, 미국과 같은 합중국 체제, 혹은 유럽 연합 같은 공동체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선 민족주의에 길들여진 국사부터 하나씩 뜯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역시 궁극적으로는 민족주의의 소산이라는 저자의 글에 동의한다
시오니즘이야 말로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의 형태가 아니겠는가?
그들의 편협하고 이기적인 모습이 우리에게로 투영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식민지 문제는 너무나 예민한 주제라 뭐라고 말하기가 참 어렵다
그러나 나는 S씨의 일기와 같은 소시민적인 문헌들이 보다 많이 연구되야 한다고 믿는 쪽이다
글에 소개된 S씨의 일기를 보면, 일본이라는 거대한 적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TV에서 지겹도록 반복되는 식민지 시대의 일제 만행이 정작 그 시대를 살아간 일반 민중에게는 일상적으로 보이지도 않고 또 식민지배 체제라는 사실에 시대극 속의 배우들처럼 분노하지도 않는다
일제의 지배가 정당했다거나, 오히려 근대화에 이바지했다는 식의 차원이 아니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시대의 물결을 선두했던 몇몇 유명인들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떠밀려 가는 삶을 산 대다수의 민중들의 "실제적인" 삶이다
정말 틀에 박힌 듯이 모든 조선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치를 떨고 반독립 투사처럼 행동했을까?
그들의 의식구조 속에는 일제야말로 나라를 빼앗은 철천지 원수고 반드시 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굳은 결의로 차 있었을까?
어쩐지 이거야말로 신화 같다
"태평천하" 에 묘사된 윤직원 같은 인물은 그저 풍자나 조롱의 대상으로만 삼았으나, 보다 다양한 인물들에게 카메라를 댈 필요가 있다고 본다
거대 담론에 묻혀 버린 소시민들의 일상이나 사고방식에도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다
이영훈 교수의 논문은 찬반이 극렬하게 갈릴 수 있는 다소 위험하고 도발적인 문구들이 많았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나는 이 논문에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다
내제적 발전론, 혹은 자본주의의 씨앗이 싹텄다는 식의 주장은, 오히려 서구 이론에 우리 역사를 끼워 맞추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주장처럼, 조선 사회는 선물사회였고(가족 공동체주의나 부조, 축의금 같은 제도에서도 보듯이) 국가가 잉여 가치를 걷어간 후 나눠주는 재분배 사회였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사유재산이 경제 발전의 중요한 축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와는 질적으로 완연히 달랐다고 생각한다
이효석이 모더니스트였다는 논문도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대표적인 향토 소설인 "메밀꽃 필 무렵" 은 저자의 말마따나 액자에 들어 있는 고향 풍경일 따름이다
정말로 향토 그 자체에 애착을 품고 생활인의 모습을 그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장의 탐스러움 때문에 우리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서정적인 향토 소설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근대화의 현상이었던 모더니즘을 부정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화상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는 바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전인권의 인터뷰집을 보면 마지막 황손이라는 이구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황실복원운동에 동의하는 입장인지 모르겠는데, 책을 읽으면서 황손을 예우해야 한다는 의견에 도대체 동의할 수가 없었다
이미 사라져 버린 조선왕조, 그것도 치욕스럽게 이민족의 지배를 받게 만든 생명력 다한 왕조의 후손들을 현대판 귀족처럼 국가가 지원해 줘야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오히려 왕실 문화 전수자로써 문화재적인 측면에서 보존하자면 기꺼이 동의하겠다
박지향의 논문에서도 나온 바지만, 고종이나 순종, 명성황후 등 당시 지배층의 실정이야 말로 명백히 규명되야 할 문제라고 본다
이완용 등 일부 친일파 몇에 의해 과연 조선이 무너졌을까?
국가를 책임지는 사람은, 더구나 전제왕조 체제의 주권자는 명백히 국왕이 아닌가
왜 고종은 어리석은 신하들에 둘러싸여 길을 헤매는 가엾은 국왕이라는 이미지로 보호되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조선왕조 몰락에 명백하게 책임이 있는 명성황후는 말할 것도 없이 성공한 뮤지컬 한 편으로 온 국민에게 추앙받는 국모로 변모했다
드라마와 현실은 엄연히 다른 것이고 역사적 평가야 말로 실로 냉철해야 한다고 믿는다
제국주의의 희생양 식으로 어영부영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의친왕이 독립투사였다는 이미지 역시 보다 사실적으로 해부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읽는 사람에 따라 거부감이 강할 수도 있는, 문제제기가 뚜렷한 책이다
어쨌든 다양성의 존중 측면에서 많은 관점의 글이 나왔으면 좋겠고 식민지 시대에 대해서도 천편일률적인 희생자적 하소연이나 압제에 대한 저항 식의 당위적인 모습 말고도 진짜 그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민중들의 다양한 모습이 발굴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