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를 오해하는 현대인에게
남종국 지음 / 서해문집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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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물이라 그런지 너무 가볍다는 느낌이 들어 아쉽다.

베네치아 해상제국에 관한 저자의 책을 너무나 흥미롭게 읽었던 터라 더욱 아쉬운 듯하다.

칼럼은 아무래도 요즘의 시사적인 이야기도 들어가고 분량이 한정되어 밀도있게 쓰기 어려운 단점이 있긴 할텐데, 내용도 내용이지만 내 기준으로는 뜬금없는 비판들이 많아 공감이 어려웠다.

역사적 사건을 요즘 시사적 이슈와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항상 느끼는 바지만 자기 전문 분야에서만 의견을 개진해야 실수가 없는 것 같다.

특히 한 권의 책에서라면 더욱더 말이다.


기억에 남는 몇 가지

1) 설교자는 중세의 아이돌이었다.

오락거리도 부족하고 누구나 볼 수 있는 언론매체도 없었던 만큼 설교자들이 대중을 상대로 강론하는 것이 중세인들에게는 과연 큰 이벤트였을 것 같다.

현대 사회에서 부흥회는 그 교회 사람들만의 이벤트이지만 가톨릭 사회를 살던 중세인들에게 설교자는 신앙을 소재로 한 굉장한 관심거리였던 모양이다.

2) 유럽의 중세 상인은 귀족 계급이 아니었으나 시민사회의 주역으로 성장해 귀족을 몰아내고 근대 사회를 이룩했다.

왜 동아시아에서 특히 조선에서 상인 계층은 하나의 계급으로 발전하지 못했을까?

어쩌면 서양 역사에 일대일 대응을 하다 보니 조선에도 상인 계층이 있었다고 지나치게 의미 부여를 한 것은 아닐까?

3) 도덕의 진보는 이성과 "과학"의 힘으로 가능했다.

종교나 성리학 같은 도덕론, 철학 등이 아니라 과학의 발전과 함께 인간의 도덕성도 진보했다는 관점이 신선하다.

4) 대항해 시대를 이끈 원동력에는 금과 향신료를 찾기 위한 욕망도 있었지만 기독교 낙원을 찾으려는 종교적 열망도 강한 동기가 됐다는 점이 신기하다.

십자군의 근대판인 것인가?

5) 해상제국을 이룬 베네치아 경제의 원동력은 직물과 향신료 무역 뿐 아니라 선박 건조, 출판업, 유리 세공업도 있었다.

이 내용은 저자의 앞선 책에서 읽은 바다.

역시 역사에 남는 천 년 역사의 도시국가가 그냥 이루어진 게 아닌 모양이다.


저자는 민중사에 대해 언급하면서 허난설헌이나 전봉준을 통해서도 조선사를 바라봐야 한다고 했다.

과연 민중은 역사를 이끄는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전봉준은 동학 농민 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함께 언급될 수는 있겠지만 나폴레옹 등과 같은 역사의 물결을 바꾼 주체라고 할 수 있을까?


<인상깊은 구절>

63p

전염병이나 불임과 같은 자연현상과 불행을 종교적 관점이 아니라 과학적 관점에서 이해하게 된 것은 인류가 이룩한 진보이자 혁신이었다. 그런 점에서 인류의 도덕적 진보는 종교가 아니라 이성과 과학의 힘이었다는 마이클 셔머의 지적은 조금 과한 면이 있지만,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113p

주류 세력이 소수 집단과 주변 세력을 차별하고 더 나아가 탄압하는 일은 오랜 역사에 걸쳐 빈번히 일어났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잘못된 관행이 여전히 계속되는 것을 보면 차별과 배제는 인간 본성에서 나온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기본적으로 다수가 소수를 배척하고 탄압하는 태도는 대개 무지, 편견, 불관용, 종교적 광신 등에서 나온다.

122p

"시대적 가치관과 보편적 진리는 반드시 구분해야 합니다. 오늘날 '여성이 교회 집회에서 말하는 것은 자신에게 수치가 된다'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말을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적 진리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성인이 한 말이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을지라도 남녀 구별과 신분의 고하가 엄격했던 그 시대의 가치관이라고 생각해야 상식적인 일입니다. 시대상을 보는 안목과 역사의식을 지닌 비판적 읽기는 법과 종교를 막론하고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139p

지옥에 대한 공포는 근본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나온다.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하는 관행은 종교의 오래된 전술이었다. 몽테뉴는 지옥의 공포를 통해 도덕이나 종교를 강제하려는 태도와 종교적 광신주의를 경멸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수상록>에서 "나는 내가 양배추를 심고 있을 때 죽음이 나를 찾아오기를 바란다. 죽음에 무심할 때, 그러니까 죽음보다는 아직 완성이 덜 된 내 정원을 더 생각하고 있을 때, 그럴 때 죽음이 나를 찾아왔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면서 죽음에 무심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이처럼 그에게 철학을 한다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183p

거짓도 다수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진실이 된다. 토마스 만은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로 만드는 것은 궁극적으로 모두 폭력이다"라며 가짜와 위조가 진실을 압도했던 중세 유럽 사회의 모습을 비판했다. 


<오류>

64p

프랑스 왕위를 두고 선왕의 외종질인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선왕의 6촌 남계 형제인 필리프 드 발루아에게

-> 필리프 드 발루아, 즉 필리브 6세는 선왕, 즉 샤를 4세의 6촌이 아니라 4촌이다. 또 에드워드 3세는 샤를 4세의 외종질이 아닌 조카라고 해야 한다. 외종질은 외사촌의 자녀, 즉 5촌간인데,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 이사벨은 샤를 4세의 누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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