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신사계급 - 고대에서 근대까지 권력자와 민중 사이에 기생했던 계급 카이로스총서 59
페이샤오퉁 지음, 최만원 옮김 / 갈무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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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너무너무 재밌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

정말 재밌게 읽었고 매 문장 하나하나마다 전부 밑줄 긋고 싶은 심정이다.

사실 지루할까 봐 걱정했던 책인데, 200 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이 이렇게도 알차게 잘 쓰여질 수 있을까 감탄했다.

저자가 구술한 것을 미국인이 엮은 책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자기 전공 분야라 해도 이런 대단한 책을 그냥 말로 풀어 쓸 수 있는 것인가 놀랍기만 하다.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긴 했다지만 영어 실력도 정말 놀랍다.

중국어판은 영어로 초간된 책을 다시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편집 디자인과 제목만 조금 더 산뜻하게 바꾸어서 중국 역사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널리 읽었으면 좋겠다.

훌륭한 책은 재밌는 소설을 읽는 것처럼 흡입력이 대단함을 새삼 느끼는 바다.


사실 중국의 신사 계급이 뭔지 늘 모호한 느낌이었다.

영국의 신사는 금방 와 닿는데 중국의 신사는 우리나라의 양반이나 사대부 같으면서도 용어가 달라서 그런지 정확히 어떤 계층인지 이해가 안 갔다.

더군다나 중국은 조선과는 달리 노비 제도가 오래 전에 폐지됐다고 들어서 신사가 유럽의 귀족처럼 세습되는 신분인지, 조선처럼 양반과 평민, 노비의 구분이 확실한 것인지 궁금했었다.

이 책에 따르면 신사는 전현직 관리들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양반처럼 조상이 과거에 급제했을 경우 그 후손들도 과거를 볼 수 있는 일종의 관료 예비군으로서 대접받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어쨌든 신사는 유럽의 귀족처럼 혈통으로서 세습되는 것은 아니고, 조선의 사대부처럼 관료층이나 지식인 계층을 일컫는, 유동성이 있는 계급 같다.

그래서 이들은 유럽과 달리 정치 권력을 나눠 가질 수 없었다.

왜 동양이 전제군주정이고 시민혁명이 불가능했는지 이해가 된다.

나는 단순히 서양이 산업화에 성공해 중산층이 성장했기 때문에 시민혁명을 일으켰다고 생각했는데, 단순히 산업화의 문제가 아니라 유럽과 달리 왕의 권력을 나눠 갖는 계급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19세기 말까지도 전제군주정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하늘의 뜻을 받아 황제가 된다는 관념 때문에 역성혁명이 가능하고 심지어 유방이나 주원장처럼 가장 밑바닥 층에서도 황제위에 오를 수 있었으나 그 개인은 역시 똑같은 전제군주가 될 뿐 누구와도 권력을 나눠 갖지 않고 똑같은 독재자가 될 뿐이었다.

오늘날 중국의 공산당이 일당독재를 지속하는 것도 오랜 중국의 역사 경험 탓도 있을 것 같다.

황제의 권한은 법에 의해 제한받지 않고 과거로 뽑힌 관리들과도 양분하지 않으므로 이들 지식인들, 즉 신사 계급은 유교적 이념으로 도덕적 권위를 내세워 적절히 규제하려고 했다.

정치적 권력은 없으나 도덕적 권위를 장악한 셈이다.

저자의 날카로운 분석대로 중국은 너무나 거대한 나라였고 교통은 매우 열악했으므로 황제의 전제권은 지방 곳곳까지 미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 거대한 제국이 깨지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이 신사 계급이 국가와 협력하여 지방 통제를 잘 했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지방 자치제 개념이랄까.

그럼에도 오늘날처럼 신사 계층에 정치 권력을 양도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중앙 정부의 요구를 향촌 사회에 맞게 조정하는 역할을 했고 당연히 자신들의 특권이 세거하는 지역에서 유지되기를 기대했다.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권위의 원천은 바로 유교, 즉 윤리도덕이었므로 실제적인 자연과학은 농민이라는 생산계급에 맡겨져 과학의 발전도 더딜 수 밖에 없었다.

동아시아에서 왜 시민혁명이나 산업화가 불가능했는지에 대한 저자의 날카로운 분석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신사 계층은 지역에서 권위를 행사해야 했기 때문에 가능하면 종족으로서 모여 살게 된다.

마치 조선에서도 17세기 이후 장남에게 전 재산을 몰아줘서 재산이 쪼개지는 것을 막고 차남 이하는 근처에 세거하면서 지역에서 일정 부분 세력을 유지하는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가진 게 없는 농민들은 여러 식구가 먹고 살기도 힘들어 대부분 핵가족 형태로 분산됐던 반면, 지킬 게 많은 이들 신사 계급은 한 지역에 거대한 종족을 형성하고 대저택에 모여 살았다.

이 책에 돋보이는 부분이 바로 농촌에 관한 분석이다.

농업 생산성의 한계로 인구가 계속 늘어날 경우 농민들은 소작료를 내고 나면 파산하게 된다.

그럼에도 중국 농촌이 계속 유지가 됐던 것은 자급자족 사회였기 때문에 소비를 위한 추가 소득이 거의 불필요했고, 무엇보다 농번기에 양잠이나 직조 같은 가내 수공업으로 벌충을 한 덕분이라고 한다.

그런데 강제로 서구에 의해 개항이 되면서 지주계층이 이들 농가의 제품을 구입하지 않자 농촌은 정말로 파산에 직면하고 만다.

어차피 서양 제품을 구입할 여력이 있는 이들은 지주층이라 결국 농민들은 소비자를 잃고 만 셈이다.

농촌이 지주들의 착취와 낮은 생산성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계속 늘 수 있었던 까닭이 바로 가내 수공업에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조선 농촌에도 해당되는 말인지 궁금하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개방 전에 자본주의의 맹아니, 산업화 직전 단계였다느니 하는 말들은 전혀 맞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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